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양산 통도사와 구하 스님
20. 양산 통도사와 구하 스님
  • 임은호 기자
  • 승인 2020.05.11 13:09
  • 호수 15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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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엄한 일제 눈길 피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 지속 지원

14년 주지 소임 맡은 구하 스님, 조계종 대표 수행도량 구축 일신
친일 비판 받기도 했지만 최근 독립자금 지원 정황 속속 드러나
경내 남겨진 생생한 필체, 불자들 가슴에 참된 수행자 표상 각인
구하 스님은 통도사 주지를 14년간 맡으면서 근대 통도사의 면모를 일신했다. 특히 전통사찰로서 사격을 갖출 수 있도록 전각을 보수 중창했고 강원과 선원, 율원을 복원해 스님들이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는 가풍을 일으켰다.

“나 이제 갈란다. 너무 오래 사바에 있었어. 그리고 다시 통도사에 와야지.”

1965년 10월3일 한낮, 근현대 통도사의 중흥조로 널리 알려진 구하 스님(九河, 1872~1965)은 출가 이후 삶의 대부분을 보낸 영축산 통도사로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열반에 들었다. 세수 94세, 법랍 81세였다.

통도사 역사에서 구하 스님이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스님은 통도사 주지를 14년간 맡으면서 통도사의 면모를 일신했다. 특히 통도사와 통도사 산내 암자의 재산을 일원화 해 회계를 투명하게 했으며 이렇게 모인 정재를 바탕으로 통도사가 조계종 대표수행도량으로서의 토대를 닦았다.

구하 스님의 삶에는 수행자로서의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스님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1919년 이른바 승려독립선언서의 서명자였으며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음으로 양으로 재정을 지원했다. 물론 그것이 빌미가 돼 탄핵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평생 참선과 염불정진에 몰두하며 한국불교 승풍진작에 적극 나섰던 스님의 삶은 당대의 선지식으로 추앙을 받았으며, 스님 또한 대중을 제도하고 섭수하는 일에 잠시의 나태도 허락지 않았다.

구하 스님은 1872년 울주군에서 태어났다. 5세에 사서삼경을 다 떼었을 정도로 신동이었다. 13세 되던 해 천성산 내원사로 입산해 1889년 경월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이후 범어사에서 강백 의룡 스님으로부터 외전을 3년간 배웠고 해담, 혜옹 스님에게서 내전(內典)을 두루 배웠다. 구하 스님은 이후 전국의 산천을 떠돌며 운수행각을 했으며 20대 후반이 돼서야 비로소 통도사와 인연이 닿았다. 1900년 통도사에서 한국불교의 법맥을 이어오던 성해 스님의 전법제자가 되면서 구하(九河)라는 법호를 수지했다. 1905년 34세에 통도사 옥련암에서 정진하던 중 생사가 둘이 아닌 경계를 깨달았다. 그리고 이렇게 오도송을 남겼다.

心塵未合同歸宿(심진미합동귀숙)/ 五體投空空歸依(오체투공공귀의)
마음에 티끌이 따로 없어 같이 존재하고/ 오체를 공중에 던지니 함께 귀의한다네.

수행과 교학에 힘쓰던 스님은 35세 되던 해 일본불교계를 시찰하는 대표단에 포함돼 일본의 문물과 풍경을 경험하고 일본불교를 접한 뒤 출가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전근대적이고 부패한 조선불교를 개혁해야겠다는 발원을 세운 것이다. 스님은 귀국 후 용성 스님을 비롯한 5~6명의 중진스님들과 연합해 조선불교 개혁에 착수했다.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후학을 양성하겠다는 원력을 세운 것이다. 이후 1906년 통도사에 신식학교인 명신학교(明信學校)를 설립하고 학감을 담당했다.

스님은 1911년 통도사 주지 소임을 맡으며 통도사가 옛 모습을 갖춘 대가람이 되도록 원력을 세웠다. 그리고 전통사찰로서의 사격을 갖출 수 있도록 전각들을 보수하고 중창했다. 옛 유물들을 수집해 보존하는 데도 앞장섰다.

특히 출가자의 계율을 엄정히 하는데 힘을 쏟았다. 당시 통도사는 결혼한 스님들이 절에서 술을 만드는 누룩을 만들어 내다팔 정도로 지계의식이 낙후돼 있었다. 스님은 이런 사찰 내 폐습을 일신하고 더불어 강원과 선원, 율원을 복원해 스님들이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는 가풍을 일으켰다. 스님으로 이런 인해 통도사는 계정혜 삼학수행이 서릿발 같은 대가람의 면모를 되찾을 수 있었다.

스님은 또 마산, 울산, 진주, 양산, 창원, 창녕에 통도사 포교당을 건립해 대중을 불법의 바다로 이끄는 전법에 힘썼다. 매월 두 차례 법회를 열어 교리를 강설했고 다수의 스님들을 일본에 유학시켜 인재를 양성하는 데도 많은 공력을 쏟았다.
 

구하 스님은 항일운동에 실질적인 지원을 계속해 공금횡령죄로 고발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빼앗긴 나라의 독립에 대한 원력을 한시도 버린적이 없었다.

기도를 열심히 하기로 소문이 났던 스님이지만 신문명도 적극 수용하며 시대를 선도하기도 했다. 해동역경원을 설립해 불경을 한글로 번역‧출판했고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인 1920년 1월,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잡지 ‘축산보림(鷲山寶林)’을 발간했다. ‘축산’은 통도사가 있는 영축산(靈鷲山)을 줄인 말이고 ‘보림’은 ‘보배의 숲’이란 뜻이다. 이전에도 몇몇 불교잡지가 선보였지만 사찰이 발행 주체로 나선 것은 ‘축산보림’이 처음이다.

“오늘의 조선은 어떠한가? 소위 문명시대에 신문은 그만두고 한 권의 잡지를 발행하기 어려우니 우리 사회의 발전을 어찌 구할 것인가. 그것이 ‘축산보림’ 잡지를 발행한 동기다. 이 잡지의 발행은 한편으로 시대의 요구에 상응한 것으로 우리 사회동포의 생활과 인생관에 직접 관계가 있다.” 

‘축산보림’ 발행사에는 당시 시대상과 구하 스님의 의지가 그대로 나타난다. 스님은 암울한 시대 상황을 타파하고 부처님 가르침으로 불교 중흥의 씨앗을 뿌리고자 했다. 불교계의 개혁과 발전을 모색하며 교단과 통도사를 이끌었던 스님은 조선총독부의 총무원 해체 지시에도 자주적인 운영을 끝까지 수호했고 근현대불교사의 기틀 마련과 불교교단의 올바른 운영을 이룩하는 데 그 일생을 바쳤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한국불교를 대표했기에 친일행적에 대한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스님은 1917년 이회광, 강대련 등과 함께 일본을 방문하면서 이곳에서 일본을 칭송하는 발언을 하는가 하면 1920년대 중후반 ‘조선불교총보’ 등에 친일 성향의 글을 발표해 불자들의 친일을 선동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런 까닭에 한때 불교계 친일인사 명단에 포함되기도 했다. 

하지만 스님이 겉으로는 일본의 신문물을 배우러 일본에 드나들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끊임없이 독립운동자금을 대는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1919년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에 가담했던 스님은 항일운동에 실질적인 지원을 계속해 나갔다. 그해 11월 중국 상해에서 발표된 승려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안창호, 초월 스님 등 10여명에게 당시 1만3000원이라는 거금을 독립자금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스님의 이런 공적은 입적하고도 한참 동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다 2000년대 초, 스님이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는 각종 기록들과 이를 증명하는 영수증이 발견되면서 스님의 친일이 위장이었음이 속속 드러났다. 구하 스님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다시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스님을 모함하는 이들에 의해 수행이력이 처참히 묵살되거나 독립자금을 지원하다 공금횡령죄로 고발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구하 스님에겐 물욕, 명예욕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스님은 일제강점기라는 민족 암흑시대의 처참한 환경 속에서도 불교발전과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원력을 한시도 버린 적이 없었다. 구하 스님의 법손들은 영축불교문화재단을 만들어 스님의 행적을 복원하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진력하고 있다. 이를 통해 한국불교가 침체되고 친일화의 길을 걸을 때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려 했던 선지식, 구하 스님의 삶이 올바르게 평가받길 기대하고 있다.

“통도사로 다시 오겠다”는 유훈 때문일까. 당대 최고의 명필로도 꼽혔던 구하 스님은 통도사에 편액과 주련을 다수 남겼다. 적멸보궁과 개산조당, 삼성각과 황하각의 편액과 만세루 주련 등에 남겨진 스님의 생생한 필체는 대중스님과 불자들의 가슴에 참된 수행자의 표상으로 깊게 각인돼 있다. 

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537호 / 2020년 5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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