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라브랑시의 탕카의식
9. 라브랑시의 탕카의식
  • 윤소희 교수
  • 승인 2020.04.28 14:16
  • 호수 1535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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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볼 수 없는 오랜 기다림 속 마주한 탕카의 감동

차가운 티베트 겨울 아침, 군중에 떠밀리며 기다린 탕카의식
호랑이 모형 앞세운 기마단 뒤 끝없이 이어지는 스님들 행렬
동자승 춤추고 스님 요령 흔들며 기도하는 모습 생생히 기억
라브랑시의 탕카. 펼쳐진 탕카 가운데 흰 가탁이 늘어져 있다.

2007년 여름, 티베트력 7월 그믐 한밤중 손전등을 켜고 데뿡사원 뒷산 언덕을 오르는데 주변은 온통 유럽 사람이었다. 여행 중 정보나 준비할 장비가 궁금하면 유럽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정답을 얻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여행에 있어서는 앞서가는 그들, 유목민의 후예다. 휴대용 손전등을 비추며 간신히 산길을 오르는 필자와 달리 그 친구들은 후레쉬 달린 모자를 쓰고 양손으로 스틱을 짚으니 달팽이가 원숭이를 보는 듯하였다. 산언덕이 무에 그리 힘드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티베트를 안 가본 사람이 하는 말이다. 해발 300~400m에서 숨 쉬던 사람들이 평지가 3000~5000m인 티베트에서는 누구나 달팽이가 되어야 한다.

고산증을 감내하며 오르던 낯선 산행은 올라가면 갈수록 숨은 가빠오고, 머리가 아파왔다. 그러한 중에 산턱 곳곳에 약초를 태우는 향기가 연기와 함께 자욱하게 퍼져와 나그네의 시름을 달래주기도 하였다. 그나저나 아침에 탕카를 건다는데 왜 이렇게 일찍이 올라야 하는가 다소 의문이 들었는데, 오르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늦으면 탕카를 제대로 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마치 월드컵 때 보았던 붉은악마와 같았다. 서로 좋은 자리에서 보려고 자리다툼을 하는 웃지 못 할 상황도 있어 ‘부처님 뵈러 왔는데 자리 때문에 싸우다니’하고 속으로 비웃기도(?) 하였다. 기다림은 본래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법, 올라가서도 몇 시간은 기다린 듯하였다. 동이 틀 무렵 스님들이 탕카를 울러 매고 올라와 펼치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오르는 길에 숨이 차 힘이 들었고, 일찍 올랐던 덕분에 탕카가 잘 보이는 자리에 있었던 것이 전부였다. 스님들이 탕카를 펼쳤을 뿐, 그 앞에서는 별다른 의식도 없었다. 그런데도 귀국하고 한동안 그날의 설렘이 사라지지 않고 나를 상기시켰다. 정말 이상한 경험이었다.
 

탕카를 메고 언덕을 오르는 스님들.

라싸의 데뿡사원에서 탕카의식을 본 바로 그 겨울, 라브랑시에서 탕카의식을 또 보게 되었으니 탕카 속 부처님이 나를 끌어당기는 것인지…. 라브랑시의 탕카는 평지 언덕에 거는 것이었기에 데뿡과 같이 등산을 하지 않아도 돼 일단 걱정 하나를 덜었다. 이른 아침 사원 앞으로 가니 이미 온 들판에 사람들이 개미 떼같이 모여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어떤 의식이 있기 전 군중은 몇 시간 전부터 모여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언제쯤에나 탕카를 보게 되려나’ 시린 손발을 견디느라 연신 발을 동동 구르며 폴짝 뛰기를 하였다. 입김을 호호 불며 여기저기 라브랑 사람들의 설빔
구경에 한껏 재미를 들이고 있는데 어느 순간 군중들이 우르르 한곳으로 몰려가기에 연유도 모른 채 따라갔다.

탕카가 오려나 했는데 무시무시한 호랑이 모형을 앞세운 기마단이 나타났다. 마치 불빛을 향해 날아드는 불나방과도 같이 맹렬히 달려가는 호위군단 뒤에는 탕카를 멘 스님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탕카를 향한 군중의 모여듦이 얼마나 맹렬하였던지 “물러서거라!” 고함치는 스님들의 기세가 폭군과도 같았다. 호랑이 모형 안 두 사람은 달려드는 사람들을 향해 여지없이 앞발차기, 뒷발차기를 하였다. “자비로운 부처님 모신 법당 앞에 눈을 부라린 사천왕은 봤어도 발길질이라니 너무 한 거 아냐?” 싶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생각할 겨를도 없이 군중 틈에 이미 휩쓸려버린 터라 내 몸은 그냥 급류에 휘말려가고 있었다. 

나는 그냥 그랬다. 티베트 사람들처럼 탕카에 손이 닿기만 해도 앓던 병이 낫는다거나, 탕카 가까이만 가도 가피를 입는다는 이야기와 거리가 먼 21세기 선진국에서 온 스마트한 엘리트였다. 소박한 탐욕이 하나 있다면 촬영팀이 놓치기 일쑤인 악기나 춤과 같은 장면을 내 카메라에 담으려는 정도랄까. 저만치 녹색 칠을 한 법고와 바라를 든 스님이 보이기에 카메라 잡은 손을 내미는 순간 알 수 없는 펀치 하나가 나의 오리털 패딩을 강타하였다. 엉겁결에 뒤로 밀쳐진 몸을 가누면서 ‘호랑이 발길질에 카메라를 떨어뜨리지 않아 천만다행’이라며 안도하였다. 

문제는 나중에 일행을 만나고서였다. “괜찮아요?” 다들 물었다. “뭐가요?” “아까 맞았잖아요.” “봤어요?” “여기까지 ‘퍽’ 소리가 들렸어요.” “그렇게 세게 치던가요?” 맞아 놓고도 어떻게 되었는지 몰랐던 그날의 탕카 이운이 나에게는 창피한 난리판의 순간이 되어버렸다. 저 멀리 언덕을 오르는 탕카를 바라보니 마치 산을 오르는 누런 용의 몸통에 빨간 개미들이 따닥따닥 달라붙어 오르는 형상과도 같았다. 외지의 구경꾼은 그저 아득히 멀리서, 도대체 뭘 하느라 그토록 긴 시간이 걸리는지도 모른 채 우두커니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동이 틀 무렵부터 시작된 난리는 아침 해가 하얗게 바랜 후에야 탕카대에 이르렀다. 수십명의 빨간 개미들(?)이 다닥다닥 달라붙어 줄을 당기자 황금빛으로 덥힌 불보살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상할 만큼 심장이 두근거렸다. ‘건어물녀’라는 핀잔을 들을 정도로 감성 발산에 인색한 내가 탕카 앞에서는 무장해제가 되어버렸다. 이런 이벤트를 만든 티베트 스님들은 퍼포먼스의 천재임이 틀림없다. 
 

탕카를 호위하고 있는 호랑이 모형과 사람들.

탕카 속 불보살의 모습이 드러나자 의례가 시작되었다.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외지인으로서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티베트 밀교의 신비한 세계였다. 접근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 의식은 망원렌즈에 담긴 화면을 보고서야 어린 동자승들이 춤을 추고 있었고, 법태 라마가 드릴부(dril-bu, 한국의 요령)를 흔들며 기도와 축원을 행하고 있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망원렌즈로 화면을 당기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장면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 스님들 가운데 어깨까지만 오는 법복에 맨살을 드러낸 스님들이 군데군데 보이는 것이었다. 눈이 꽁꽁 얼어붙은 동토(凍土)에서 맨살이라니…. 이러한 놀라움은 다음날 행해진 호법의식에서도 있었다. 점심시간도 없이 계속되는 의례를 촬영하다 군중을 뚫고 화장실 다녀오기가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하마터면 큰 사고를 칠 뻔하였다. 그런데 스님들은 종일 부동자세로 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있으니 티베트 스님들은 이미 부처가 되었거나 돌멩이가 된 것이 분명하다.

탕카의 사방에는 스님들이 둘러싸 있고, 가운데는 축복과 길상의 상징인 흰 가탁(흰 수건)이 화룡점정인 듯 드리워져 있다. 탕카 하단의 양편에는 일산(日傘)과 법기를 든 스님들이 빼곡히 서 있다. 망원렌즈를 당겨보니 아직 개구진 표정이 역력한 어린 스님들이었다. 이 스님들이 들고 있는 법기들을 보면, 오색 리본을 단 쵸스-릉가(chos-rnga) 북면에는 길상을 의미하는 녹색 칠을 하였고, 북채에는 짧은 가닥의 오색 띠가 달려있다. 이외에도 한국의 자바라와 같은 솜살(shom-shal), 혼자서는 들 수도 없을 정도로 큰 둥첸(dung chen) 등 웅장한 금속성 음향으로 의례의 위엄을 더한다.

여름에 행해진 라싸의 데뿡사원 탕카의식 때에는 탕카 속 부처님을 뵙기 위해 멀고 먼 산골에서 오체투지를 하며 온 사람들도 있었다. 쇼툰축제와 탕카의식을 향해 외지인들이 몰려오자 신심으로 탕카를 보고자 하는 순례객들은 며칠 전부터 맞은편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고 있었다. 현지의 여러 사람들을 만나 사전조사를 한 덕분에 맞은편 산의 불빛을 알아챌 수 있었던 것과 달리 라브랑시는 급작스럽게 조사를 하게 된 데다 직후에 일어난 참혹한 사태로 이면의 이야기들을 듣지 못한 게 아쉽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나마 그때 보지 못했다면 영영 만날 수 없는 장관이었기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북과 솜살을 타주하는 스님들.

그나저나 이런 의식이 어떻게 한국에서는 수륙재 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일까? 이러한 시도를 최초로 한 스님은 탕카를 향한 민중의 반응을 보았음이 틀림없다. 티베트의 판첸라마가 원감국사(1226~1292)에게 보낸 ‘티베트문법지’(法旨, 송광사박물관 소장)를 보면 당시 원나라를 통한 티베트와 한국 불교문화의 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2008년 3월 티베트 봉기에 “불교의식을 못하게 한 것도 중요 원인 중 하나였다”는 말에 과대한 해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잠시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보면 우리도 일제강점기 총림의 염불원이 폐지된 바 있다. 염불원이 폐지되자 범어사 부전스님들은 ‘어산회’를 만들었다. 그랬더니 ‘회’는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당국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소모임을 표방한 ‘어산계’를 만들었는데, 훗날 이 조그만 모임이 엄청난 일을 해냈다.
 

탕카를 향해 작법무를 추고 있는 동자승들.

당시 범어사는 성월 스님 지도하에 민족불교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때 동참한 많은 공덕주들의 이름이 커다란 바위에 빼곡히 새겨져 있고, 어산계공덕비는 따로 세워 보시 금액과 불사 항목을 새겨두었다. 필자는 영남범패 전승과정을 조사하다 이 비석을 발견하였는데, 그 전에 수없이 범어사를 드나들어도 길목에 세워진 이 비석을 보지 못했다. 비석을 보니 화폐단위도 요즈음과 달라 그 금액을 현 시세로 환산하기까지 두 편의 논문을 쓰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 의례가 사찰경제와 홍법에 미치는 위력이 얼마나 큰지를 실감하였다.

윤소희 음악인류학 박사·위덕대 연구교수 ysh3586@hanmail.net

 

[1535호 / 2020년 4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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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마 2020-05-12 13:41:39
이런 모습을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다니...
한다 하더라도 2008년 봉기 이전 같지는 않겠지요.
안타깝습니다.

백련화 2020-05-02 15:15:02
이 글을 보니 티벳 사람들은 탕카에 손이 닿기만 해도 가피를 입는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탕카에 진짜 부처님이 계신다고 믿는 심심이 보입니다.
우리는 궤불이나 탱화를 그림이나 문화재로만 보는데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찬드라 2020-04-28 21:16:23
멋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