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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쇼무 천황의 발원과 교키 스님

기자명 고명석

“불사는 흙과 풀일망정 전 백성 참여로 완성되니”

일본의 45대 천황 쇼무, 화엄세계로 국가 안위 완성할 것 발원 
국가와 백성 안녕 발원 담아 동대사 노사나불·대불전 건립 추진  
쇼무, 민초들 보살폈던 교키 스님 권진행으로 발탁해 불사 완성

일본의 45대 천황 쇼무가 화엄세계를 구현해 국가와 백성들의 안녕을 실현할 것을 발원하면서 지은 동대사의 대불전.
일본의 45대 천황 쇼무가 화엄세계를 구현해 국가와 백성들의 안녕을 실현할 것을 발원하면서 지은 동대사의 대불전.

일본 불교문화의 고도, 나라(奈良)에는 화엄 동대사와 노사나대불이 자비롭게 세상을 품는다. 그 종교성을 발원하고 구현한 사람으로 쇼무 천황과 교키 스님이 얼굴을 나란히 한다.

쇼무(聖武, 701~756)는 일본의 제45대 천왕이다. 그는 불교를 신봉함으로써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웅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으며 말년에 천황의 자리를 물려주고 출가자로 살아갔다. 쇼무 천황은 24세 때 즉위한다. 당시 일본은 천황 중심의 국가체제가 정비되어가던 와중이어서 그의 자리는 불안했다. 국내적으로 내란이 일어났으며 외교적으로 잘 지내던 신라와 불편한 관계가 전개되었다. 백성들은 지진, 질병, 기아에 시달렸다. 천연두가 유행을 타고 급속하게 번져 더욱 고통스러웠다. 이 모든 것을 타개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해 그는 불법에 마음을 모은다. 마침내 그는 화엄 세계로 국가의 안위를 보전하고자 동대사(東大寺, 도다이지) 노사나 대불 조성의 대원을 발한다. 세계 최대 목조건물인 대불전 건립과 함께. 

“짐은 박덕함에도 공손히 천황의 자리를 승계하였노라. 짐은 온 백성들을 애민해 왔지만, 아직 부처님의 은덕은 천하에 두루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왔도다. 삼보의 힘에 의지하여 천하가 안락하길 바라며, 생명 있는 모든 존재가 잘 살기를 바라노라. 이에 743년 11월15일 보살의 대원을 발하여, 노사나 대불 금동상을 조성하기로 다짐하였노라. 나라의 구리를 모두 모아서 불상을 조성하고, 큰 산의 나무를 베어 불전을 세우리라. 이를 널리 법계에 알려 내 생각과 함께하는 사람들과 함께 다 같이 부처님의 은덕을 입고, 모두 함께 보리를 얻어 지게 하리다. 천하의 부귀와 권위를 가진 짐이니라. 그 부와 권세로 불상을 만들기 쉽지만 그것만으로는 내 뜻을 달성하긴 어렵도다. 내가 두려워하는 바는 사람들을 억지로 움직여 그들이 성스러운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방 중상하여 죄업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불사에 참여하려는 자는 마음과 뜻을 다해 매일 노사나 부처님에게 삼배를 올리며 스스로 노사나 대불을 조성하고 싶다는 마음을 내면 좋으리라. 설령 한 그루의 풀, 한 줌의 흙이라도 동참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허락하노라. 관료들은 이 일에 백성들을 억지로 참여하게 하지 말지니라. 나의 뜻을 널리 알리기 바라노라.”(‘속일본기’ 대불조성의 칙령)

이 거룩한 불사는 한 줌의 흙과 풀일망정 그것을 보태는 전 백성의 소중한 참여와 협력이 있을 때라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바람이다. 그 백성의 마음을 모으는 권진행(權眞行)의 적격자로서 교키(行基, 668~749) 스님이 발탁된다. 권진이란 사람들에게 보시와 선행을 권유하여 진리의 흐름에 함께 오르기를 바라는 발원의 몸짓이다. 

교키는 일본에서 행기 보살, 문수보살의 화신 등으로 불릴 정도로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그는 백제에서 귀화한 도래인(渡來人)으로 왕인(王仁)박사의 자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백제계 고시 사이치(高志才智)이고 어머니는 하치타 씨(蜂田氏)였다. 그는 15세의 나이로 출가하여 24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는 수계 후 같은 도래인이자 유식학의 대가인 도쇼(道昭)에게서 선수행과 고행을 배워 마음 밭을 일구고 자비 실천의 소중함을 깨우친다. 

교키가 오사카에 자리한 자신의 생가를 고쳐서 가원사(家原寺, 에바라지)를 건립한 것은 그의 나이 37세(704) 때였다. 이 시점부터 그의 본격적인 사회사업과 민중구제 포교활동이 시작된다. 그 당시 민중들의 삶은 척박했다. 지나친 조세와 부역을 피해 도망쳐서 유랑민이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교키는 이들  굶주리고 억압받으며 아파하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다. 그들을 위해 큰 냇가를 편히 건너갈 수 있도록 다리를 놓는다. 가뭄에 시달리는 농민을 위하여 물을 파고 저수지를 만들었으며, 관계수로를 활용하여 농토를 비옥하게 적신다. 막혀 있던 길을 내고 포구를 만들었으며, 온천을 발견하여 아픈 사람을 치유한다. 갈곳없는 행려병자들을 보듬어 따뜻한 잠자리와 먹을 것을 베풀어 주는 보시소(布施屋)를 만들어 그들의 아픔과 함께하며 불법으로 이끈다. 그 결과 그는 사찰 49소를 창건하고, 저수지 15개소, 관계수로 6개소, 포구 2개소, 도로 1개소, 다리 6개소, 보시소 9곳 등을 만들게 된다. 기록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은 더 많다. 그러한 구제활동 속에서 일본 최초의 전국지도인 행기도(行基圖)를 제작한다.

그렇다면 왜 교키 스님은 대사회적 중생 구제활동을 적극 나서게 되었을까. 그것은 문수보살 신앙의 영향 때문이었다. 문수보살은 남루한 거지나 빈궁한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들을 깨우친다. 그 헐벗고 아픈 사람들의 얼굴에서 바로 문수보살의 모습을 본다. 대사회적 자비의 길은 아상을 비워 비천한 자들을 품는 깨달음의 실천이며, 그것은 바로 문수보살의 행이다. 이 당시의 불교는 국가불교체제였다. 사적으로 승려가 되는 길을 막았으며 승려를 국가가 관리했다. 그러나 교키는 아랑곳하지 않고 민중 속으로 들어간 결과 그를 따르는 스님과 신도들이 1000명 단위로 움직였다. 이들을 교키 집단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의 숫자가 점점 커지자 국가에서 교키를 요승이라 부르며 탄압하고 그와 그의 제자들을 옥에 가둘 정도였다.  

동대사 대불 건립이 시작될 즈음 이러한 상황이 역전된다. 쇼무 천황으로서는 불사추진에 많은 백성들의 참여가 필요했고 그 당시로서는 민중의 지도자 교키와 그의 집단이 믿음직스럽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교키는 745년에 모든 나라의 승려를 통솔하는 대승정(大僧正)의 자리에 오른다.

교키와 그의 제자들은 동대사 대불 건립을 위해 민중 속으로 권진행각의 길로 나선다. 그는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권진하며 시주를 권해 5만1590명이 나무를, 37만2075명이 금전을 보시했다고 한다. 51만4102명이 기술 인력으로 참여했고 자원 봉사 인원도 166만5071명이었다.

그 결과 동대사 대불은 8번의 실패 끝에 752년 5월 30일 개안불사를 거행한다. 745년에 시작하여 7년 만에 이루어진 거룩하고 값진 결실이었다. 높이 16.2m, 무게 452톤의 세계 최대 금동좌불이 조성된 것이다. 동대사 노사나 대불은 그렇게 쇼무 천황의 발원과 교키 스님의 끝없는 권진행, 도래인들의 노고, 그리고 온 백성의 평화와 행복의 염원을 영원히 품고 있으리라.

고명석 불교사회연구소 연구원 kmss60@naver.com

 

[1531호 / 2020년 4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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