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2. 김후신의 ‘대쾌도(大快圖)’

기자명 손태호

취한 양반들 소란스런 움직임 필선만으로 살려내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있듯 예부터 음주가무 즐긴 우리 민족 
불교서 음주 금한 건 술 자체 나빠서 아닌 수행 방해 되기 때문
코로나19로 인해 생명·재산 피해 없도록 방역지침 꼭 지키길

김후신 作 ‘대쾌도(大快圖)’, 지본담채, 33.7×28.2㎝. 간송미술관.
김후신 作 ‘대쾌도(大快圖)’, 지본담채, 33.7×28.2㎝. 간송미술관.

방역당국과 의료진들의 활약으로 그동안 잠잠해지던 코로나19가 아쉽게도 클럽이나 노래방을 통해 급속히 확산되고 말았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계속 실천해야하는 마당에 밀접시설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방문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연락처를 제대로 남겨놓지 않아 애를 먹고 있다니 더욱 걱정이 됩니다. 연휴를 맞아 클럽을 방문한 젊은이들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창 혈기 왕성한 시기에 몇 달 동안 학교도 가지 못하고 집에만 있었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싶었을지 짐작됩니다. 미국이나 유럽, 일본의 젊은이들과 비교해보면 우리 청년들이 그동안 학교수업과 모임 등을 자제하고 거리두기 지침을 잘 따라주었습니다. 그러기에 클럽이나 노래방을 방문한 친구들을 일방적으로 나무랄 수만은 없습니다. 다만 조금만 더 참아주지 못한 점이 아쉬울 뿐입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그림이 그려져 있을 만큼 언제나 술과 춤을 즐기는 음주가무의 나라입니다. 만나고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여 카페와 술집이 인구대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이기도 합니다. 또 흥도 넘쳐 농사일 중 막걸리 한 잔 마시면 노래를 부르고 요즘은 법으로 금지되었지만 관광버스를 타고 이동 중에도 좁은 의자 사이에서 도착할 때까지 춤추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옛 그림에서도 음주가무를 즐기는 모습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서 오늘 감상해볼 그림은 조선 후기 화가인 김후신의 ‘대쾌도(大快圖)’입니다. 

그림의 구도는 하단의 약간 왼쪽으로 인물을 배치하고 상단 우측에 세 그루 나무를 배치하였습니다. 나무 뒤로는 개울이 있어 단조로움을 피했고 그 뒤로 두 그루의 나무가 더 있어 깊이를 줍니다. 나무는 윗부분을 잘라낸 듯 표현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 아래 수간(樹幹)을 집중시키기 위함입니다. 수간에는 큰 타원형의 옹이가 있는데 마치 술 취해 달려가는 인물들을 보고 크게 놀란 것처럼 보입니다. 나무만으로는 숲을 표현하는데 부족했는지 다양한 길이의 점을 찍어 나무와 개울 주변에 수풀을 넉넉히 표현했습니다. 

왼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인물들은 모두 세 명처럼 보이지만 총 네 명의 인물이 있습니다. 갓은 어디다 팽개치고 입을 벌린 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표정의 술에 취한 젊은 인물. 그 인물을 양쪽에서 끌고 부축하는 두 인물, 그리고 머리를 숙여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맨 뒤에서 힘껏 밀고 있는 인물까지 총 네 명입니다. 갓을 쓰고 도포를 입었으니 어엿한 양반들인데 얼마나 거하게 마셨던지 서로 엉켜 소란스럽게 움직이고 있는데 가장 많이 취한 인물은 입을 벌려 고래고래 소리도 치고 있습니다. 몇 개의 필선만으로 인물의 표정을 잘 살렸고 복장의 율동감도 잘 표현하여 화가의 기량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의 작가 이재(彛齋) 김후신(金厚臣)은 화원 김희겸(金喜謙)의 아들로 역시 도화서 화원으로 추정되는데 생몰 년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산수화와 화조화 몇몇 작품이 전해지고 있으며 풍속화는 이 그림이 유일합니다. 아버지 김희겸의 관직 생활년도로 볼 때 김후신은 정조 연간에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조 시절은 강력한 금주령을 시행하고 어긴 자를 참수까지 했던 영조 시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정조는 금주령이 실제 지켜지기 힘들고 괜히 백성들만 괴롭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술에 관대했고 신하들과 술자리도 좋아했습니다. 성균관 유생들과 술자리에서는 ‘불취무귀(不醉無歸), 술에 취하지 않으면 귀가할 수 없다’고 농담하기도 했으니 술 마시는 것이 사회적으로 아주 조심해야하는 시절은 아닙니다. 그래서 술에 취한 인물을 데리고 황급히 어디론가 도망가는 모습은 김후신이 활약한 시절과는 조금 맞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은 ‘허허 예전에 이랬었지’ 하며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을 것이니 이는 풍속화의 본질에 충실한 그림인 셈입니다. 그림 옆에 방서는 근대 서예의 대가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의 글씨입니다.

현대의 성인들이라면 이런 취한자의 모습이 그렇게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술자리에서 자기 주량보다 과하게 마셔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집에 간신히 가본 경험도 한두 번쯤 있을 것입니다. 좀 창피스러운 얘기지만 예전 저도 회사 동료 3명에게 업혀 귀가한 적도 있고 술에 취해 길에서 잠들었다가 깨어난 적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원래부터 음주가무를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경주 안압지에서 통일신라시대 14면 목제주량구가 발견되어 요즘 대학생들이 많이 하는 술 먹기 게임이 통일신라시대에도 있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사발에 술을 가득 담고 가위 바위 보를 하여 진 팀이 나눠 마시는 ‘의리게임’은 조선시대 관청에서 주로 하던 ‘회배(回盃)’에 그 뿌리가 있습니다. 폭탄주도 조선시대에는 막걸리와 소주를 섞어 마시는 ‘혼돈주’가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술이 거나해지면 양반들은 기생들의 춤을 감상하거나 양반도 함께 춤을 추곤 하였으며 농부들도 힘든 농사일 중에서도 권주가를 부르고 풍물에 맞춰 춤을 추웠으니 음주가무를 정말 좋아하는 민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술에 관대하다고 해서 과한 음주까지 권장한 것은 아닙니다. 다산 정약용은 “참으로 술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다. 소처럼 마시는 사람들은 입술과 혀를 적시기도 전에 직접 목구멍으로 넣는데 그래서야 무슨 맛이 있겠느냐? 술을 마시는 정취는 살짝 취하는 데 있는 것이지 얼굴이 붉은 귀신처럼 되고 토악질을 하고 잠에 곯아떨어져 버린다면 무슨 정취가 있겠느냐”라며 과음을 경계하였습니다. 또 70%정도 술이 차면 흘러내리는 ‘계영배(戒盈杯)’를 사용하는 선비들도 있었습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음주를 엄격히 금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술 자체가 안 좋아서라기 보다는 술로 인해 승려의 수행에 방해가 되거나 타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까 염려해서입니다. 지금도 클럽이나 노래방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코로나 감염이 확산되기 취약한 구조이기에 자제와 조심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득이 이용한다면 방역지침을 꼭 지켜야합니다. 답답한 마음 십분 이해하나 조금만 더 참고 인내하여 코로나로 인해 더 이상 귀중한 생명과 재산상의 피해를 입는 분들이 없어지길 바랍니다.

손태호 동양미술작가, 인더스투어 대표 thson68@hanmail.net

 

[1541호 / 2020년 6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