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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근대 한국선 중흥조 경허 선사

기자명 고명석

“자유 자재함과 선적 통찰에 선풍 구름같이 일다”

31세 옛스승 뵈러가다 역병 만나 모든 것 부질없음 깨달아
제자인 만공, 혜월, 수월, 한암 등은 근현대 선의 대종장들
호서, 영호남 주유하며 수십년 정진하니 조선말 선풍 진작

서산 연암산 천장사가 올해 3월8일 지장암의 상량식을 봉행했다. 이곳은 경허성우 선사의 정신적 고향이자 보림처이다. 
서산 연암산 천장사가 올해 3월8일 지장암의 상량식을 봉행했다. 이곳은 경허성우 선사의 정신적 고향이자 보림처이다. 

근대 한국선의 중흥과 경허선사는 오버랩 된다. 서산대사의 등장으로 한국 선이 부흥의 조짐을 보였지만 조선 말기에 이르러 선원은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곳곳에 염불당이 자리잡고 있었다. 선리를 참구하는 수행자도 매우 드물었다. 말세적 분위기와 더불어 험하고 힘든 세상에서 선을 공부하기란 참으로 어렵다고 여긴 것이다. 경허는 굳은 원력으로 이러한 풍토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 결과 경상, 전라 주요 지역에서 선원이 개설되었다. 그의 제자로서 만공, 혜월, 수월, 한암 스님 등은 근현대 선의 대종장들이었다. 1920~30년대 선학원 운동으로 불교를 쇄신하고자 했던 것도 경허와 직간접적으로 닿아있는 스님들에 의해서다. 

경허성우(鏡虛惺牛, 1849~1912) 선사는 조선 말기 철종 1년에 전주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송(宋)이고 이름은 동욱(東旭)이었다.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모진 가난 속에서 의왕 청계사 계허(桂虛) 스님에게로 출가한다. 경허는 은사의 환속으로 계룡산 동학사로 간다. 거기서 그는 만화(萬化) 강백으로부터 불교 전반을 익히고 유교나 노자 장자까지 섭렵한다. 그 결과 24세의 나이에 강사의 길을 간다. 많은 학인들이 그에게로 몰려올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31세 되던 해 그는 옛 스승 계허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나 천안의 한 마을을 지나던 중 역병 콜레라와 마주친다. 콜레라가 퍼져 마을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죽음 앞에서 모골이 송연해지면서 두려움에 떤다. 죽음의 엄습은 그가 쌓아온 학문의 세계를 비롯한 모든 것을 부질없이 흩뜨린다. 그의 ‘참선곡’ 서두를 보자. 

“홀연히 생각하니 도시 몽중(都是夢中)이로다. 천만고(千萬古) 영웅호걸 북망산 무덤이요 / 부귀문장(富貴文章) 쓸데없다.
황천객을 면할소냐. / 오호라 이내 몸이 풀끝에 이슬이요, 바람 속에 등불이라.”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동학사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그고 화두 참구에 들어간다. 살을 에는 추위와 찌는 듯한 한여름 더위도, 모기와 빈대가 몸을 아프게 찔러도, 구렁이가 몸을 감는데도 개의치 않고 깊숙이 화두와 하나가 된다. 어느 날 “소가 돼도 콧구멍을 뚫을 데가 없다(爲牛則無穿鼻孔處)”는 말을 듣고 천지가 환해진다. 결박이 떨어져 나가 죽음에서 자유롭게 된 것이다. 호방함과 무애(无涯)로 대변되는 그의 삶이 열린 것이다. 그는 서산 연암산 천장암으로 향한다. 거기서 자신의 수행을 다시금 살피는 보림을 하며 깨달음을 재확인한다. 이윽고 개당설법을 하고 오도가(悟道歌)를 읊는다. 

“홀연히 고삐 뚫을 곳이 없다는 사람의 소리를 듣고 / 몰록 깨닫고 보니 삼천대천세계가 나의 집이네 /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들사람(野人) 일없어 태평가를 부르네.” 

그는 스승없이 깨달았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자신에게 의발을 전해줄 사람이 없었다.  텅 빈 우주에 홀로 빛나는 외로운 별이었다. 그는 대원력을 발하여 동체대비에 나서고 선적 통찰로 태산 같은 마음 씀을 강조한다. 그의 ‘참선곡’ 한 대목을 다시 보자.

“일체계행(一切戒行) 지켜 가면 천상인간 복수(福壽)하고 / 대원력을  발하여서 항수불학(恒隨佛學) 생각하고 / 동체대비 마음먹어 빈병걸인(貧病乞人) 괄시 말고 / 오온 색신(五溫色身) 생각하되 거품같이 관(觀)을 하고 바깥으로 역순 경계 몽중(夢中)으로 관찰하여 / 해태심을 내지 말고 허령(虛靈)한 이내 마음 허공과 같은 줄로 진실히 생각하여 / 팔풍오욕(八風五辱) 일체경계 부동한 이 마음을 태산같이 써나가세.”

이는 보살 만행과 무념(無念)이 서로 어우러져야 한다는 경허의 신념과도 잘 어우러진다. 어떤 생각에도 머물지 말고 보살의 길을 갈 것을 그는 중요히 여겼다. 경허는 20년을 호서지방의 천장사, 개심사, 부석사 등을 오가며 풍진에서 노닌다. 동지들을 모아 공부하고 싶었지만 역병도 계속 유행했고 민란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등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아 모든 것을 잊고 살았기 때문이다. 때가 왔음인지 그는 부처님 은혜를 갚고자 해인사로 향한다. 1899년 9월 해인사에 참선납자를 위해 수선사(修禪社)를 창건함에 따른 기문을 쓴다. 퇴설당에서 ‘함께 정혜를 닦아 도솔천에 태어나며 성불하기를 위한 결사문(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稧社文)’을 짓고 결사에 든다. 옛 선지식들의 결사의 정신을 이어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정혜결사에 들어간 것이다.

“우리가 동맹한 약속이란 무엇인가? 같이 정혜(定慧)를 닦고 같이 도솔천에서 나며 세세생생에 도반이 되어서 필경 함께 정각을 이루어 도력이 먼저 성취되는 이가 있으면 따라 오지 못한 자를 이끌어주기로 서약하며 이러한 맹서를 어기지 말자는 것입니다. 만약 견해가 같고, 수행을 같이 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승속(僧俗), 남녀(男女) 노소(老少), 현우(賢愚) 귀천(貴賤)을 묻지 않으며, 또한 친소 이합(親疎離合), 원근 선후(遠近 先後)를 묻지 말고, 모두 입참(入參)하도록 허락하겠습니다.”  

왜 도솔천인가? 당시 시대 분위기가 그랬다. 도솔정토 왕생이 더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미타 정토왕생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도솔천 왕생도 참선으로 도력을 성취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였다. 경허는 이러한 수선 가풍을 널리 펼치기 위해서 5년 동안 영호남지방을 주유한다. 해인사, 범어사, 송광사, 통도사, 화엄사, 천은사, 태안사, 실상사 백장암, 덕유산 송계암 등을 오가며 결사를 맺고 청규를 제정하여 선풍을 진작한다. ‘선문촬요(禪門撮要)’를 편찬하고 주옥같은 글을 짓는다. 그의 글은 불교전반을 꿰뚫는 자유 자재함과 선적 통찰로 가득하다. 인간의 근원적 고뇌와 그에 대한 연민, 시대의 증상도 새어나온다. 중요한 맥락은 그로 인해 사방에서 선원을 다투듯 개설하고 발심 납자들이 감화를 입어 구름같이 일어났다는 한암 스님의 언급이다.

고명석 불교사회연구소 연구원 kmss60@naver.com

 

[1539호 / 2020년 5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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