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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29대 총무원장 고산 스님-상

1998년 종단사태 혼란 속에서 종단 안정의 적임자로 부상

‘98사태’ 종정·총무원장 갈등서 촉발…월주스님 3선논란이 불씨
종정교시 봉대로 출범한 정화개혁회의 총무원 접수로 폭력사태
거듭된 권유 끝에 고산 스님 출마 결심…지선 스님 제치고 당선

조계종 29대 총무원장으로 당선된 고산 스님(우측)이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덕운 스님으로부터 당선증을 받고 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조계종 29대 총무원장으로 당선된 고산 스님(우측)이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덕운 스님으로부터 당선증을 받고 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1998년 가을, 조계종에 또 한 번 폭풍이 몰아쳤다. 월주 스님의 총무원장 3선 여부를 두고 논란이 일더니 급기야 폭력사태까지 발생했다. 3선을 반대하는 스님들이 총무원을 접수하면서 조계종은 내분으로 치달았다. 1994년 종단개혁을 선언하며 대대적인 제도혁신에 나섰지만 권력을 향한 스님들의 욕심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총무원장 자리를 두고 발생한 스님들의 ‘혈전’으로 조계종은 세간의 따가운 비판에 내몰렸다.

이 소식은 고산 스님에까지 전해졌다. ‘지리산의 무쇠소’(고산 스님, 조계종출판사)에 따르면 이 무렵 고산 스님은 통영 연화도 연화사 창건불사를 회향한 상태였다. 연화도에 부처님도량을 세우겠다는 원력으로 3년여 간 뭍과 섬을 오가며 피땀으로 일군 결실이었다. 연화도에 도량을 세운 스님은 법회를 열어 불연의 씨앗을 심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범어사 문도스님들이 연화도로 건너왔다. 종단 안정을 위해 총무원장에 나서달라는 것이었다. 스님은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라며 고사했다. 불사에만 전념하겠다는 뜻도 몇 차례 전달했다. 그러나 총무원 주변에서 스님들의 대립과 갈등이 커지고, 혼란이 확산될수록 고산 스님을 찾는 빈도가 커져갔다. 마지막에는 10여명의 스님이 찾아와 “종단을 안정시킬 분은 스님밖에 없으니 결심을 하라”고 윽박지르다시피 했다. 더 이상 거부할 수만은 없었다. 결국 스님은 총무원장 선거에 출마하기로 했다. 그러나 선거는 부처님 율장에 어긋나고, 필연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어 승가화합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평생 율사로 살아온 고산 스님이 모를 리 없었다. 스스로 ‘내키지 않은 결정’이었다고 밝힌 이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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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스님

1998년 12월 고산 스님이 서울에서 마주한 총무원청사의 모습은 처참했다. 폭격을 맞은 듯 청사 외벽은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고, 검게 그을렸다. 바닥은 깨진 유리파편과 쓰레기 더미가 뒤엉켜 1998년 ‘종단사태’의 참혹함을 대변했다. 누가 총무원장을 맡더라도 종단사태가 남긴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을 듯 보였다.

‘백년 동안 한국불교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김순석, 운주사)에 따르면 1998년 종단사태는 종정 월하 스님과 총무원장 월주 스님의 갈등에서 비롯됐다. 두 스님은 1994년 개혁회의 출범에 따라 종정에 추대되고 총무원장에 선출됐지만 종단운영 방식을 두고 번번이 대립했다. 월하 스님은 총무원장에게 집중된 사면, 재산처분, 본사주지 임명 등의 권한을 종정과 나눠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월주 스님은 총무원장 중심제의 종헌을 고수하겠다고 맞섰다. 월하 스님은 1997년 3월 종정사직서를 원로회의에 제출하면서 월주 스님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원로회의가 사직서를 반려하면서 중재에 나섰지만, 그해 부처님오신날 종정법어가 발표되지 않는 등 두 스님의 앙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조계종 중앙종회는 1998년 9월8일 133차 임시회를 열어 총무원장 선거법을 개정, 29대 총무원장 선거일을 11월12일로 확정했다. 주요언론은 이 소식을 전하며 후보군으로 당시 불국사 주지 설조, 법주사 전 주지 월탄, 백양사 주지 지선 스님과 총무원장 월주 스님을 거론했다. 월주 스님의 ‘3선 논란’이 본격화된 것도 이 무렵이다.

‘한겨레신문(1998년 9월19일자)’에 따르면 설조·월탄·지선 스님 등은 “월주 스님이 다시 출마할 경우 3선에 도전하는 것”이라며 “이는 3선을 금하는 종헌종법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월주 스님이 1980년 6개월여 간 총무원장으로 재임한 만큼 다시 출마하는 것은 곧 3선에 도전하는 것이라는 해석이었다. 이때까지 출마여부에 대한 공식입장을 드러내지 않았던 월주 스님 측의 출마를 사전에 막겠다는 포석이기도 했다.

월주 스님 측도 물러서지 않았다. 월주 스님 측은 “1980년 총무원장을 맡았지만 신군부에 의해 강제 사퇴당한 것으로 장기집권과는 거리가 멀고, ‘1차에 한해 중임할 수 있다’는 종헌규정도 1994년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소급적용할 수 없다”면서 출마를 공식화했다.

월주 스님과 반월주 스님 측의 유권해석이 팽팽해질수록 ‘월주 스님의 3선 논란’도 커져갔다. 10월24일 월주 스님의 3선을 반대하는 스님 30여명이 총무원 청사를 기습적으로 점거했다 경찰에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혼란이 가중됐다.

이런 상황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종정 월하 스님이 10월27일 교시를 발표해 “총무원장 3선은 종헌종법에 위배되기 때문에 절대 부당하다”고 밝혔다. 이로써 월주 스님의 출마여부는 종정교시를 받드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귀결됐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를 비롯한 14개 출재가 단체들은 ‘월주 총무원장 3선 반대를 위한 범불교도 연대회의’를 구성하고 10월30일 서울 탑골공원~조계사 대웅전에 이르는 길에서 오체투지를 진행하며 월주 스님을 압박했다.

그러나 월주 스님은 11월4일 지선·월탄·설조·법열(대전사암연합회 부회장)·대우(전 불교방송 상무)·종후(노적사 주지)스님과 함께 후보로 등록했다. 반월주 스님 측은 “월주 스님이 종정교시를 거부했다”며 맹공을 퍼부었다.

급기야 11월11일 월탄·설조 스님 등은 총무원장 선거를 하루 앞두고 서울 조계사에서 스님 300명과 신도 400명(경향신문, 11월12일자)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했다. 승려대회에서는 △3선을 강행한 월주 총무원장의 해임과 중징계 △총무원장 선거 일시 유보 △한시적 종단 최고기구인 ‘정화개혁회의 출범’등을 결의했다. 이어 승려대회 측은 총무원을 접수했다. 이 과정에서 총무원 측과 난투극이 발생해 3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백주에 각목을 휘두르며 혈투를 벌이는 스님들의 모습은 언론을 통해 여과 없이 전파됐고, 조계종은 다시 ‘세간의 걱정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총무원 청사를 장악한 정화개혁회의는 “선거를 연기하고 당분간 개혁회의가 종단운영의 전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맞서 총무원측은 “예정대로 선거를 치르고 빼앗긴 총무원 청사도 되찾겠다”고 벼렸다. 양측은 팽팽한 긴장관계를 이어갔다.

이튿날 통도사에서 급히 상경한 종정 월하 스님은 “이번 대사는 청정한 승풍 진작과 승가의 대화합을 위한 의분의 처사”라며 정화개혁회의 측의 손을 들어줬다. 종정스님의 지지선언으로 정화개혁회의는 유리한 고지에 올랐다. 그러나 종도들의 마음까지 얻지는 못했다. 오히려 종헌종법을 유린하고 물리력으로 총무원청사를 차지한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다. 앞서 월주 스님의 3선을 반대했던 지선 스님도 “종헌종법을 부정하고 종권을 탈취하려는 것은 해종행위”(한겨레신문, 1998년 11월13일자)라며 정화개혁회의와 선을 그었다. 11월10일 개원한 12대 중앙종회도 13일 서울 길상사에서 회의를 열어 “정화개혁회의를 불법”으로 규정짓고, 정화개혁회의의 해산을 요구했다. 정화개혁회의가 이를 거부하자, 중앙종회는 11월16일 서울 봉은사에서 다시 회의를 열어 중앙종회 차원의 승려대회를 열기로 결의했다. 조계종은 다시 양분 사태로 향했다.

이런 가운데 총무원장 월주 스님은 임기 이틀을 남긴 11월19일 서울 영화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29대 총무원장선거 후보 사퇴”를 선언했다. ‘동아일보(1998년 11월20일자)’에 따르면 월주 스님은 이날 “종단이 맞은 심각한 위기 앞에서 개인적인 명분이나 종단의 이익에 앞서 한국불교 전체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차원에서 후보에서 물러난다”고 밝혔다. 대신 총무부장에 도법 스님을 임명해 새 총무원장이 선출될 때까지 원장직을 대행토록 했다. 월주 스님의 사퇴로 정화개혁회의 측이 총무원청사를 장악할 명분은 사라졌다. 그럼에도 정화개혁회의는 해산을 거부하면서 “종헌종법을 개정해 정화개혁회의 중심으로 종단을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정화개혁회의 측의 설자리를 좁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총무원과 중앙종회 측이 ‘반정화개혁회의’로 결속하는 명분을 주고 말았다.

‘경향신문(1998년 12월1일자)’에 따르면 11월30일 반정화개혁회의를 선언한 총무원과 중앙종회 측 스님과 신도 1000여명은 조계사 앞 우정국로에서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했다. 승려대회에서는 △월하 종정 불신임 △정화개혁회의 해산 △조속한 총무원장 선거 등이 결의됐다. 이어 정화개혁회의가 점거 중인 총무원 청사로 진입을 시도하면서 또 한 번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정화개혁회의 측은 분말소화기와 물을 뿌리고, 화염병과 돌까지 투척하며 극렬히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총무원 직원이 돌에 맞아 코뼈가 부러지고 취재 중이던 신문사 기자도 큰 부상을 당하는 등 3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양측은 총무원 청사를 두고 한 동안 대립을 이어갔다.

이런 가운데 중앙종회는 12월7일 봉은사에서 136차 임시회를 열어 총무원장선거법 일부를 개정하고 29대 총무원장선거를 12월29일 개최하기로 잠정 결정했다. 그러나 이날 중앙종회는 ‘소집일 7일전 종단기관지에 공고해야 한다’는 절차를 생략한 채 진행했다. 종단사태의 혼란 속에서 빚어진 일이었지만, 이는 훗날 29대 총무원장 고산 스님이 ‘총무원장 부존재 확인 소송’에서 패소하는 빌미가 되고 말았다.

양측의 대치는 1998년 12월11일 서울지방법원의 가처분 결정으로 분수령을 맞았다. ‘동아일보(1998년 12월12일자)’에 따르면 이날 법원은 월주 전 총무원장 측이 정화개혁회의 측을 상대로 제기한 ‘퇴거단행 및 업무방해금지’ 가처분을 인용해 “정화개혁회의는 건물에서 퇴거하고 일체의 업무방해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 법원의 판결로 정화개혁회의의 총무원청사 점거는 불법으로 간주됐다. 그럼에도 정화개혁회의는 ‘몽니’를 부렸다. 법원이 공권력 투입을 예고하며 압박했지만, 정화개혁회의 측은 퇴거명령을 거부했다. 오히려 정화개혁회의 측 스님 50여명은 12월21일 물리력을 동원해 대구 동화사를 접수하기도 했다. 결국 경찰은 12월23일 새벽 4시, 6000여명의 병력을 투입해 6시간 만에 정화개혁회의 측을 진압하고 강제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정화개혁회의는 총무원청사에 불을 지르고, 자해소동을 벌이며 완강히 저항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정화개혁회의가 월주 스님의 출마포기 선언 때, 아니면 법원의 가처분 결정이 내려졌을 때라도 총무원청사를 비우고 자진해산했더라면 1998년 조계종이 대규모 폭력사태로 세간의 비판에 내몰리는 일은 없었을 수도 있었다.

총무원 청사를 다시 장악한 총무원장 직무대행 도법 스님은 12월29일 29대 총무원장 선거를 진행했다. 그 결과 167표를 얻은 고산 스님이 115표를 획득하는 데 그친 지선 스님을 제치고 29대 총무원장에 당선됐다. 고산 스님은 이날 “종단사태의 아픔을 치유하고 화합을 위해 온 몸을 바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총무원에서 강제 퇴거된 정화개혁회의가 별도의 총무원을 세우면서 총무원장 고산 스님의 향후 행보가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536호 / 2020년 5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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