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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조택원의 가사호접(袈裟胡蝶)

기자명 정혜진

승무에 담긴 불교의 경건함‧내면세계 재해석

1933년 ‘승무의 인상’ 제목으로 초연…정지용 발의로 명칭변경
15살에 러시아 민속춤으로 무용계 입문…한국 최초 남성무용수
프랑스 200개 도시서 100만명 동원…한국근대무용계에 큰 족적

불교적 세계관을 살린 ‘가사호접’을 만든 한국 최초의 남성무용가 조택원씨는 한국근대무용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96년 3월 서울 국립극장 앞에 세워진 그의 춤비. 
불교적 세계관을 살린 ‘가사호접’을 만든 한국 최초의 남성무용가 조택원씨는 한국근대무용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96년 3월 서울 국립극장 앞에 세워진 그의 춤비. 

1938년 프랑스 기메 박물관에서 낯선 동양인의 무용 공연이 열렸다. 이 공연을 관람한 저명한 무용평론가였던 페르노와 디보는 그를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위대한 예술가”라 극찬했다. 또 파리 오페라발레단의 예술 감독인 세르쥬 리파(Serge Lifar)는 여기서 공연한 ‘가사호접(袈裟胡蝶)’ 무용을 “이국적 전통의 내면에 깃든 심오한 철학에 깊이 매료된다”고 호평을 하였다. 그이가 바로 최승희와 함께 모던발레와 현대무용 등의 서구무용을 한국 춤에 접목시켜 한국 신무용의 지평을 열었던 조택원(1907~1976)이다.

학창시절 잘나가던 정구 선수였던 조택원은 1926년 일본 현대무용계의 거장이었던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접하고 무용에 매료되어,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그의 문하생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무용가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1932년 귀국과 동시에 결혼해 조택원무용연구소를 개설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삶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 조선총독부 후원으로 제작된 내선일체 주제의 ‘부여회상곡’ 연출과 안무 등 44년까지 이어진 친일행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 활동이 평생의 낙인으로 남았다. 해방 직후에는 이승만 정권과의 불목으로 십 수 년 해외를 떠돌아야 했다. 이런 굴곡진 삶을 예견한 듯 만들어진 그의 대표작이 바로 ‘가사호접’이다.

조택원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작품은 1933년 2월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제1회 조택원무용발표회에서 ‘승무의 인상’으로 초연되었다. 이후 시인 정지용(鄭芝溶)의 발의로 ‘가사호접’으로 명칭이 바뀌게 됐다. 이 작품의 창작 동기에 대해 조택원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귀국해서 나는 승무(僧舞)를 배웠다. 지금은 저 세상으로 간 김백옥이라는 기생(妓生)이 당시 승무를 잘 추어, 그에게서 배웠다. 그때 나는 광대나 기생들이 추는 승무를 여러 번 보았는데 너무 잡스럽다는 느낌을 가졌었다. 웃으면서 추기도 했다. 형편없다는 분개심을 가졌다. 이것이 예술이 되려면 우선 자존심을 가져야 하고 나의 생각, 나의 해석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대로의 해석을 붙여 창작한 것이 ‘승무의 인상’이었다.” 조택원은 기방 계열로 전승된 승무가 불교의 종교적 경건함이나 내면세계를 담지 못하는 점을 비판하며, 이에 반발하여 ‘승무의 인상’을 안무하게 되었다고 밝힌 것이다.

“속세를 동경한 중이 심산유곡을 버리고 새벽녘에 사바세계로 내려온다. 한걸음 또 한걸음…. 뚜벅뚜벅 걸어온다. 그리하여 마침내 가사를 내동댕이친다. 여기서부터 음악은 굿거리로 변하고, 중은 환희와 광란의 춤을 춘다. 놀다 놀다 그는 지쳐 쓰러진다. 쓰러져서 생각한다. 옛 시절을 생각한다. 옛날에 의지하던 불교를 생각한다. 깊은 생각에 잠겨 옛 시절을 그리워하며 다시 가사를 집어 산으로 가려고 해본다. 그러나 그는 이미 파계승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앞으로도 갈 수 없고 뒤로도 갈 수 없다. 결국은 죽을 길밖에 없는데 죽을 수도 없다. 마침내 그는 가사를 집어 던지고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조택원이 회고록에서 밝힌 안무의 변(辯)이다. 

‘가사호접’은 총 6분 남짓의 길지 않은 독무작이다. 음악으로 작품의 분위기가 전환되는 구성으로만 본다면 크게 4개의 장면으로 나눌 수 있다. 슬픈 선율에 맞춰 심산유곡을 버리고 사바세계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려오는 도입 부분에 이어, 곡조가 조금 경쾌해지면서 가사를 나비의 날개짓처럼 흔들며 속세를 즐기는 부분. 또 경쾌하게 음악이 바뀌며 가사를 던지기까지의 열락과 환희를 표현한 부분. 그리고 마지막으로 처음과 같은 슬픈 선율로 변곡(變曲)이 되며 번뇌를 표현하는 부분. 총 6분의 4개 구성 중, 가사를 내동댕이치는 것은 마지막의 번뇌를 표현하는 장면 직전인 3번째 구성에 속한다. 그러나 조택원은 3번째 구성까지는 단 두 줄로 설명을 마무리하고 마지막의 번뇌를 표현하는 장면 설명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그만큼 조택원 스스로 ‘가사호접’의 안무 비중이 번뇌에 있음을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조택원은 15살이던 1921년에 블라디보스토크 고국방문무용단을 이끌고 온 박세면에게 ‘코팍춤’을 비롯해 러시아 민속춤을 배우고 다음 해인 1922년 토월회의 ‘사랑과 죽음’에 출연했다. 입장료를 받고 공연된 최초의 무대무용이었다. 스스로 한국 최초의 남성무용수로서 기록을 만들어 가던 그는 무용에서도 최초의 시도를 하였는데, 바로 ‘가사호접’의 무용음악을 당시 ‘홍도야 우지마라’로 유명한 김준영(金駿泳,1907~1961)에게 의뢰한 것이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2중주로 베이스로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바이올린의 선율이 중심이 되는 형식인데 1930년대에 작곡한 음악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세련되고 또 구슬프다. 당시의 암울한 시대 영향인지 윤심덕의 ‘사의 찬미’를 떠올리게도 한다. 혹자는 피아노의 리듬은 마치 굿거리와 자진모리를 연주하는 듯하고 바이올린의 선율은 민요를 노래하는 듯하다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 악보는 한국무용사 최초의 것으로 남아 있다.

프랑스 문화성과 유네스코 후원으로 이루어진 프랑스 공연에서는 전국 200여개 도시에서 1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매 공연마다 5만 프랑에 달하는 개런티를 받을 정도로 인기를 누린 조택원이었다. 그는 (사)한국무용협회 이사장과 고문, (사)한국민속무용단 설립 및 단장, 한국민속예술단 단장, 1972년 예술원 회원 등의 열정적인 사회활동을 하였고, 무용가 최초로 금관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한국무용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겨 1996년 3월에는 국립극장에 그의 ‘춤비(碑)’가 세워지기도 하였으나, 그는 개인사적으로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던 굴곡진 삶을 살았던 풍운아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가 남긴 가사호접의 ‘열린’ 결론이, 부처와 불법과 승가로 돌아가 의지하여 구원을 청하고자 하는 “귀의(歸依)”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정혜진 예연재 대표 yeyeonjae@gmail.com

 

[1527 / 2020년 3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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