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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여래선원 주지 효산 스님

“불교는 부처님 가르침 배우고 깨달음 실천하는 종교입니다”

부처님 마지막 가르침은 ‘법에 의지하고 자신에 의지하라’
사마타는 분노 멈추고 고요함에 머무는 진리의 문 체험법
원력·서원·인욕 같은 치열한 노력으로 팔정도 지속해야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부처님의 깨달음을 실천하는 종교다.” 오늘 불교대학 입학식에 오신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부처님을 믿는 것은 두 번째, 세 번째 일이고 첫 번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부처님의 깨달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 아닙니까? 믿는 것이 첫 번째 아닌가요?” 하고 질문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많은 분이 그렇게 믿고 계실 것입니다. 저도 출가하기 전 청년 시절 속가 모친의 모습은 항상 손을 합장하고 비시는 것으로 기억됩니다. 모친뿐만 아니라 사찰에 가면 두 손을 맞대고 비비시는 불자님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아, 무엇을 잘못하신 것인지 모르겠지만 저렇게 비는 것이 불교인가?’ 하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이후 출가를 하고 어느 날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배우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종교”라는 글을 접하면서 ‘아, 내가 그동안 잘못 알았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실 때의 이야기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지막 유행을 마치시고 쿠시나가라의 사라수 나무 아래 누우셨습니다. 머리를 북쪽으로 두시고 힘없이 비스듬히 누우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평생 부처님을 시봉한 아난은 눈물을 쏟아냅니다. 옆에서는 “아난아, 어서 빨리 부처님께 이 불교를 어떻게 이어가고 누구를 의지해야 할지 물어봐야지” 하고 재촉을 합니다. 하지만 아난이 울먹이며 말을 못하자 부처님께서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아난아,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비탄하지도 말아라. 모든 것은 무상한 것이다. 사랑하는 것도 모두 사라지고 인연 되어서 생겨난 것들은 인연이 다하면 반드시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 붓다라는 사람도 결국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지만 법(法)은 변함이 없다.”

그때야 아난이 정신을 차리고 부처님께 묻습니다.

“부처님.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가시고 난 뒤에는 어떤 것에 의지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가시고 나면 이 많은 불교도 중에 도대체 누구를 따라야 하는 겁니까?”

그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답하십니다.

“아난아, 사람은 영원하지 않다. 사람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진다. 사람은 법이 아니다. 나의 가르침, 불교의 법에 귀의하고 법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의 유일한 상속자를 법으로 규정하십니다. 그리고 다음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거라. 너 자신의 법에 의지하거라. 너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아라.”

바로 이것이 불교가 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종교이고 실천하는 종교인지를 잘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이 대목에서 불자들은 또 질문을 하실 겁니다.

“나 자신의 법에 의지하라니, 스님. 저에게도 법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등불은 어떤 것일까요? 등불은 어둠 속에서도 켜기만 하면 싫어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가난하고 외롭고 힘들 때, 좋고 즐거울 때를 구분 없이 환하게 비춥니다. 마음이 행복할 때만 진리가 드러나고 누군가 밉고 불행할 때 진리가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리, 즉 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법의 첫 번째 조건은 앞과 뒤가 같아야 합니다. 처음 들어가는 문과 나오는 문이 같은 것입니다.

처음 들어가는 문과 나오는 문은 원래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중생의 문과 진리의 문입니다. 중생의 문은 들어가는 문은 있지만 나오는 문은 없습니다. 없다기보다는 알지 못합니다. 불자님들께서 “스님!”하고 부르시면 저도 모르게 “네?” 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할 때가 있습니다. 경상도의 억양으로 툭 내뱉듯 대답을 하면 종종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 한 번은 하필 한 불자님께서 무슨 일이었는지 기분이 좋지 않으셨습니다. 그날도 저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던 것 같습니다. 그 불자님에게는 ‘보잘 게 없는 일반 신도라고 나를 무시하는구나.’ 이런 생각의 싹이 올라왔습니다. 저는 겨우 한마디 대답을 했을 뿐이지만 그 말 한마디는 마치 가시가 손가락을 찌르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가시였지만 ‘스님이 나를 무시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이어지면서 결국 나오는 문은 스님에 대한 원망이 커져 주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스님의 경우만 아닐 것입니다. 남편, 아이들, 이웃,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중생문으로 들어가게 되면 나오는 문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 수없이 발생합니다. 대부분은 출구를 찾지 못한 채 그냥 내버려 두거나 누군가 문을 열어주기만을 바라고 또 전혀 다른 문으로 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삶이 항상 고통스럽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진리의 문을 잘 이해하고 진리를 잘 실천하는 공덕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십니다. 부처님께서는 “법이라는 것은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눈앞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지혜가 있는 자라면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깨닫고 체험한 이후에는 그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에 대한 체험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진리의 문을 체험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마타(śamatha)의 체험입니다. 사마타의 체험은 쉽게 말하면 정지하는 체험, 멈추는 체험, 그것을 그대로 보는 체험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는 조그만 마음의 상처였는데 그 상처가 점점 커져서 나중에 문을 열고 나올 때는 어디인지조차 모르는 것이 중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진리의 체험은 그와는 다릅니다. 분노하는 마음이 작게 시작되었을 때 그 분노의 마음을 열고 들어가서 분노가 커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지나가는 말 한마디가 나를 미워하고 무시하고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처럼 들린다면, 진리의 문에서는 그것이 그 말 한마디뿐이라는 걸 알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분노의 문에 머물면 안 됩니다. 분노의 땅으로 가는 길을 멈추어야 합니다. 

일단 멈추고 그 자리에서 다른 인연을 가져와야 합니다. 다른 인연이 바로 사마타의 인연입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 쉬면서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 하고 나면 그렇게 미워하던 마음이 바람 빠진 풍성처럼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마치 부부가 너무 말다툼이 심하다가도 아이들, 손주들이 웃는 모습을 보고는 마음이 가라앉아서 언제 미워하고 원망했는지 모르게 마음이 본래로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님이 자식을 향한 마음은 진리와 참 많이 닮았습니다. 그 마음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분노의 땅에서 멈춤의 땅, 사마타의 땅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진리의 땅에서 나는 나무와 열매에 의지해 멈추어야 합니다. 진리의 땅에서 나는 나무와 열매는 다양합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방법, 불보살 명호를 부르는 방법을 통해 곧바로 사마타의 땅으로 돌아올 수 있는 법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법의 첫 번째 체험입니다. 

법의 두 번째 체험은 시작과 끝이 동일한 체험입니다. 미움이나 분노가 계속 이어지면 진리의 길이 아닙니다. 미움이나 분노가 일어날 때 이 미움과 분노는 원래부터 있었습니까? 아니면 없던 곳에서 나도 모르게 생겨났습니까? 곰곰이 살펴보면 미움과 분노는 원래 없었던 것입니다. 원래 인연 되지 않은 땅에서 생겨난 분노는 인연되지 않는 그 땅으로 반드시 사라집니다. 그런데 이 분노의 마음이 내 마음에 진짜 있는 것처럼 그것을 계속 붙잡고 있는 한 그 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진리의 등불을 밝히는 두 번째 방법은 시작과 끝이 같은 땅, 그 땅을 ‘반야심경’에서는 공(空)의 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또 부처님의 말씀으로는 “인연이 생겨난 곳에서 인연이 다하면 반드시 사라지게 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위빠사나(vipassanā)의 체험입니다. 

위빠사나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노력하지 않는 것은 중생의 습관입니다. 배고픔은 노력하지 않아도 배고픕니다. 생겨남과 소멸이 없는 삶이 중생의 삶이고 그것을 스스로 계속 살피지 않으면 중생의 삶은 내가 좋아하는 것, 가지고 싶은 것, 욕망하는 것에서 계속 추구하고 더 쌓으려고 합니다.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위빠사나의 길을 체험하려면 반드시 원력과 서원과 인욕과 같은 치열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중생의 세계에서는 체험할 수 없고 따라갈 수 없는 이 길을 스스로 행해야 합니다. 이것을 수행하고 실천하는 삶이 팔정도(八正道)의 삶입니다. 이렇게 열반(涅槃)을 얻기 위해서 팔정도의 길을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삶에서 실천하는 사람이 진정한 불자입니다. 

불교는 부처님을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법을 믿는 종교입니다. 중생의 길이 탐욕으로 멈출 수 없는 길이라면, 법의 길은 그것을 멈추는 체험입니다. 중생의 마음이 생겨나면 반드시 소멸하는 체험을 하는 그 길이 바로 법을 체험하는 방법입니다. 그것을 공부하고 체험하는 과정이 불교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5월17일 부산 여래선원에서 봉행된 ‘여여불교대학 입학식’에서 효산 스님이 설법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539호 / 2020년 5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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