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김제 금산사와 용명 스님
16. 김제 금산사와 용명 스님
  • 임은호 기자
  • 승인 2020.03.09 15:02
  • 호수 15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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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수호 의지 끝끝내 굽히지 않고 온몸으로 채광꾼 저지

모악산 일대 금맥 찾아 금산사 도량까지 들어온 채광꾼 의해
돌과 쇠망치에 맞아 쓰러진 용명 스님 잦나무 아래에서 입적 
대중스님들 결사적 항거로 호남 대표하는 대가람 된 금산사
미륵신앙 중심도량 김제 금산사는 구한말, 경내를 파헤치려는 채광꾼들로 인해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당시 주지였던 용명 스님이 목숨을 바쳐 도량을 수호해 호남을 대표하는 대가람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미륵신앙 중심도량 김제 금산사는 구한말, 경내를 파헤치려는 채광꾼들로 인해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당시 주지였던 용명 스님이 목숨을 바쳐 도량을 수호해 호남을 대표하는 대가람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호남 제일 미륵신앙 도량으로 불리는 조계종 제17교구본사 금산사가 위치한 모악산 일대는 만경강과 동진강 하류에김제‧만경평야를 끼고 있는 우리나라 제1의 곡창지대다. 모악산에는 함금석영맥이 많아 산금(山金) 광산이 있었다. 예로부터 모악산에서 흘러내리는 원평천과 두월천의 충적층에서 사금이 많이 채굴되기도 했다.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거르면 사금이 쏟아진다는 소문이 돌자 금덩어리에 혈안이 된 사람들이 모이면서 산자락 논밭마다 사금 캐는 이들로 북적거렸다.

구한말, 나라는 거대한 근대화의 물결 속 급변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날로 어수선해져갔다.


일본과 중국, 러시아 등 열강들이 한반도를 집어삼키기라도 할 기세로 나라 전역으로 스며들었다. 이런 이들 가운데는 지하자원에 관심을 가진 기술자들도 있었다. 이들에게 모악산 일대를 지나는 금맥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이들은 저마다 기득권을 주장하며 산을 파헤쳤지만 나라가 혼란스럽던 시절이라 아무도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

1900년에 들어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져서 금산사 사리탑 근처까지 금을 캐낸다며 파헤쳤다. 어느새 사찰도처에는 채광꾼들이 득실거렸다. 급기야 이들은 금산사 도량까지 금광맥이 뻗어있다며 사찰을 마구 파헤치기 시작했다. 사중에서 수행 정진하는 스님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조선왕조 500년간 받은 탄압에 짓눌려 있던 터라 그렇지 않아도 위축된 상태에서 이제는 사찰마저 금을 캐는 채광꾼들로 황폐해 질 지경이었다. 

비록 사찰에 적지 않은 스님들이 있었지만 외세를 등에 업고 마구잡이로 경내에 난입하는 이들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채광꾼들의 만행이 극에 달하자 스님들은 지방 관아와 서울의 중앙 내자원에 사찰 경내의 불법 채광에 대한 부당성을 알리며 이를 막아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천년 역사를 간직한 고찰을 보호해 달라는 호소였다. 스님들의 절절한 호소에 마침내 1901년(광무 5) 12월 말, 공식적으로 불법 채광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채광꾼들의 만행은 그치지 않았다.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했던 당시 정부의 금지령은 그야말로 종이호랑이의 엄포나 다름없었다. 채광꾼들의 행패로 사찰이 곧 폐허의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었다.  

당시 금산사에는 용명당 각민대사(1846~1902)가 주지로 주석하고 있었다. 1846년(헌종 12) 8월9일 전주에서 동래 정씨 석노와 어머니 청송 심씨 사이 둘째 아들로 태어난 용명 스님은 20세의 나이에 영주 정토사 지진장노(智眞長老)에게 출가해 스님이 됐다. 용명 스님은 조선말, 국내외 사정이 매우 혼란할 때 금산사 주지로 재직하며 안으로는 금산사의 가람수호를, 밖으로는 호남 도승통(都僧統)을 금산사에 둬 호남지역 전체의 불교발전을 이끄는 등 열과 성의를 다했다.

“금산사는 미륵부처님이 내려오실 신성한 곳이오. 그대들은 어찌해 재물에 눈이 멀어 신성한 땅을 더럽히려 하는 것이오!”

1902년 새해 첫날, 곡괭이와 삽을 든 눈먼 자들에게 향한 용명 스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경내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채광꾼들은 용명 스님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았다. 용명 스님은 미륵전 앞 잣나무 아래 가부좌를 틀고 앉아 소란을 피우는 채광꾼들에게 호통을 쳤다. 

“신성한 부처님 도량이 황금에 눈이 먼 놈들의 곡괭이로 파헤쳐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모두 나가시오.”

가람수호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용명 스님은 온몸으로 채광꾼들을 막아섰다. 그러나 채광꾼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이 던진 돌과 쇠망치에 맞아 쓰러진 용명 스님은 결국 가부좌를 틀었던 잣나무 아래에서 그대로 입적하고 말았다. 세납 57세 때의 일이다.

대중스님들의 통곡소리가 온 산중에 울렸다. 목숨 바쳐 도량을 지키려 했던 용명 스님의 입적을 눈앞에서 지켜본 대중들은 이후 결사적으로 항거했다. 대중들은 신성한 도량을 지키고자 했던 용명 스님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혼탁한 시기, 금산사 주지가 되면서 미륵신앙 근본도량이라는 금산사의 전통을 지켜나가고자 했던 용명 스님의 의지를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용명 스님은 억불숭유의 시대, 불교를 다시 일으키고자 한 구도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용명 스님의 순교 후, 대중들은 한마음으로 뭉쳐 결사적으로 가람 수호에 나섰다. 용명 스님을 본받아 자신들 또한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신심이 솟구쳤다. 워낙 극렬하게 저항하는 대중들로 인해 채광꾼들도 슬금슬금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단 한명의 채광꾼도 금산사 근처에 나타나지 않았다.

용명 스님의 입적을 지켜본 잣나무는 100여년이 넘게 그 자리를 지켰다. 미륵전 앞에 조촐하게 자리한 잣나무는 비록 울창하거나 무성하지는 않지만 빼놓을 수 없는 금산사의 상징 중 하나였다. 달력 등에 나오는 금산사 전경 사진의 구도도 대부분 잣나무를 기준으로 했다. ‘뜰 앞의 잣나무’라는 별칭을 갖고 있었던 잣나무는 마치 금산사의 포토라인과도 같았다.

잣나무는 금산사에 대한 추억담에도 자주 등장한다. 신대현 능인대학원대학 불교학과 교수는 자신의 저서 ‘우리 절을 찾아서’(혜안, 2010년)에서 금산사에서 하루 묵었던 추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절 주변은 온통 눈밭이었고 게다가 휘영청 뜬 보름달에서 내려온 고운 달빛마저 반사되니 그야말로 별천지에 온 느낌이었다. 이쯤 되면 열락이 따로 없고 환희심이 멀리 있지 않다. 그때 이 잣나무가 그렇게 크게 보일 수가 없었다. 미륵보살이 잣나무에 앉아서 내려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었다.”

현 조계종 총무원장인 원행 스님은 용명 스님의 유지가 담긴 잣나무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2005년부터 두 차례 조계종 제17교구본사 금산사 주지에 재직한 원행 스님은 주지로 부임하며 ‘뜰 앞의 잣나무’ 템플스테이를 열고 대중에게 불교문화를 알렸다. 또 이를 발전시켜 토크 콘서트와 템플스테이를 결합한 ‘내비둬 콘서트’를 선보여 큰 인기몰이를 했다. 
 

잣나무는 2007년 수명을 다했고 그 자리엔 용명 스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이 세워졌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비스듬히 누운 채 푸르게 자라던 금산사 잣나무는 안타깝게 2007년 수명을 다했고 그 자리엔 용명 스님의 일대기를 기록한 작은 비석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늘날 금산사가 호남을 대표하는 대가람으로 남아있는 것은 도량을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용명 스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월은 무심히 흘러 모든 것을 망각의 늪 으로 밀어 넣지만 용명 스님의 위법망구의 정신은 지금도 여전히 금산사 대중스님과 불자들의 가슴에  생생한 전법의 한 페이지로 기억되고 있다.

김제=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528호 / 2020년 3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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