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27대 총무원장 탄성 스님
34. 27대 총무원장 탄성 스님
  • 권오영 기자
  • 승인 2020.04.10 19:49
  • 호수 15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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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90년대 혼란 수습하고 안정 이끈 ‘조계종 길잡이’

‘초발심자경문’ 구절 듣고 발심…갑사서 금오 스님 은사로 수계
1980년 10·27법난 직후 정화중흥회 상임위원장 맡아 혼란 수습
1994년 개혁회의 총무원장 역임…개혁 이후 수행자로 돌아가
조계종 10대 중앙종회는 1994년 4월15일 모든 권한을 개혁회의에 이양하고 해산했다. 종권을 이양 받은 개혁회의 상임위원장 탄성 스님(사진 가운데)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종단개혁기념사업추진위(2014년)

현대조계종사는 파란의 연속이었다. 때론 거센 풍랑을 만나 방향을 잃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조계종사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혼란의 시기 때마다 종단 길잡이가 됐던 스님들의 역할이 컸다. 1960~70년대 영암 스님이, 1980~90년대 탄성 스님이 대표적이다. 

영암 스님은 1967년 청담·경산 스님이라는 두 실력자의 동반퇴진, 1975년 종정중심제 논란으로 갈등이 심화될 때마다 총무원장을 맡아 갈등을 봉합하고 종단 안정의 초석을 세운 인물이다. 탄성 스님도 그 계보를 이었다. 스님은 1980년 신군부에 의한 10·27법난 때 정화중흥회의 상임위원장을 맡아 종단 혼란을 수습했고, 1994년 개혁회의 상임위원장 겸 총무원장으로 개혁회의를 이끌며 새 집행부 출범의 토대를 닦았다. 종단이 안정되면 어김없이 수행자 본연의 길로 돌아갔다. 스님이 “수행자의 사표” “종단개혁과 안정의 상징”(법보신문, 2000년 6월14일자)으로 평가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탄성 스님은 1930년 10월 충북 보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심 깊었던 어머니 손에 이끌려 절을 찾는 일이 많았고, 이는 출가인연으로 이어졌다. 1944년 계룡산 신원사에서 한 스님이 들려준 ‘초발심자경문’의 “사흘 닦는 마음은 천년을 두고 보배요, 백 년 동안 물건을 탐낸다 해도 하루아침에 티끌이다”라는 구절에 발심했다. ‘절에서 스님들과 공부하고 싶다’는 원력을 세운 것도 이 무렵이다.

스님은 그해 10월 계룡산 갑사 사자암으로 출가해 행자생활을 시작했고, 이듬해 3월 갑사에서 금오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불교는 알음알이로 아는 것이 아니라 참선 수행을 통해 자신의 것으로 체득해야 한다”는 스승의 엄한 가르침은 탄성 스님이 평생 수좌로서의 길을 올곧이 걷게 한 토대가 됐다. 이후 10여년간 스승을 따라 용맹정진을 했고, 1961년 수덕사에서 하안거를 시작으로 송광사, 도성암, 봉암사 태고선원 등에서 17안거를 성만했다. 수행과정에서도 1970년 청계사, 1972년 법주사 주지를 맡아 사찰을 일신했다. 1974~80년 4·5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탄성 스님이 종단의 전면에 나선 것은 1980년 11월이었다. 신군부는 그해 10월27일 사찰 정화라는 명목으로 전국 사찰에 난입해 스님들을 연행했고, 총무원장 월주 스님도 강제 퇴임시켰다. 이 일로 조계종은 집행부 공백사태를 맞았다. 원로들은 11월5일 사태수습을 위해 과도집행부인 정화중흥회의를 출범시켰고, 탄성 스님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스님은 2개월여 간 정화중흥회의를 이끌며 종단수습책을 마련했다.

종헌개정을 통해 총무원장에게 종단의 대표권과 종무행정 최고책임자로서의 지위를 부여했다. 중앙종회의원의 겸직금지를 강화했으며 총무원에서 분리된 호계위원회를 신설해 종단의 권력이 행정, 입법, 사법부로 분산되도록 했다. 원로회의의 법적권한도 강화해 중앙종회와 양원제 형태로 운영될 수 있도록 했다. 모든 종무행정은 종무회의를 거쳐 진행하도록 했으며, 본사주지 임명도 인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치게 했다.

정화중흥회의는 이 같은 개혁안을 토대로 새 집행부 인선에 착수했고, 1981년 1월10일 성수 스님을 새 총무원장으로 선출했다. 집행부 구성을 마무리한 탄성 스님은 그길로 서울 조계사를 나와 자신이 중창한 괴산 공림사로 돌아갔다. 

공림사는 통일신라 때 창건된 대사찰이었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며 전각 대부분이 전소돼 폐사지나 다름없었다. 스님은 이때부터 10여년간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진행해 옛 가람의 면모를 되찾았다. 선원도 재건해 ‘참선수행을 통해 불교를 일으켜야 한다’는 스승의 유지를 받들었다. 

탄성 스님

스님이 다시 종단의 부름을 받은 것은 1994년 4월이었다. 이 무렵 조계종은 의현 스님의 총무원장 3선 연임 논란으로 큰 홍역을 앓았다. ‘종단 개혁’을 선언한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 등은 4월10일 전국승려대회를 열어 총무원 집행부를 압박했다. 결국 4월13일 새벽, 의현 스님은 총무원장 사퇴를 선언했다. 8년간 이어졌던 의현 총무원장 체제도 종지부를 찍었다.

전국승려대회를 통해 출범한 개혁회의는 이날 의현 스님이 떠난 총무원 청사 입구에 ‘개혁회의’ 현판을 내걸었다. 중앙종회는 4월15일 113차 종회를 열어 개혁회의에 전권을 위임하고 해산을 결의했다. 이로써 개혁회의는 입법·행정·사법의 권한을 갖는 과도기 집행부로서 공식 출범했다. 탄성 스님은 개혁회의 상임위원장 겸 총무원장으로 추대됐다. ‘경향신문(1994년 4월16일자)’에 따르면 탄성 스님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개혁 작업을 가속화해 조속히 종단정상화를 위해 힘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스님은 “개혁의 방향은 제도보다 사람을 고치는 데 초점을 맞추겠다”고 공언했다. “스님들이 수행 정진하는 승가본연의 자세를 찾도록 하는 것이 개혁의 근본”이라고 여겼다. 

개혁회의는 △정법종단 구현 △불교자주화 실현 △종단운영의 민주화 △청정교단 구현 △불교의 사회역할 확대를 5대 활동지표로 내세웠고, 10대 실천과제도 제시했다. 

개혁회의는 우선 불교자주화 실현에 초점을 맞췄다. 3월29일 범종추 구종법회와 4월10일 승려대회 당시 서울 조계사 경내에 공권력을 투입한 사건을 ‘법난’으로 규정하고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대통령 사과와 최형우 내무부장관 사퇴”를 요구했다. 개혁회의는 한 발 더 나아가 법난대책위를 구성해 전국사찰에 “내무장관 해임하라”는 현수막을 내걸도록 했으며, 4월29일에는 최형우 장관 등을 상대로 시민고발운동을 진행했다. ‘한겨레신문(1994년 4월30일자)’에 따르면 이날 시민고발운동에는 스님과 불자 1200여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최 장관 등에 대한 고발장을 개별 접수하면서 서울 서초동 서울지검 앞에는 긴 ‘인간띠’가 형성됐다. 이들이 고발장을 모두 접수하는 데만 7시간이 소요됐다. 

이런 가운데 탄성 스님은 6월5일 광주 망월동 5·18묘역을 공식 참배했다. 종단 대표가 5·18묘역을 공식 참배한 것은 처음이었다. 스님은 “불교의 진정한 자주성은 불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땅에 정의와 평화, 민주화가 이뤄질 때만 가능한 일”이라며 “망월동은 바로 이를 이룩하려는 원력과 서원을 갖고 희생한 진정한 보살들이 묻힌 성스런 자리”라고 평가했다.(한겨레신문, 1994년 6월5일자) 민주항쟁 성지를 참배함으로써 불교자주화에 대한 의지를 정부 측에 보여주겠다는 의도였을 수 있었다. 

조계종의 날선 대응은 1995년 지자체 단체장 선거를 앞둔 정부여당엔 상당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민자당은 불자국회의원들을 내세워 개혁회의 측과 대화를 시도하며 불교계에 대한 ‘구애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조계종의 강경 대응방침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결국 6월16일 최형우 장관이 총무원을 찾아 탄성 스님에게 머리를 숙였고, 다음날 김종필  민자당 대표가 민자당 불교신도회 창립 4주년 기념법회에 참석해 유감을 표명했다. 김영삼 대통령도 7월11일 종정 월하 스님과 총무원장 탄성 스님을 청와대로 초청해 “조계사 분규 때 경찰의 폭력진압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한겨레신문, 1994년 7월12일자) 이 일을 두고 개혁회의 내부에서 거센 반발이 일기도 했지만, 그동안 정권에 예속됐다는 비판을 받았던 조계종이 대정부 관계를 일신하는 계기가 됐다. 

이러는 사이 개혁회의는 종단변화를 위한 개혁안들을 하나하나 마련해 나갔다. ‘종단개혁불사백서(개혁회의, 1994년 11월 발간)’에 따르면 개혁회의는 개혁안 성안을 위해 8차에 걸쳐 세미나를 진행했다. ‘불교관계 법령’ ‘종단 운영’ ‘포교활성화’ ‘승가교육’ 등을 주제로 관련전문가 등을 초청한 가운데 종단 변화 방안을 모색했다. 이를 토대로 다시 공청회를 열어 구체적인 개혁안을 수립했다. 8월11일 6차 개혁회의에서 종단개혁의 토대가 되는 종헌개정안을 마침내 확정했다.

종헌개정안은 총무원장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스님들의 참정권을 강화하는 등 민주주의의 기본원칙들이 대거 반영됐다. 종단의 입법(중앙종회)․행정(총무원)․사법(호계원)의 역할과 권한을 명확히 구분해 삼권분립 체제를 갖췄고, 교육원과 포교원을 별원으로 설치해 총무원과 같은 위상을 부여했다. 총무원장, 교구본사주지, 중앙종회의원 등 주요직책의 겸직금지조항도 마련해 권력이 특정인에게 편중되는 것을 막았다.

중앙종회의원과 교구본사주지는 해당 교구에서 직선제 방식으로 선출하도록 했다. 총무원장은 중앙종회에서 선출하던 방식을 바꿔 중앙종회의원과 24개 교구종회에서 10명씩 선출한 선거인단에 의해 뽑는 간선제를 채택했다. 다만 개혁회의는 종헌부칙 132조에 “차기 총무원장 선거에 한해 승랍 5년 이상의 스님이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하도록 명시했다. ‘총무원장 직선제’를 강하게 주장해 온 세력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한 한시적 직선제였던 셈이다. 개혁회의는 이 같은 종헌개정안을 토대로 늦어도 9월말까지 새 집행부 구성을 마무리한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나 개혁회의에서 통과된 종헌개정안은 원로회의의 인준과정에서 반발에 부딪혔다. ‘한겨레신문(1994년 8월25일자)’에 따르면 원로회의는 8월24일 회의를 열어 개혁회의가 성안한 종헌개정안 일부 조항에 대해 인준을 유예했다. 원로회의는 종헌부칙에 명시된 ‘총무원장 직선제’ 도입을 비롯해 8개 사항에 대해 수정을 요구했다. “종교지도자를 세속적 방식으로 선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과 “종정추대권을 원로회의만 가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원로회의의 인준보류로 종헌개정안은 표류했다. “원점에서 재논의 해야 한다” “원로회의의 지적을 수용해 일부만 수정하자”는 안이 팽팽히 맞섰다. 결국 개혁회의는 9월27일 9차 회의를 열어 ‘총무원장 직선제’ 폐지와 원로회의가 요구한 일부 안을 수용하는 선에서 종헌개정안을 가결했다. 원로회의도 개혁회의의 의견을 수용해 9월29일 종헌개정안을 인준했다. 개혁회의는 10월10일 10차 회의를 열어 중앙종회법 개정안, 특별분담금사찰지정법 개정안, 직영사찰법 제정안 등과 각종 선거법 제개정안을 성안했다. 

개혁회의가 마련한 종헌 및 30여개에 이르는 종법 제개정안은 절차적 민주주의와 합리적 종단운영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세간의 원리인 ‘민주’라는 개념을 승가에 도입하면서 산중공의 전통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더구나 개혁회의가 도입한 각종 선거제도는 그 취지와 다르게 변질되면서 오늘날 승가의 위계질서와 화합을 저해하는 요소로 지적되고 있다. 

11월21일 새 총무원장으로 월주 스님이 당선되면서 개혁회의는 사실상 공식 활동을 마무리했다. 탄성 스님도 11월24일 개혁회의 해산식을 끝으로 7개월여 간의 과도집행부 총무원장에서 물러났다. 이번에도 새 집행부 출범과 동시에 모든 소임을 내려놓고 괴산 공림사로 돌아가 수행자의 삶을 살았다. “승려의 목표는 생사를 뛰어넘는 해탈이 돼야 하고, 모든 욕망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한겨레신문, 1997년 5월9일자)는 신념 때문일 수 있었다. 

탄성 스님은 1997년 3월 조계종 원로의원에 추대됐고, 1998년 종단사태 때도 전국승려대회장을 맡아 혼란한 종단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999년 4월 원로의장에 추대됐으며, 2000년 6월8일 주석처인 공림사에서 입적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533호 / 2020년 4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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