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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속리산 법주사와 범란 이영재 스님

“침체한 조선불교가 요구하는 인물은 오직 1인의 혁명”

초월 스님 법문 듣고 발심해 법주사 호암 스님 제자로 19세 출가
일본 유학시절 신문에 ‘조선불교혁신론’ 연재하며 불교개혁 발원
스리랑카서 28세 입적…개혁사상가 스님 안타까운 죽음으로 기록

청주 도청 근무 중 발심해 1918년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한 범란 이영재 스님은 아침 저녁으로 대웅전에 들어 관음주력을 하면서 셀 수 없을 만큼 절을 했다고 한다. 또 ‘천수경’ ‘예참문’을 꾸준히 독송하는 등 한시도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대의 일찍 가심은 그대의 앞날을 위하여 애통함을 금할 수 없거니와, 황폐한 우리 불교계를 위하여 더욱이 비탄을 억제할 수 없구나. 석원(釋苑)에 가을이 늦어 불일(佛日)이 스러지려 할 때 그대조차 입적하니, 등을 이을 자 그 누구며 빛을 돌이킬 자 그 누구냐.”(재일본 조선불교청년회)

법을 구하러 인도로 향하던 범란(梵鸞) 이영재 스님(1900~1927)이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돌연 입적했다. 조선 불교계는 비탄에 빠졌다. 조선불교청년회원들은 국내외에서 고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추모법회를 잇따라 개최했다. ‘불교’를 비롯한 불교잡지에는 스님을 추모하는 특집 글들이 게재됐다. 범란 스님은 조선불교를 향한 수많은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며 한국불교 혁신을 위해 노력했다. 따라서 당시 대표적인 ‘개혁사상가’로 불렸던 범란 스님의 갑작스런 입적에 청년 불자들은 장탄식을 연발했다.

범란 스님은 비운의 승려였다. 28년의 짧은 생애를 그야말로 불꽃처럼 살다갔다. 스님은 1900년 1월13일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함으로 청주 일대에서 신동 소문이 자자했다. 5세부터 한문을 공부했고 10세 이전에 소학과 고문진보, 사서 등을 독파했다. 청주공립보통학교 시절에는 재학 기간 내내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졸업 후 청주 유일한 고등교육기관인 청주농업학교에 진학해 학업을 이었다.

불교와는 농업학교 졸업 이후 인연이 닿았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으로 서울 유학의 꿈을 접어야 했던 범란 스님은 생계를 위해 청주 도청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업무 상 속리산 법주사를 자주 찾았고 그곳에서 남파 스님을 만나면서 불교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된다. 특히 법주사 말사인 청주 용화사에서 불법을 펼치던 초월 스님(1878~1944)과의 조우는 범란 스님이 출가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초월 스님은 3·1운동에 동참해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거봉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동경 유학 시절의 범란 스님.

범란 스님은 초월 스님의 법문을 듣고 발심해 1918년, 19세의 나이에 법주사에서 호암 스님의 제자로 출가했다. 스님은 입산과 동시에 대중들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신식교육을 받고 도청에 근무하던 ‘엘리트’의 출가였기 때문이다. 스님은 ‘능엄경’과 ‘반야경’ ‘원각경’ ‘기신론’ 등을 하나하나 섭렵하며 특출한 경지에 이르렀다. 공부뿐 아니라 수행에도 열심이었다. 스님은 계율을 엄격하게 지켰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관음주력(觀音呪力)을 하면서 셀 수 없을 만큼 절을 했고 ‘천수경’과 ‘예참문’ 등을 꾸준히 독송하며 부지런히 정진했다. 수행만 철저한 것이 아니었다. 스님은 식민지불교로 전락한 한국불교에 대한 고뇌와 성찰도 매우 깊었다. 일제강점기, 불교 교단은 다른 종교에 비해 포교사업과 교육제도 등 모든 면에 있어서 후진성을 면치 못했기에 더욱 그랬다.

한국불교 발전에 대한 서원을 간직한 스님에게 기회가 온 것은 입산 2년 후인 1920년이 돼서다. 출가 전부터 범란 스님을 눈여겨봤던 남파 스님의 주선으로 범란 스님은 구례 천은사 공비(公費) 유학생이 됐다. 동경 유학길에 오른 스님은 일본대학 종교과에 재학하면서 암흑의 조선 불교계에 한 줄기 빛이 되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재일조선불교청년회의 중심인물로 활약했고 재일불교청년회 기관지인 ‘금강저(金剛杵)’를 발간하며 불교개혁의 열정을 키웠다. 방학 중에는 귀국해 강연 활동에 나섰다. 범란 스님의 이 같은 행보는 당시 한국불교를 일깨우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유학 2년 후부터 스님은 ‘조선불교혁신론’을 주장하며 근대불교 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재일 유학생들과의 교류와 토론, 고민 속에서 탄생한 ‘조선불교혁신론’은 1922년 11~12월에 걸쳐 조선일보에 27회 연재됐다. 20대 초반의 젊은 승려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치밀하고 논리정연해 당시 한국뿐 아니라 일본 유학승들 사이에서도 그의 혁신론은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혁신론은 10개의 주제로 나누어져 있었다. 스님은 본말사제도의 폐해와 타파, 법국(法局)의 건설, 포교, 교육, 경전번역, 교재기관급 교보발행, 사회사업 등 각 분야에 대한 문제점을 일일이 검토하고 제시했다.

금강저 16호 표지. 범란 스님은 일본 유학시절인 1924년 5월 ‘금강저’를 창간하며 불교개혁의 열정을 키웠다.

범란 스님의 혁신론은 신도들에 대한 배려와 불교의 사회 참여 등이 강력하게 개진됐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스님은 불교의 사회적 연대세력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교화시설을 마련해야 함을 강조했다. 교화시설에는 아동과 노동자 교육, 문화 계발, 빈민구제와 치료, 환난민과 실업자 구제, 노동자 숙박 지원 등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교가 민중 속으로 들어가 지역문화 발전과 민초들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님이 이처럼 사회사업을 강조한 것은 곧 불교가 지역사회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사회 중심 세력이 될 수 없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별로히 교지를 선전치 아니하여도 민중이 자연 불교로 귀의할 것이요. 교세를 부식치 아니하여도 불교가 자연 사회의 중심세력이 돼 무위이화(無爲而化)로 불원의 사중이 흡흡(洽洽) 할 것이다.”

결국 불교가 그 사회의 중심세력이 되면 자연 불국토가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이는 지역사회, 불교, 민중, 포교당이 밀접한 관계가 된다는 구도와 이해 아래 나온 것이었다. 범란 스님은 이 밖에도 불교 혁신을 위한 다양한 방책과 의견을 제시했다. 90여년 전에 나온 스님의 이 같은 주장은 오늘날 불교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에서 감탄을 자아낸다.

1924년 종교대학을 졸업한 스님은 곧바로 동경제국대학 인도철학과에 입학해 범어와 팔리어를 배웠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5년, 스리랑카를 경유한 인도 성지순례의 길에 올랐다. 인도행은 일제강점기 조선 청년의 고민이 담긴 결정이었다. 스님은 인도가 종교와 철학에서 우리의 선진(先進)이 될 뿐 아니라 민족운동에도 배울 것이 많으리라고 믿었다. 

20여일 간의 항해 끝에 스리랑카에 도착한 스님은 성지를 순례하며 현지 불자들과도 교류했다. 스님은 이역만리에서도 한국불교를 단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잡지 ‘불교’에는 당시 스님이 스리랑카에서 보낸 편지 한 통이 실렸는데, 사찰에서 경전 소장과 수집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땅에 가기를 그토록 열망했던 스님은 인도를 목전에 두고 당도하지 못했다. 콜롬보에서 병마와 싸우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1927년, 세수 28세의 나이였다.

조선불교를 일으키기 위한 구법의 과정에서 안타깝게 삶을 마감한 것이다. 스님은 한국불교를 개혁하고자 일본에서 불교 공부를 하고, 일본 대학의 후미진 연구실과 자취방에서 불교개혁을 위해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멀고도 먼 스리랑카에서 스러져가는 몸을 추슬렀다.

일부에서는 범란 스님의 혁신론 상당수가 1929년 개최된 승려대회에서 제정된 종헌 종법 등에 구현됐다고 말한다. 이 승려대회를 주최한 핵심 주역이 불교청년들이었는데 그들은 일본 유학 중 범란 스님과 함께 한국불교 혁신을 처절하게 고민했던 당사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업적에도 범란 스님의 혁신론은 학계나 관련 사찰에서도 큰 관심이 없다. 스님의 생애와 지향, 고뇌, 불교혁신론 등에 대한 정리나 연구도 여전히 미미하다. “침체한 조선불교가 요구하는 인물은 수백의 학자도 아니고 수천의 예술가도 아니고 오직 1인의 혁명”이라고 외쳤던 스님의 피 끓는 절규만이 적막 속에서 울릴 뿐이다.

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530호 / 2020년 3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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