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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서울 대각사와 용성 스님

모진 고문 감수하며 독립운동…선농불교 주창해 전통불교 수호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 한평생 불교혁신운동 펼쳐
출옥 후 대각사 개창해 경전 번역 모임 만들고 역경불사 힘써
자급자족 노동으로 생긴 이익금을 독립운동자금에 보태기도

용성 스님이 개창한 대각사는 호국불교의 전통을 전파하는 포교당이자 수행도량이었다. 만해 한용운 스님 등 많은 불교계 민족운동가들이 조국과 민족의 장래에 대해 용성 스님과 논의하는 독립운동의 거점이기도 했다.

“기회가 주어지면 언제라도 다시 조선 독립운동을 하겠소.”

1919년 3월 경성지방법원.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하겠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용성 스님(1864~1940)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한평생 불교혁신운동을 펼쳤던 용성 스님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할 지도자가 필요한 순간 흔쾌히 앞장섰고 옥살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감옥에서 2년은 혹독했다. 가혹한 고문과 참기 힘든 수모를 당했다. 그럼에도 민족의 대표로, 존경받는 스님으로서 의연하기만 했다. 스님은 갇혔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스님이 주석했던 대각사에서는 스님의 건강과 무사출감을 염원하는 기도가 끊이지 않았다. 제자와 신도들은 수시로 서대문형무소를 찾았고 주위를 돌며 염불과 찬불가를 불렀다.

용성 스님은 감옥을 선방으로 삼았다. 오직 독립과 백성의 안위를 염원하며 경을 읽고 염불하고 기도했다. 우리나라의 오랜 전통인 호국불교의 맥은 일제강점기에도 그렇게 이어올 수 있었다.
용성 스님은 1864년 5월8일 전라북도 남원군 하번암면 죽림촌에서 태어났다. 5세 무렵부터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익힌 스님은 14세 때 아버지에게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지리산 덕밀암을 찾아갔다. 2년 후 해인사 극락암에서 화월 스님을 만나 정식 출가한 용성 스님은 청년시절부터 학승으로 이름을 떨쳤다. 

1911년, 스님은 불교개혁을 통한 민족중흥이라는 큰 뜻을 품고 상경했다. 그리고 서울 종로구 봉익동 1번지에 대각사(大覺寺)를 개창하면서 본격적으로 불교부흥 운동을 전개해 갔다. 스님이 주창한 불교부흥 운동은 “내가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자”는 것으로 불교 대중화를 지향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민족말살정책으로 심화돼 가고 있는 불교 왜색화를 막으려는 것이 그 첫째 목표였고 대중불교와 호국불교로서 한국 불교의 전통을 되살리자는 것이었다. 때문에 대각사는 호국불교의 전통을 전파하는 포교당이자 수행도량이었다. 또 만해  스님 등 많은 불교계 민족운동가들이 조국과 민족의 장래에 대해 논의하는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용성 스님은 3·1운동 직후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가 옥고를 치렀다. 수형카드 속 용성 스님의 모습은 수척하지만 의연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용성 스님의 독립운동과 도심포교를 비롯한 불교개혁은 모두가 선구적인 역할이었던 것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두드러졌다. 이 중 한문 경전을 한글로 옮기는 불사에 원력을 세워 경전 한글화의 주춧돌을 놓은 것도 시대를 앞서간 놀라운 혜안이었다.

용성 스님이 경전 번역에 뜻을 둔것은 3‧1운동 직후 투옥돼 1921년 5월에 풀려날 때까지 겪은 옥중 생활에서였다. 스님은 그곳에서 만난 목사들이 한글로 된 성경을 꺼내 들고 읽는 장면을 목격했다. 스님은 눈이 번쩍 뜨였다. 경전을 한글로 번역해 대중에게 알려야 겠다는 결심이 섰다.

스님이 출옥했을 때는 58세, 당시로는 노년에 들어선 나이였지만 원력과 의지가 탄탄하니 거칠 것이 없었다. 투옥 중 일제의 회유에 넘어간 제자들이 팔아버린 옛 대각사 옆에 공간을 마련했다. 새로 대각사를 짓고 경전 번역 모임인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설립했다. 불경을 한글로 옮기는 역경불사에 뛰어든 것이다.

스님은 불경 한글화가 곧 불교대중화라고 확신했다. 훗날 ‘역경에 골몰한 탓에 극도로 쇠약해졌네’라고 회고했을 정도로 경전 한글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스님은 불교의식과 염불도 한글로 진행했다. 포교 현대화를 위해 일요학교를 세웠고, 찬불가를 만들어 부르도록 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청소년 불교운동을 벌였던 스님은 가사를 펄럭이며 수십 명의 청소년들 앞에서 몸을 흔들며 오르간을 연주하기도 했다. 신도를 상대로 경전을 강의했으며 회향 때는 찬불가와 같은 즐거운 여흥을 곁들였다. 신도들의 흥미를 유발해 불교를 가르치는 효과적인 방법을 찾은 것이다. 스님은 스스로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생활 선을 주창했다. 선이 산중 선방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속으로 녹아들어야 한다는 뜻에서였다.

스님은 승려의 결혼과 육식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승가의 전통을 지키려 노력했다. 양복을 입고 속세에 뛰어든 적도 있었지만 계율은 철저히 지켰다. 1927년에는 대각교(大覺敎)를 선언하고 기성 종단과 거리를 두며 독자 노선을 추구했다. 선농(禪農) 불교운동을 펼친 것도 이때부터다. 사찰 재산으로 불사를 하고 포교하는 일, 신도의 보시를 받아 생활비 충당하는 것을 지양했다. 농사를 지으며 재정을 스스로 마련하며 부처님 뜻을 받드는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1927년 스님은 제자들과 함께 함양 백운산에 화과원(華果院)을 설립하고 황무지를 개간해 밤나무 등 과수를 심었다. 게으른 수좌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스님은 작은 법당에 작은 원[圓相] 하나만 그려놓고 화과원 생활을 이어갔다. 노동으로 생긴 이익은 주로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였다.

스님은 만주 용정에 대각교당을 세워 독립 운동가들의 활동을 적극 도왔다. 상좌들 사이에서 ‘구두쇠’로 유명했던 스님이었지만 한 푼 두 푼 아껴서 모은 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냈다. 비밀요원이 오면 몰래 돈을 쥐어줬다.

용성 스님은 3‧1운동으로 탄생한 상해임시정부를 각별히 챙겼다. 사람을 보내 정보를 교환했고 독립운동 자금도 전달했다. 해방 후 얼마 되지 않아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해 황학수, 이시영, 김창숙 등 임시정부 요원 30여명이 대각사에 들러 용성 스님의 영정 앞에서 향을 사르고 고개를 숙였다. 이들의 대각사 방문은 당시에 화제를 모았다.

용성 스님은 마지막까지 꼿꼿했다. 1940년 4월1일 초저녁. 스님은 대각사 조실방에 제자들을 불러 모아 “내일 떠나려 한다”고 말했다.

흐느끼는 제자들에게 “울지 마라. 멸도할 것이니 곡하지 마라. 상복도 입지 마라. 다만 ‘무상대열반 원명상적조’만 암송해 달라”고 당부했다. 다음날이 용성 스님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앉아 나지막하게 게송을 읊었다.

‘모든 행이 떳떳함이 없고/ 만법이 다 고요하도다./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가니/ 삼밭 위에 한가로이 누웠도다.’

용성 스님은 앉은 채로 열반에 들었다. 세수 77세, 산문에 든지 61년 만이었다. 소식을 들은 문도들이 각지에서 상경했지만 그보다 먼저 왜경들이 달려와 일주문을 지키고 출입을 통제했다.

용성 스님은 입적을 앞두고 제자에게 열 가지 유훈을 남겼다. 가야·고구려·백제·신라불교의 초전법륜지를 잘 가꿀 것. 금오산, 신라의 진산인 낭산(狼山)과 고위산 천룡사 폐허성지를 잘 가꿀 것.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 성도지 부다가야 보리수원, 최초 설법지 녹야원, 사위국 기원정사, 입멸지 사라수원의 5대 성지를 잘 가꿀 것. 불교경전과 어록을 100만권 이상 유포하고 삼귀의 수계법회를 통해 수계제자가 100만명이 넘도록 할 것 등이다. 제자들은 뜻을 모아 스승의 대각사상을 이었고 1969년 서울 종로 봉익동에 재단법인 대각회를 설립했다.

쇠락한 조선과 일제강점기라는 절체절명의 세월은 용성 스님을 더욱 강하고 빛나게 했다. 모진 역사 가운데서 스님은 마지막 호흡을 내려놓는 순간까지 선사, 율사, 강백, 역경사, 전법사, 개혁가로 살았던 다면(多面)의 선지식이었다. 

용성 스님은 불교의 목적이 개인의 안심입명에 있다고 보지 않았다.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어떻게 전달할지 고뇌를 거듭했다. 자신 속에 깃든 대원각성을 깨쳐 생사고해를 해탈하고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불교 지향점이고 수행자 의무라고 여겼다. 

용성 스님은 일제강점기 가장 힘들고 엄혹한 시기, 불교의 대중화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선지식이었다. 용성 스님은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열반에 들었다. 그러나 역사는 영원히 스님의 위대한 삶을 기억할 것이다.

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532호 / 2020년 4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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