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25·26대 총무원장 의현 스님-하
33. 25·26대 총무원장 의현 스님-하
  • 권오영 기자
  • 승인 2020.03.27 18:55
  • 호수 15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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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불교교류·사찰재산 공개 등 성과…3선 논란으로 퇴진

첫 재임에 성공했지만 종정추대 문제 두고 분규 사태 겪어
상무대 의혹에 맞서 3선 추진했지만 개혁여론에 밀려 좌초
2015년 ‘멸빈 멍에’ 풀었지만 재심 파동으로 종단에서 배척
의현스님은 1990년 8월 중국에서 조박초 중국불교협회장과 만나 한중불교교류의 토대를 닦았다.
의현스님은 1990년 8월 중국에서 조박초 중국불교협회장과 만나 한중불교교류의 토대를 닦았다.

1990년 6월22일 의현 스님은 조계종 중앙종회 100차 임시회에서 제26대 총무원장으로 당선됐다. 1962년 통합종단조계종 출범 이후 의현 스님이 당선되기 전까지 총무원장 평균임기는 1년2개월에 불과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6개월이 멀다하고 총무원장이 바뀌는 혼란이 이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4년 임기에 이어 재임까지 이룬 것은 조계종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의현 스님은 이날 “불교방송 지방국 확대, 불교회관 건립 등 교세 확장과 중흥을 위한 사업추진을 약속”하며 새로운 임기 4년의 첫발을 내디뎠다. 의현 스님 재임 후 첫 성과는 중국불교협회와의 교류였다. ‘경향신문(1990년 9월1일자)’에 따르면 의현 스님은 그해 8월19~24일 중국불교협회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이 무렵 한국과 중국은 미수교 상태였다. 의현 스님은 조박초 중국불교협회장과 만나 신도 교류뿐 아니라 역사유적지탐사, 학술연구 등을 제안했고, 중국 측은 ‘한중불교우의촉진회’를 설립해 한국과 중국 간의 국가수교를 위해 양국불교계가 상호협력할 것을 제의했다. 이를 계기로 시작된 한중불교교류는 1992년 8월 한중수교로 이어졌다. 

순조로울 것 같았던 의현 총무원장 체제는 1991년 1월 종정 성철 스님의 임기만료를 앞두고 큰 혼란에 직면했다. 이 무렵 종정후보로는 성철 스님과 원로회의 의장 월산 스님이 거론됐다. 두 스님 모두 “종정을 두고 경쟁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며 고사했지만, 문중들에선 한 치 양보도 없었다. 성철 스님은 용성‧동산 스님으로 이어지는 범어문중이었고, 월산 스님은 경허‧만공‧보월‧금오 스님으로 이어진 덕숭문중 대표격이었다. 그렇기에 종정추대는 조계종의 양대 축을 형성해온 범어‧덕숭문중 간의 자존심 대결로 확대됐다. 

이런 상황에서 종정추대 방식을 두고 중앙종회와 원로회의까지 대립했다. 중앙종회는 1988년 3월 총무원장·중앙종회의장·호계원장과 종회의원 31명, 원로의원으로 구성된 종정추대위원회에서 종정을 추대하기로 종헌을 개정한 상태였다. 그러나 원로회의는 “종정추대는 원로회의 고유권한”이라며 반발했다. 종정추대를 종정추대위에서 하느냐, 원로회의에서 하느냐는 양 문중의 치밀한 셈법이 깔려 있었다. ‘한겨레신문(1990년 12월20일자)’에 따르면 이 무렵 원로회의에는 범어문중에 가까운 스님들이 많았고, 종정추대위원 31명을 선출하는 중앙종회에는 덕숭문중의 스님들이 더 많았다. 결국 종정추대 과정에서 표 대결로 갈 경우를 대비한 두 문중의 힘겨루기였던 셈이다. 이로 인해 1990년 11월부터 시작된 종정추대 논의는 해를 넘겨서도 해결국면을 찾지 못했다. 

종정추대 논란 해결은 총무원장 의현 스님의 의중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의현 스님으로서도 선뜻 어느 편을 들 수 없었다. 성철 스님은 의현 스님이 출가 이후 봉암사 결사 때부터 ‘평생 은사’로 모신 스님이었고, 총무원장 재임과정에서 덕숭문중 스님들로부터 도움을 받았기(동아일보, 1990년 12월22일자)에 월산 스님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1991년 1월7일 성철 스님 임기가 만료되고, 종정 공백상태가 장기화되면서 혼란이 이어졌다. 그해 5월 부처님오신날에는 종정스님의 법어가 발표되지 못하면서 종단 난맥상이 외부로 노출됐다. 

이런 가운데 6월3일 원로의장에 서암 스님이 추대되면서 종정추대 문제는 새 국면을 맞았다. 서암 스님은 6월16일 종정추대 수습대책위원회를 열어 “종정추대는 원로회의에서 해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20개 교구본사주지들도 6월17일 총무원에서 회의를 열어 ‘교구본사주지연합회’를 발족하고 원로회의에 힘을 실었다. 이에 반발해 중앙종회의원 및 불국사, 법주사, 용주사, 신흥사 등이 포함된 8개 본사주지 20여명은 6월17일 ‘불교중흥회’를 발족했다. 이들은 “종정추대는 종헌종법대로 해야 한다”고 결의했으며, 종단개혁을 위해 총무원장 퇴진을 요구했다. 이는 그동안 중립을 지키던 의현 스님이 원로회의 측으로 기울게 한 배경이 됐다. 

스리랑카 비구니계맥 복원을 위해 1996년 12월 비구니수계식을 진행했다.
스리랑카 비구니계맥 복원을 위해 1996년 12월 비구니수계식을 진행했다.

원로회의와 총무원은 그해 7월8일 해인사에서 승려대회를 열어 ‘원로회의에서의 종정추대’를 결의했으며 ‘종단 재건 개혁위원회’도 구성했다. 이어 중흥회 측 스님들이 이탈한 가운데 7월29~30일 열린 중앙종회에서 종정을 원로회의에서 추대하는 것으로 확정했다. 이에 따라 원로회의는 8월22일 성철 스님을 제7대 종정으로 추대했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중흥회 측은 9월16일 통도사에서 승려대회를 개최하고 ‘독자노선’을 선언했다. 10월7일 서울 논현동 우주빌딩에 새 총무원 간판도 내걸었다. 종정추대 문제로 시작된 갈등은 결국 ‘강남·북 총무원’으로 양분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조계종의 ‘한 지붕 두 총무원’체제는 1년 넘게 지속됐다. 두 총무원은 상대를 향해 불법단체로 규정했고, 비난을 쏟아냈다. 종무행정의 혼란은 갈수록 심화됐다. 심지어 1개 사찰에 양 총무원에서 동시에 주지를 발령하면서 2명의 주지가 대치하는 일도 벌어졌다. 1992년 1월 문광부 장관의 주선으로 중재안이 마련됐지만 양측의 감정 골은 좀처럼 메워지지 않았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양측의 갈등은 1992년 8월 10대 중앙종회의원 선거를 통해 사실상 무마됐다. ‘한겨레신문(1992년 8월16일자)’에 따르면 8월14일 강북총무원이 주도한 제10대 중앙종회의원 선거에 강남총무원에 참여했던 불국사, 용주사 등 교구본사와 의현 스님을 비판했던 반대파 스님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에 맞서 강남총무원도 중앙종회의원선거를 진행했지만 이미 주요스님들이 강북총무원으로 빠져나간 뒤였다. 결국 동력을 잃은 강남총무원은 이후 유야무야 흩어졌다. 

의현 스님은 종단 분규 과정에서도 출가한 스님들의 기본교육을 위해 1991년 3월 처음으로 행자교육원을 설치한 데 이어 이듬해에도 2기 행자교육원을 운영했다. 1991년 12월26일에는 공보처에 불교방송국 지방국 설립과 민영TV방송 설립을 위한 신청서를 제출하는 등 재임과정에서 약속한 공약을 이행해 나갔다.(법보신문, 1992년 1월13일자) 

그러나 의현 스님은 그해 12월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면서 다시 논란에 휘말렸다. 이 과정에서 ‘불교방송국 지방국 인가’ ‘중앙승가대 정규대학승격’ 등이 김 후보의 공약으로 채택됐다. 그렇더라도 87년에 이어 92년 대선까지 선거 때마다 종단 대표자가 특정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불교계의 정권예속화에 대한 우려를 키울 수 있었다. 의현 스님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커지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그해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면서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잇따른 개혁조치를 시행하면서 과거 군사정권과의 차별성을 드러냈다. 이는 사회민주화에 앞장섰던 진보성향 스님들이 종단 내부문제에 깊이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됐다. 1992년 출범한 실천불교전국승가회는 1993년 3월 중앙종회의원 직선, 겸직금지 등을 담은 종헌종법 개정안을 중앙종회에 청원하면서 종단개혁의 깃발을 들었다. 전국의 스님들을 대상으로 ‘종단 개혁’을 위한 서명운동에 착수했고, 진보성향의 출재가단체가 중심이 된 ‘전국불교운동연합’이 창립되면서 종단 안팎에서 개혁의 바람이 거세게 일었다. 

이런 가운데 의현 스님은 1993년 7월14일 “조계종의 재산을 공개하겠다”고 선언했다. 전국 사찰의 모든 부동산과 동산을 종단에 등록하고, 주요사찰의 예결산을 공개해 사찰재정이 투명하게 관리 집행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방침이었다. 사찰재산 공개는 종교계로서는 처음이었다. 그만큼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모았다. “조계종의 재산공개는 일반국민에게 신선한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한겨레신문 사설, 1993년 7월16일) “장막 속에 가려져 있던 음습한 종교경영을 지양하고 투명하고 정의롭고 구도적인 종교풍토를 세우겠다는 선언적 의미”(동아일보, 1993년 7월17일) 등 언론도 호평을 내놨다. 중앙종회는 1993년 7월 사찰재산등록을 의무화하는 종헌개정을 단행했다. 그해 11월 종정 성철 스님이 입적하고 서암 스님이 새 종정으로 선출됐다. 그리고 1994년이 밝았다. 

진보성향 단체가 중심이 된 종단개혁 요구는 1994년 들어 본격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상무대 비리의혹 사건’이 불거지면서 종단 혼란이 가중됐다. 이 사건은 당시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인 조기현 청우건설회장이 상무대 이전 공사를 하면서 공사대금을 유용해 이 중 80억원을 동화사 통일대불 불사비로 시주했는데, 이 돈이 불사에 쓰이지 않고 여당의 선거자금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의혹이었다. 훗날 이 사건은 의현 스님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의현 스님이 총무원장에서 물러나는 직접적인 배경이 됐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선우도량 등 8개 단체는 범승가종단개혁추진회(범종추)를 구성하고 의현 스님의 퇴진을 요구했다. 이에 맞서 의현 스님은 “불교케이블 TV 등 종단중흥불사를 마무리 짓고 물러나겠다”(10대 중앙종회회의록)며 3선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3월30일 총무원과 범종추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이때부터 언론은 종단개혁을 추진하는 범종추를 ‘민주’ ‘청렴’의 집단으로, 3선을 추진한 의현 스님 측을 ‘반민주’ ‘부패한 집단’ 등으로 규정짓기 시작했다. 언론의 이 같은 프레임은 의현 스님의 운신 폭을 좁게 만들었다. 결국 의현 스님은 4·10승려대회 이후 총무원 접수에 나선 범종추 등에 의해 4월13일 새벽 총무원장에서 물러났다. 승려대회 이후 출범한 개혁회의는 종단혼란의 책임을 물어 1994년 6월8일 의현 스님에 대해 종단 최고징계인 ‘멸빈’을 결정했다. 그러나 개혁회의가 내세운 징계사유는 대부분 확인되지 않은 의혹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개혁회의는 의현 스님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징계를 결정했다. 

총무원장에서 불명예 퇴진한 의현 스님은 이후 2년간 충북 옥천 산기슭 비닐움막에서 기거했다. 종단에서 빈척된 상태여서 어느 절에도 갈 수 없었고, 오랜 도반의 입적소식을 듣고 영결식장을 찾았다가 사미승들에게 끌려나오는 수모도 겪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의현 스님은 스리랑카 비구니계맥 복원과 인도불교 재건에 앞장섰다. 스리랑카 비구니계맥 복원은 의현 스님이 정화운동 때부터 시봉했던 자운 스님의 평생 원력이기도 했다. 의현 스님은 1996년 12월8일 인도 녹야원에서 서암 스님을 전계대화상으로 비구니 수계식을 진행했다. 이때 수계를 받은 10명의 스님들을 기점으로 현재 스리랑카 등지에는 5000명의 비구니스님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님은 또 인도불교 재건을 위해 2015년 인도 우따라 쁘라데쉬주 수바흐르티 종합대학에 불교대학을 설립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의현 스님이 종단의 전면에 다시 거론된 것은 2015년 6월18일이었다. 조계종 호계원은 이날 의현 스님과 관련한 재심을 진행하고 공권정지 3년으로 경감했다. 당시 호계원은 1994년 초심호계원의 심판결정이 징계당사자에게 전달되지 않아 징계가 확정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의현 스님이 1994년 개혁회의로부터 멸빈 징계를 받은 지 21년이 지난 뒤였다. 

그러나 종단 내부에서 큰 논란이 일었다. 많은 이들이 징계확정 이후 20여년이 지난 상황에서 호계원이 갑작스럽게 재심을 열어 징계경감을 결정한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심지어 불교계 일부단체와 언론들은 “의현 스님이 최모 여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뒀고, 총무원장 재임시절 자신의 여비서를 성폭행한 전력이 있다”며 의현 스님의 범계 의혹까지 제기했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이미 검찰조사와 법원 판결 등을 통해 허위주장이었음이 입증된 상태였다. 국립경찰병원은 1988년 6월 최모 여인에 대한 산부인과 진찰결과 “출산한 경력이 없다”는 진단서를 발급한 바 있었다.(국립경찰병원장, 1988년 6월1일 소견서-발행번호 4147) 서울지검도 1993년 9월14일 “의현 스님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총무원장 여비서 오모씨에 대해 무고혐의로 구속한 바 있었다.(한겨레신문, 1993년 9월15일자) 오모씨는 1심 재판에서 무고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 받은 데 이어 1994년 4월21일 서울지법 항소심 심판에서도 징역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동아일보, 1994년 4월22일자)

그럼에도 의현 스님에 대한 재심판결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이 일로 호계원장이 물러났으며, 총무원장 자승 스님은 “논란이 종식될 때까지 의현 스님의 승적을 복원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비록 ‘멸빈’이라는 멍에는 풀었지만, 의현 스님은 20년이 지나 다시 종단구성원으로부터 배척돼야 했다. 여전히 ‘반개혁적 인물’ ‘독재자’라는 역사적 오명도 털어내지 못했다. 이는 1994년 개혁회의와 언론이 만든 견고한 프레임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공과’에 대한 냉정한 평가 없이 맹목적으로 비난을 앞세우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531호 / 2020년 4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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