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산대희(山臺戱)
10. 산대희(山臺戱)
  • 정혜진
  • 승인 2020.05.12 09:47
  • 호수 15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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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미술·공연예술 결합된 전통문화의 정수

‘산대’란 공연용 야외무대…산대 앞서 연행된 연희 총칭해 ‘산대희’
신라시대부터 팔관회·연등회 때 대규모 공연…전통 ‘종합예능’공연
2004년에 국립국악원이 재현… 연등회서 다시 만날 수 있길 기대
2004년 경기도 실학축전 전야제에서 공연된 산대희 장면.

무형문화재 58호인 줄타기 명인이 한 다리로 줄을 딛고 앉았다 일어서는 ‘외홍잡이’의 재주를 부려 보는 이들의 마음을 졸이게 한다. 소리꾼과 악사 10여명은 산대에 올라가 잡가 중 서서 부르는 ‘선소리’를 하고, 양주별산대의 탈춤 ‘애사당 법고놀이’로 흥을 돋운다. 이어 인형극 꼭두각시놀이, 민요와 풍물굿이 이어지자 신이 난 관람객들이 공연장으로 내려와 모두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하며 신명 나는 축제를 즐긴다. 2004년 9월, 우리나라 고유의 놀이인 ‘산대희’가 220년 만에 재현됐을 때의 모습이다.

조선시대 서울의 애오개와 사직골 인근의 거리에서는 ‘본산대놀이’라 불리는 가면극이 성행했다. 산대놀이는 민속놀이이자 민속무용으로, 산대놀이에서 각종 연희를 담당하던 놀이패는 주로 성균관 소속의 노비인 반인(泮人)들로 구성됐다. 오늘날 양주, 퇴계원 등 경기지역에 남아있는 ‘산대놀이’가 바로 이 산대희라는 명칭에서 유래한 탈놀이를 말한다.

산대놀이에서 ‘산대(山臺)’란 산처럼 높이 쌓은 야외 특별무대를 뜻하는 것으로 이중 바퀴가 달린 이동식 무대는 예산대라고 칭했다. 무대공간으로서 신성한 산을 의미하는 불교의 삼신산(三神山)인 방장산, 영주산, 봉래산 중 봉래산(蓬萊山)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선산(仙山)의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산의 모형을 만들고 그 위에 신선, 동·식물, 궁궐, 사찰, 탑 등을 정교하게 갖추어 나무, 꽃 등으로 장식도 하고 기계장치에 의하여 작동시킬 수 있는 인형과 잡상 등의 조형물을 설치하여 만든 우리나라의 공연용 야외무대가 산대인 것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가면극, 줄타기, 땅재주 등의 온갖 놀이와 춤판인 가무백희(歌舞百戱)를 벌이는 행사가 산대놀이로, 산대 앞에서 연행된 연희들을 총칭해 산대희라고 부른다. 

산대희에 연희되는 놀이로는 줄타기, 장대타기를 비롯해 버나(접시돌리기), 덜미(꼭두각시 놀음), 살판(땅재주), 얼른(마술), 토화(불뿜기), 농환(방울받기) 등을 포함한 민속놀이부터 호인극(탈놀이), 풍물(농악), 오방귀무, 처용무와 신선의 복숭아를 따서 군주에게 바치는 헌선도(獻仙桃)와 같은 춤이 추어졌다. 그야말로 산대희는 당시 서민들의 볼거리를 모두 모아 만든 전통예능의 버라이어티 쇼인 것이다. 

산대희에 동원된 재인들은 주로 서울·경기권에서 뽑았는데, 재인이 부족할 때는 다른 지방에서 동원되기도 하여, 참여 인원이 많을 때는 그 수가 무려 600여명에 달할 만큼 규모가 컸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에서 온 사신의 영접을 위하여 광화문 밖에 동서로 광화문만큼 높은 거대한 산대를 두 개 설치하여 산대희를 열거나, 궁중의 잡귀를 물리치는 행사인 나례에서, 혹은 왕실 연희 등의 다양한 행사에서 산대희를 열어 축제의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다. 

산대희의 역사는 조선보다 훨씬 이전인 신라 진흥왕 때 시작한 팔관회에서, 그리고 신라 진흥왕 이래 고려시대에도 팔관회와 연등회를 거행할 때 산대를 설치하고 그 앞에서 가무백희를 연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외의 경사들에서도 수시로 산대희가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그 시대의 산대희는 팔관회와 연등회 같은 국가적인 양대 행사에 매년 성대하게 열릴 만큼 큰 불교적 행사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숭유억불 정책을 고수했던 조선시대 들어서 불교적 의례의 의미는 배제하고 놀이로서의 기능이 강조 되었다. 특히 산대는 세 마리의 큰 거북이가 삼신산을 떠받치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어, 나라가 태평하면 거북이들이 춤을 췄다는 전래를 바탕으로 거북이가 춤을 추는 모습을 연출하여 국가의 태평성대를 기원하고 과시하기 위하여 산대희를 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산대희가 시대별 설행의 목적이 다르다고 해도 산대희 자체는 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막론하고 모두 대규모로 실시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어느 시대건 국가적인 축제였지만 온갖 놀이를 한자리에서 펼치던 대규모의 산대희인 만큼 동원되는 인력이나 물자, 재정 또한 막대하여 부정적인 면도 적지 않았다. 부족한 재인을 채우기 위하여 먼 곳에서 재인을 동원할 때에는 재인들이 오고 가는 마을에서 약탈이 일어나 가까운 곳에서만 재인을 동원하도록 하는 지시가 나오기도 했다. 

국가재정의 부담이 크고 낭비가 심하다는 이유로 인조 이후 쇠퇴하다가 조선 후기가 되면서 산대희는 사실상 열리지 않게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쇠해진 이유도 있었지만, 인조가 침향산을 네거리에 끌고 나가 불태워 버리는 등 산대희에 대한 부정적 의지를 천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정조대인 1784년에 이르러서는 대규모의 산대희는 모든 행사에서 사라지고, 중국 사신이 올 때 산대희를 해야 한다는 관례만 유지되어 순조(1824년) 때까지 소규모로 그 명맥만 유지하다 각 재주의 기예만 남은 채 교류와 소통의 공간을 제공하던 축제로서의 산대희의 맥은 끊어졌다.

2004년 경기도 실학축전에서의 첫 재연 이후 국립국악원이 다양한 산대희를 재연하기 위해 꾸준한 노력을 기울였다. 국악원은 ‘2008 산대희’에서 춘하추동, 변화하는 아름다운 산의 모습 속에 펼쳐지는 모습을 공연으로 꾸몄다면, ‘2009 산대희’는 물에 배를 띄어놓고 백희를 연행하는 수희(水戱)를 기반으로 구성하여 새로운 산대희를 선보였다. 그리고 광화문 앞, 만백성이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며 무대를 산처럼 쌓아놓고 오색비단으로 꾸미고 만든 무대에서 날이 새도록 가무백희를 벌였던 산대희를 4개의 구성으로 나누어 과거와 현재, 미래의 의미를 담아 재현하기도 했다. 극장공연 여건상 모두 고정식 산대나 비슷한 채붕을 설치한 공연이었다.

한편, 궁중문화를 재현한 2018년 궁중문화 축전에서도 산대희가 재연되었다. 세종 즉위 600년을 맞아 세종의 애민정신을 기리며 연 재연 축제로, 1784년에 정조가 금지한 후 234년 만에 등장한 이동식 산대인 예산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행사였다. 

두 행사 모두 사라져간 전통연희를 다시 되살린 점에서 또 소통과 나눔이라는 산대희의 가치를 살려 쉽게 볼 수 없는 산대까지 재현하여 시민들과 축제로 소통한 점에서 의미가 크다. 

산대희는 신선들의 산에서 동식물들이 평화롭게 살 듯 백성들이 태평성대한 나라에서 조화를 이루며 사는 화합과 상생의 세상을 기원하며 행하던 행사였다. 조형 예술, 무대 미술, 공연 예술 등을 총체적으로 결합해 화합과 상생을 소망하는 우리 전통문화예술의 정수인 산대희를, 가까운 시일 내에 연등회에서 다시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정혜진 예연재 대표 yeyeonjae@gmail.com

 

[1537호 / 2020년 5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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