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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티베트 사원 라브랑시의 신년의례

한국불교 작법무의 원형을 찾아 티베트 고원을 넘다

2008년 작법무 ‘참’ 조사로 현지 찾았으나 돌연 中 정부서 불허
‘작은 티베트’로 불리는 라브랑의 겔룩파 사원서 신년의례 참관
15일간 진행되는 의식엔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불교사상 배열

라브랑시 마당에서 신년법회를 열고 있는 스님들. 높은 단 위의 가운데에 총법태 라마가 있다.
라브랑시 마당에서 신년법회를 열고 있는 스님들. 높은 단 위의 가운데에 총법태 라마가 있다.

대만, 중국, 일본을 다니며 범패와 응문불사, 창작·예술음악까지 다양한 불교음악의 양상을 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한국처럼 의례 중 작법무를 추는 경우는 없었다. 혹자는 중국에도 불교무용이 많다고 하겠지만 불교음악과 범패가 다르듯 의례무와 일반 불교춤은 구별된다. 중국 불교역사를 조사해보니 양무제가 “궁중무를 불교무용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었지만, 그것은 불교무용이지 작법무는 아니었다. 인도부터 한국에 이르는 여러 루트를 조사해 본 결과 티베트에 의식무(儀式舞)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라싸대학의 한 지인을 통해 알아보니 “요즈음은 ‘참’ 의식이 중단되어 그것을 볼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자료만이라도 구해오고자 2007년 여름 티베트 일대를 둘러보았다. “언제라도 ‘참’이 행해지면 알려 달라” 부탁해놓고 귀국을 하였다. 바로 그해 겨울, ‘올해는 참 설행을 허가해주겠다는 발표가 있었다’는 연락이 왔다.

‘참’이 열린다는 소식을 현지에서 전해준 친구도 신이 났다. 티베트 최초 사원인 삼예를 비롯하여 묀주린사원, 닝마파의 체쥬참, 샤카파의 도데참에 대한 일정까지 정리해 메일을 보내왔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 탐사팀을 꾸려 출발하였다. 미리 도착하여 먼저 라싸와 체탕 융부라캉 등 주요 유적을 둘러보며 고산증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급한 연락이 왔다. “참을 불허한다”는 통보가 왔다는 것이다.
 

법회에 모여든 사람들.

이럴 거면 좀 미리 알려줬어야지. 나중에 알고 보니 미리 통지하면 그에 대한 반발 움직임이 있을 수 있어 날짜가 임박해 발표가 된 것이었다. 부랴부랴 일정을 변경하여 샤허현으로 촬영지를 옮기게 되었으니, 그때가 양력으로 2월7일 티베트력으로는 정월이 막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라싸에서 칭장열차를 타고 촬영장비 등 급하게 꾸린 짐꾸러미를 바라보니 전쟁터에서 피난을 떠나는 심정이 이럴까 싶었다. 불안하고 황망한 나그네의 심정과는 달리 창밖은 어찌 그리 무심하고 평온한지 참으로 야속하였다.

한참을 멍하니 차창을 보고 있는데, 저만치 들판에 오체투지를 하며 라싸를 향해 오고 있는 순례객이 있었다. 한 달 아니 몇 달을 자갈길, 흙탕길 위에 삼보일배하며 정월의례에 참례하기 위해 오고 있는 중이었다. 근 몇 년간 중국과의 충돌이 잠잠해지며 다소 평안했던지라 올해는 ‘참’ 의례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차창 너머로 심심찮게 오체투지 순례자들이 보였다. 춥고 매서운 겨울 들판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사이 머리는 산발이요, 옷은 덤불인지 흙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그나저나 저들도 조만간 “의례가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될 터인데. 그들의 심정을 생각하니 우리들의 어긋난 스케줄과는 다른 참혹한 심정에 만감이 교차하였다.

지난 여름에는 조캉사원 인근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렀다. 그때 아침마다 한 손에는 염주, 한 손에는 마니차를 돌리며 꼬라(도량 순행)를 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른 아침 차를 타고 교외로 나가며 동서남북에서 조캉사원을 향해 염주와 마니차를 돌리며 걸어오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마치 지하철역에서 메트로폴리탄을 향해 빽빽이 모여오는 샐러리맨들이 떠올랐다. 이런 날들이 하루의 예외도, 지역적 차이도 없었으니 ‘대체 종교의 힘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의 순례가 이 정도이니 설날에 행해지는 대대적인 ‘참’ 의식에서 민중봉기가 발생하는 사태에 대해 중국 공안이 느끼는 공포감을 짐작할 만도 하였다. 
 

설날을 맞은 라브랑의 여인들.

하룻밤을 칭창열차에서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칭하이역에 내렸다. 북경세미나에서 룸메이트였던 칭하이 방송국의 만당리에(满当烈) PD와 촬영팀, 그리고 북경에서 만났던 칭하이사범대학의 두어런 교수와 제자들이 피난민을 맞이하듯 우리 일행을 맞았다. 따뜻한 차와 음식을 나누며 앞으로 보게 될 샤허의 라브랑시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그간 얼어붙었던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다. 식사를 마치고 눈 덮인 들판, 무슬림의 마을 등 곳곳을 지나며 온종일 걸려 샤허마을 어귀에 도착했을 때는 어둑어둑 해가 저물고 있었다.

컴컴해진 들판과 달리 시내로 접어들자 곳곳에 켜진 불빛 사이로 오가는 사람들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인들은 머리에 족두리를 두른 듯 뒤로 넘긴 띠에 어마어마한 장식을 달고있었다. 사찰에 보시를 얼마나 하는가, 아내의 장식이 얼마나 크고 화려한가로 티베트 남자들의 능력을 가늠한다고 하니 그 장식들은 예사의 것이 아니었다. 남자들은 비단으로 장식한 두꺼운 가죽 코트를 입었는데 허리에는 장검(裝劍)까지 차고 한껏 멋을 냈는지라 거리가 온통 거대한 패션쇼장 같았다. 이것이 바로 티베트 사람들의 정월 풍경일 텐데 이들의 도성 라싸에는 외국 관광객들의 평범한 일상으로 방치되어 있었으니 떠나온 나그네의 가슴도 미어졌다.

티베트 영토는 아시아 대륙 서북부 전역에 걸쳐 있었으므로 현재의 중국 지도에 표시된 티베트자치구는 한정된 행정구역일 뿐이다. 해발 3000~4000m의 고원, 광활한 초원과 비옥한 토지로 이루어진 라브랑은 티베트 자치구에서 벗어난 지리적 여건으로 회족, 한족, 티베트족이 혼재되어 있어 중국 공안의 위압이 다소 덜하다. 덧붙여 티베트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이어오는 인구가 지배적이어서 ‘작은 티베트’로 불리고 있다. 
 

머리와 허리에 어마어마한 장식을 한 여인.

초대 활불 라마인 아왕쇈쥐에 의해 1710년에 창건된 라브랑시는 티베트어 “라장”을 음역한 이름으로 ‘부처의 궁’이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본래 이름은 “라장자시키”였으나 간략하게 줄여서 ‘라브랑시(拉卜楞寺)’로 불렸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라브랑시 사원이 관할하는 지역 이름이 되었다. 라브랑시는 겔룩파의 6대 사원 중의 하나로, 티베트 본토를 제외한 지역의 사원 중 가장 큰 규모의 총림이다. 6개의 승원으로 구성된 총림에서는 의학, 음악, 경전 등 제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창건 당시에는 4000여명의 스님이 수학하였으나 2008년 2월 당시에는 1500여명의 스님이 거주하고 있었다.

2008년 라브랑시의 신년의례는 티베트력 정월 초삼일부터 시작하여 정월 17일까지 보름간 행해졌다. 초삼일부터 닷새 동안은 불공을 드리는데, 불공 중의 송경은 경전의 단락마다 북과 작은 자바라인 ‘솜샬’과 ‘실냠’을 치고, 의식용 나팔인 ‘걀링’을 불었다. 닷새 동안의 기도를 마치면 다음 날 방생을 하고, 그 다음 날은 거대한 탕카 의식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의례 순서에는 참회와 자비를 실천한 이후라야 부처를 만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열흘간의 기도를 마친 다음 날 수십명의 스님이 탕카를 메고 산언덕으로 올라가 펼치면 라브랑시의 총법태(法台) 라마의 주재로 염송과 축원을 하는 의식이 이루어졌다. 이때 전 세계에서 모여든 수천명의 관중들로 온 마을이 들썩였다. 탕카로써 부처를 만난 다음 날 불법을 수호하기 위한 참무를 온종일 추고, 보름날에는 수요우화공등회(酥油花展供燈會)가 열렸다. ‘수요우화’는 ‘야크 버터로 불보살을 조각한 화환’을 의미하는 티베트어를 한자로 음사한 것이다. 이 행사는 한국에 연등회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보니 대경당을 비롯해 여섯 승원의 주불(主佛)을 야크 버터로 조각하여 걸고 등불을 밝히며 찬탄과 기도를 바치는 의식이었다.

각 승원의 주불은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미륵불, 약사불, 호법신 그리고 티베트에 불교를 전한 파드마삼바바와 겔룩파의 개조(開祖)인 쫑카파로 구성되었다. 낮에는 이 공등회를 위한 송경의식과 법회를 열고, 법당에서는 망자의 이름이 적힌 하얀 지첩을 읽어 내려가며 천도의식을 행하기도 하였다. 저녁이 되어 보름달이 뜨고 화려하게 장식된 화환에 등불이 켜지면 모여드는 군중의 모습이 마치 불빛을 향해 몰려드는 나방과도 같았다. 스님들은 보름달을 향해 염송하느라 요란하였고, 마지막 날은 미륵행렬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의례를 겉으로 보면 너무도 많은 구경꾼이 몰려다녀 전쟁터 같기도 하고 주술이나 푸닥거리 같기도 하지만, 그 내밀한 의도를 살펴보면 과거·현재·미래에 이르는 불교적 사상이 잘 배열되어 있어 의례를 접하는 수천명의 관중들이 모두 각각의 공덕과 인연에 따라 이 환상적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라브랑의 멋쟁이 남자들.

귀국 직후 중국 정부와의 충돌이 폭발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봉기의 도화선에는 잔뜩 기대하였던 ‘참’ 의례가 무산된 것에 대한 반감도 적지않았다. 지난 여름 라싸에서 묵었던 바로 그 게스트하우스 앞에서 봉기가 시작되어 수많은 스님과 시민들이 희생되었고, 수천명의 시위자들이 운집한 라브랑시 마당에는 중국군의 탱크까지 밀려들었다는 뉴스도 있었다.

티베트의 도성인 라싸에서 한족들은 번듯한 점포에서 물건을 팔고, 그 땅의 주인인 티베트 사람들은 난전에서 장사하는 모습을 보았다. 1달러짜리 목걸이며 기념품을 팔던 그 사람들이 어찌 되었는지, 설빔을 차려입고 탕카를 향해 모여들던 라브랑 사람들이 탱크 앞에서 어찌되었는지, 검은 흑포 사이로 눈빛을 마주치며 설레었던 스님들과 해골 탈을 쓰고 앙증맞게 춤 추던 동자승들, 눈이 얼어붙은 언덕에서 맨살이 보이는 승복을 입고 탕카를 펴던 스님들은 어찌되었는지. 아무리 애를 써도 닿을 길이 없어 마치 가위에 눌린 듯한 나날을 보내야 했던 그때의 심정을 십여년이 흐른 지금에야 글로 써 볼 엄두를 내어본다.

윤소희 음악인류학 박사·위덕대 연구교수 ysh3586@hanmail.net

 

[1533호 / 2020년 4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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