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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25·26대 총무원장 의현 스님-상

통합종단 조계종 출범 이후 임기 4년 채운 첫 총무원장

향곡 스님 따라 봉암사 갔다 성철 스님 시봉하며 결사에 동참
1986년 8월 녹원 스님 사퇴로 중앙종회서 총무원장으로 선출
해인사 승려대회서 “10·27법난은 폭거…호국불교개념 재정립”

의현 스님은 1986년 9월7일 해인사 승려대회를 개최해 불교의 자주성 회복과 불교관련 악법 철폐를 촉구했다. ‘한국불교100년(민족사)’

현대 조계종사에서 의현 스님만큼 인색한 평가를 받는 총무원장도 드물다. 의현 스님은 통합종단조계종이 출범한 이후 처음으로 4년의 임기를 채웠으며 재임까지 이뤄낸 최초의 총무원장이었다. 재임기간 불교방송 개국과 중앙승가대 4년제 인가, 불교텔레비전 개국의 초석을 다진 것 등 당시 한국불교의 수많은 숙원과제들을 해결하는 성과도 냈다. 그럼에도 의현 스님은 여전히 ‘반개혁적 인물’로 낙인찍혀 있다. 1994년 개혁회의로부터 종단 밖으로 내몰린 이후 현재까지도 조계종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비운의 삶을 살고 있다.

의현 스님은 1936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게 되면서 외할머니에게 맡겨졌다. 신심 깊었던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절을 찾는 일이 많았고, 이는 출가 인연으로 이어졌다. 13세 되던 해 외할머니를 따라 부산 기장의 묘관음사를 찾았다가 그곳에서 향곡 스님을 만나 수행자의 길에 들어섰다. 이 무렵 향곡 스님은 성철, 청담, 자운 스님 등과 문경 봉암사에서 결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향곡 스님을 따라 봉암사로 향한 의현 스님은 그곳에서 성철 스님을 시봉하며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의현 스님이 봉암사 결사에 참여하게 된 계기였다.

의현 스님은 1952년 해인사에서 상월 스님을 은사로 수계했다. 이후 스님은 봉암사 결사에서 인연을 맺은 자운 스님과 더불어 불교정화운동에도 참여했다. 그 시절 의현 스님은 “율장정신 회복”을 외친 자운 스님을 시봉하며 정화운동의 최일선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의현 스님이 조계종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10여년 뒤인 1969년 12월 제2대 중앙종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면서부터다. 그의 나이 서른셋이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종단 정치를 시작했지만 특유의 친화력과 뛰어난 정치 감각으로 스님은 일찌감치 종단의 중심그룹으로 성장했다. 3~8대 중앙종회의원에 잇따라 선출됐고, 1967년 대승사 주지를 시작으로 은해사, 동화사 주지를 맡았다. 1980년대 들어 의현 스님은 월주, 초우, 진경, 천장, 봉주, 벽파 스님 등 40대 중진그룹과 더불어 종단의 핵심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의현 스님이 종단의 중심으로 성장하기까지 순탄한 길만 걸었던 것은 아니다. 스님은 1980년 10·27법난 당시 “신군부의 만행을 규탄”하는 발언으로 보안사 서빙고실에 끌려가 1달여간 모진 고문을 받았고, 풀려난 이후에도 신군부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1981년 6월 7대 중앙종회의장으로 피선됐지만, 당시 총무원장 초우 스님과의 갈등으로 6개월 만에 동반 퇴진했다. 1983년 1월에도 중앙종회의장에 선출됐지만, 그해 8월 신흥사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으로 중앙종회가 해산되고 비상종단이 출범하면서 다시 중앙종회의장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럼에도 의현 스님은 탁월한 정치적 수완으로 종단이 혼란할 때마다 총무원장 후보로 꾸준히 거론됐다.

의현 스님이 조계종 제25대 총무원장에 선출된 것은 1986년 8월이었다. 이 무렵 조계종은 총무원장 녹원 스님이 동국대 이사장을 겸직하는 문제로 논란이 일었다. 당시 동국대 이사장은 총무원장과 더불어 종단의 상징적인 위치였다. 때문에 총무원장이 동국대 이사장을 겸직하는 것은 종단 내부의 반발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녹원 스님은 8월22일 기자회견을 열어 총무원장 사퇴를 선언했다.

중앙종회는 8월25일 제86회 임시회를 열어 녹원 총무원장의 사표를 수리하고, 새 총무원장 선출을 진행했다. ‘8대 중앙종회회의록’에 따르면 이날 총무원장 후보로 의현 스님과 밀운 스님이 나섰다. 당시 의현 스님은 중앙종회 내에서 유력한 총무원장 후보로 거론돼 온 대표 주자였고, 밀운 스님은 2년간 부원장을 역임하며 녹원 총무원장 체제를 견인한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두 스님의 대결은 중앙종회와 전임 총무원 집행부 간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비쳐졌다.

무기명비밀투표 결과 의현 스님이 참석의원 67명 중 2명이 기권한 가운데 48표를 얻어 당선됐다. 밀운 스님은 17표를 얻는 데 그쳤다. 표면적으로는 화합된 분위기에서 총무원장 선출이 마무리됐지만, 선거에 따른 두 스님의 앙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후 두 스님은 극심하게 대립하며 1980년대 후반 종단분규의 원인이 됐다.

의현 스님

의현 스님은 당선과 함께 “반년 동안 종단을 운영하면서 제 자신이 총무원장으로서 수행능력이 있는지 시험해 보겠다”면서 “6개월 동안 한국불교의 방향을 잡는 데 모든 힘을 쏟아보겠지만, 6개월 후에도 방향타가 잡히지 않을 경우 명예롭게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임기에 연연하지 않고 종단발전에 매진하겠다는 뜻이겠지만, 적어도 6개월까지는 믿고 맡겨달라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의현 스님은 취임과 동시에 “불교의 자주화”를 기치로 내걸고 정부와 대척점에 섰다. 1986년 9월7일 해인사에서 승려대회를 개최해 “불교 자주성 회복과 불교관련 악법 철폐”를 요구했다. 이날 승려대회에는 조계종 총무원 집행부를 비롯해 전국에서 2000여명의 스님이 참석했다. 조계종이 불교 내부문제로 승려대회를 개최한 적은 많지만 정부의 불교시책을 두고 승려대회를 개최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승려대회에서는 △불교재산관리법·자연공원법 등 불교관계 악법 즉각 철폐 △사원의 관광유원지화 중지 △1980년 10·27법난에 대한 책임과 해명 △특정종교 편향의 교과서 왜곡중지 △TV 등 언론의 편파왜곡보도 시정 등 10개 결의안이 채택됐다. 이날 의현 스님은 “그때까지 언급조차 금기로 여겨온 10·27법난을 폭거로 규정”하고, “불교의 자주권을 되찾기 위해 호국불교의 개념을 특정정권이 아닌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바꾸겠다”고 밝혔다. (‘조계종사 근현대편’) 그동안 보수적이고 친정부 성향을 보였던 역대 총무원장과 다른 의현 스님의 강성 발언은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언론도 큰 관심을 보였다. ‘동아일보(1986년 9월9일자)’는 사설을 통해 “조계종이 승려대회에서 채택한 결의문은 종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매우 대담하고도 신랄한 현실비판의 내용을 담고 있다”며 “조계종이 범종단적 차원에서 이런 자주선언을 하고 나온 것은 해방 이후 처음 있는 것으로 실로 충격적인 일”이라고 평가했다.

해인사 승려대회는 종단 내부의 결속을 가져왔다. 조계종 전국교구본사주지 스님 등이 중심이 된 중진스님 30여명은 9월10일 해인사 승려대회 결의를 지지하고 불교관계법령 개폐 등에 대한 구체적인 추진 방안은 총무원에 위임하기로 결의했다. 대한불교청년회, 전국신도회에 이어 미국과 캐나다에 거주하는 스님들도 잇따라 성명을 내고 해인사 승려대회 결의를 지지했다. 이를 토대로 의현 스님은 우선 불교재산관리법 개정을 추진했다.

1963년 제정된 불교재산관리법은 일제강점기 불교재산과 행정을 총독부 산하에 귀속시켰던 ‘사찰령’에 뿌리를 뒀다. 비구·대처갈등 과정에서 사찰주지가 불교재산을 임의대로 처분하는 일이 빈번하자 이를 제한하기 위해 도입된 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임 사찰주지는 해당 시군에 등록을 해야 하고, 사찰의 증개축은 물론 개보수 때마다 까다로운 승인절차를 거쳐야 하는 등 독소조항이 많아 불교계의 자율권을 침해하는 악법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더구나 지금도 그렇지만 중첩 규제된 각종 법률이 전통사찰을 옥죄면서 사찰은 종교적 활동마저 제약받았다. 그렇기에 의현 스님은 “정부의 적절한 조치가 조만간 실현되지 않을 경우 젊은 승려들의 열화 같은 요구를 감당할 여지가 없다”(‘월간경향’ 1986년 11월호)고 정부 측에 불교재산관리법 폐기를 촉구했다.

이런 가운데 1987년 1월 경찰이 서울대생 박종철씨를 고문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박씨는 독실한 불자집안에서 자란 학생이기도 했다. ‘동아일보(1987년 1월19일자)’에 따르면 이 소식을 접한 의현 스님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천상천하유아독존’은 하나의 인권선언”이라며 “치안기관에서 고문으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 발생한 것은 유감”이라고 밝혔다. 박씨의 빈소에 총무원 간부를 보내 분향토록 하고 부산 가족들에게 조의금을 전달했으며 3월3일 서울 조계사에서 범종단차원의 49재를 봉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무렵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의현 스님의 ‘박종철 49재 봉행’ 발언은 야당과 재야단체 및 정토구현전국승가회를 비롯한 불교계 단체 등이 추진한 대정부 투쟁의 도화선이 됐다. 이 단체들은 박씨의 49재가 열리는 3월3일 ‘고문추방 및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의현 스님은 ‘박종철 49재’를 1주일여 앞둔 2월25일 기자회견을 열어 당초 조계사에서 열기로 했던 49재를 부산 사리암으로 변경했다. ‘동아일보(1987년 2월25일자)’에 따르면 의현 스님은 “2월24일 사리암에서 봉행된 박종철군의 6재에 직접 참여해 박군의 아버지에게 조의금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유족이 49재를 사리암에서 해달라고 요청해 이같이 결정했다”고 변경 이유를 설명했다. “가족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지만, 전두환 정권의 강한 압력이 작용했을 수 있었다.

정부는 “3월3일 조계종 차원의 사리암에서 진행하는 49재는 순수한 종교행사 차원에서 허용하겠지만, 그 외의 단체가 진행하는 행사는 불법집회로 간주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그러나 야당과 재야단체 등은 국민평화대행진을 진행하기로 했고, 청화·지선 스님 등이 중심이 된 불교단체들도 조계사에서 49재를 봉행하기로 했다. 결국 3월3일 전국에서 시민과 경찰이 충돌했으며, 서울 조계사 앞에서도 스님과 신도 등 500여명과 경찰 간의 대립이 이어졌다. 이 일을 계기로 정토구현전국승가회를 중심으로 한 불교단체들의 민주화 요구 열기도 차츰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무시하고 4·13호헌조치를 발동했다. 국민들의 반발은 커져갔다. 불교계도 진보적 성향의 스님과 단체들을 중심으로 호헌철폐와 불교재산관리법 개정을 요구하며 대정부 반대시위를 이어갔다. 불교계 단체들은 그해 5월18일 광주 원각사에서 ‘5·18민중항쟁 추모재’를 봉행했다. 그러나 이날 경찰은 원각사 법당에 최루탄을 발포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해인사, 법주사, 운문사 학인스님 등은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며 무기한 단식기도를 진행했고, 전국의 스님과 불자들도 정부 비판에 목소리를 높였다.

총무원장 의현 스님도 5월27일 광주 원각사 앞 금남로에서 열린 ‘원각사 법당 난입 최루탄 투척 규탄 대법회’에 참석해 정부에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동아일보(1987년 5월28일자)’에 따르면 의현 스님은 이날 법회에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불길처럼 타오르는 비폭력 단식투쟁은 최루탄이나 총칼로도 막을 수 없다”면서 “불교인은 유한한 정치보다 무한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순교자적 자세로 정법수호에 힘써 나가자”고 말했다. 의현 스님은 총무원장 취임 후 1년 가까이 정부와 긴장관계를 이어갔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529호 / 2020년 3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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