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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29대 총무원장 고산 스님-하

‘98년 종단사태’ 안정시켰지만 법원 판결로 10개월만에 사퇴

1948년 동산 스님 은사로 수계…선·교·율 해박한 수행자로 성장
총무원장 취임 이후 종단 쇄신 착수…이웃종교·남북교류에 매진
1999년 ‘총무원장 부존재 소송’ 패소…재선거 포기하고 물러나

쌍계총림 방장으로 추대된 고산 스님이 2013년 9월13일 봉행된 방장승좌고불법회에서 전강제자 덕민 스님으로부터 주장자를 건네받고 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쌍계총림 방장으로 추대된 고산 스님이 2013년 9월13일 봉행된 방장승좌고불법회에서 전강제자 덕민 스님으로부터 주장자를 건네받고 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나는 한번 하고자 하는 일은 그 누가 반대해도 하고 마는 성정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출현해서 못하게 한다면 그만두지, 그렇지 않고는 지금까지 중도에 폐한 일은 없었다. 이러한 의지로 강사와 법사와 포교사와 율사와 선사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지리산의 무쇠소’, 조계종출판사)

조계종 제29대 총무원장 고산 스님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혔듯 평생 수행자로서 강직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 인물이었다. 옳다고 믿는 일에는 물러섬이 없었고, 부처님 법에 어긋나는 일이라 여길 때는 단호히 거부했다. 1999년 총무원장 재선거를 거부하고 스스로 물러선 것도 이런 소신 때문일 수 있었다. 

‘지리산의 무쇠소’에 따르면 고산 스님은 1933년 12월9일(음력) 경남 울주군에서 태어났다. 스님들과 의형제를 맺을 만큼 신심 깊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사찰을 찾는 일이 잦으면서 자연스럽게 불연을 키울 수 있었다. 스님의 출가인연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찾아왔다. ‘절에 가서 공부할 생각이 없느냐’는 부친의 권유에 따라 함께 범어사로 향했다. 그곳에는 통합종단조계종 출범 이전 종정을 역임한 동산 스님이 조실로 주석하고 있었다. 

동산 스님과 사제의 연을 맺은 스님은 이때부터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예불과 대중공양을 준비하고, 틈틈이 염불과 의식을 익히다보면 밤 9시가 훌쩍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어린 행자가 감당하기엔 힘든 일과였지만, 스님은 묵묵히 견뎌냈다. 그러길 3년, 스님은 1948년 3월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이때 받은 법명이 혜원이었다. 

출가수행자의 길에 들어선 스님의 삶은 치열했다. 범어사, 해인사, 직지사, 청암사 선원 등에서 화두를 붙잡고 정진하면서도 부처님 경전과 율장을 놓지 않았다. 이 무렵 ‘교외별전’ ‘불립문자’를 내세우며 부처님 경전 읽는 것을 등한시하는 수행풍토였지만, 스님은 이를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스님은 ‘부처님 일대시교를 모두 배우겠다’는 원력으로 경전을 읽어나갔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가 부처님의 평생 행적과 진리의 말씀을 몰라서는 안 된다’는 게 스님의 지론이었다. 이는 1961년 스님이 20대 나이에 대강백 고봉 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고, 1972년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만화·동산 스님의 계맥을 이은 석암 스님으로부터 전통계맥을 전수 받을 수 있었던 배경이 됐다. 
 

스님은 수행의 과정에서도 전법과 사찰불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72년 서울 조계사 주지를 맡아 처음으로 불교합창단을 창설하는 등 불교대중화에 앞장섰고, 1975년 폐사에 가깝던 쌍계사 주지를 맡아 대대적인 불사에 착수하면서 교구본사로서의 사격을 갖췄다. 부산 혜원정사, 부천 석왕사를 창건해 도심포교의 토대를 닦았으며, 통영 연화사에도 부처님 도량을 세워 낙후된 지역에 불연의 씨앗을 심었다. 스님이 1998년 종단사태로 혼란한 상황에서 많은 지지를 받으며 29대 총무원장에 선출될 수 있었던 것도 수행과 포교에 있어 남다른 행적 때문일 수 있었다.

고산 스님의 취임법회는 1999년 1월10일 서울 조계사에서 열렸다. ‘한겨레신문(1999년 1월11일자)’에 따르면 이날 법회에는 원로의원과 23개 교구본사주지, 태고종·천태종 등 8개 종단 총무원장을 비롯한 스님과 신도 2000여명이 참석했다. 이는 고산 스님이 정화개혁회의와의 세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방증했다. 김대중 대통령도 이례적으로 축하메시지를 보내 “고산 신임총무원장이 조계종단의 화합을 이루는 중심이 되고 한국불교의 빛나는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는 큰 기둥으로서 역할을 다해 주리라 믿는다”고 고산 스님에게 힘을 실었다. 그러나 종단 안정과 화합은 정화개혁회의 측과의 갈등을 어떻게 수습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이 무렵 공권력에 의해 총무원 청사에서 물러난 정화개혁회의 측은 1월6일 정영 스님(원로의원, 공주 갑사 주지)을 새 총무원장으로 선출한 상태였다. 서울 종로 서흥빌딩 10층에 별도의 총무원 간판도 내걸었다. 

고산 스님은 총무원장 취임과 동시에 통도사를 방문해 월하 스님과 만남을 시도하는 등 정화개혁회의 측에 꾸준히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다. 그러나 양측의 만남이 번번이 무산되면서 갈등의 골을 메우기가 쉽지 않음을 드러냈다. 그나마 월하 스님이 1월26일 “종단 운영방침대로 순응하겠다”며 유감성명을 발표하면서 정화개혁회의 측과 선을 그은 것은 성과였다. 

이런 가운데 고산 스님은 혁신안을 발표하면서 종단 운영의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했다. ‘법보신문(1999년 2월17일자)’에 따르면 고산 스님은 2월10일 기자회견을 열어 종무계획을 발표하고 “1999년은 수행자의 본분을 지키는 해가 되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 초발심으로 돌아가 청정승가상을 구현함으로써 실추된 종단 위상을 회복하겠다는 의미였다. 이를 위해 출가·열반절 기간 동안 전국 사찰에서 ‘참회와 자정을 위한 순회법회’를 열고, 각 기관마다 청규를 새롭게 정하도록 했다. 스님들을 위한 종합복지대책도 마련하고 스님과 신도에 대한 교육 내실화를 기하는 방안도 추진했다. 분규의 상징이 된 총무원 청사를 허물고 지상3층, 지하2층 규모의 새 청사를 짓겠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고산 스님은 남북 불교교류에도 착수했다. 이 무렵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대북 햇볕정책’으로 남북 관계는 크게 개선됐다. 이런 분위기에 발맞춰 조계종은 남북분단의 상징인 금강산에 남북불자들의 원력을 모아 신계사를 복원하겠다는 계획을 마련했다. 이를 위해 1999년 3월 중국 베이징에서 심상진 조선불교도연맹 위원장 등과 만나 신계사 복원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를 이끌어냈고, 그해 6월2~5일 스님과 신도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금강산 순례도 진행했다. 고산 스님은 금강산 순례법회에서 “늦어도 가을부터 신계사 복원 설계를 마무리 하고 공사에 착수할 것”(동아일보, 1999년 6월8일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스님은 이웃종교계와의 화합에도 앞장섰다. ‘한겨레신문(1999년 5월8일자)’에 따르면 고산 스님은 5월8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를 방문했다. 조계종 총무원장이 교회협을 방문한 것은 1924년 창립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해 6월14일에는 전북 익산 원불교 총부도 방문해 원불교의 한국불교종단협의회 가입을 권유했다. 이 역시 조계종 총무원장으로서는 처음으로, 그동안 한 뿌리이면서도 서먹한 관계에 있던 원불교에 화해를 시도한 것으로 평가됐다. 종교화합을 위한 고산 스님의 광폭 행보는 세간에서도 큰 관심을 불러 모았다. 이에 대해 고산 스님은 훗날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1999년 12월4일자)에서 ‘용서를 비는 사람이 되지 말고, 부디 용서하는 사람이 되라’는 자신의 좌우명을 소개하면서 “불교인들이 수행도 중요하지만, (이웃종교의) 장점을 본받아야 한다”며 “문을 두드리면 열리기 마련이다. 서로 왕래하고 잘 지내면 하나가 되는 것”이라며 종교화합을 추진한 배경을 설명하기도 했다.  

고산 스님은 이후 자신의 약속대로 종단 발전방안을 착실히 이행해 나갔다. 서울 조계사 재정을 처음으로 공개한 데 이어 그해 7월19일 ‘화합과 공생의 자비공동체 구현을 위한 중장기 발전계획’을 발표해 승려노후보장을 위한 요양원 건립, 승가교육제도개혁안, 불교중앙박물관 건립, 1사찰 1복지시설 운영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고산 스님의 혁신안이 속속 추진되면서 조계종도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해 10월1일 법원으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들면서 조계종은 다시 혼돈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경향신문(1999년 10월2일자)’에 따르면 서울지법 민사합의42부는 이날 정화개혁회의 측 총무원장 정영 스님이 고산 스님을 상대로 낸 ‘총무원장직 부존재 확인 청구’ 소송에서 “고산 스님은 총무원장 자격이 없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1998년 12월 열린 임시중앙종회는 7일 전에 소집공고를 하지 않는 등 절차상 하자가 있어 적법한 회의라고 볼 수 없다”며 “이 같은 임시중앙종회의 결의로 개정된 총무원장 선거법에 따른 고산 스님의 당선은 효력이 없다”고 밝혔다. 법원은 다음날 ‘총무원장 직무정지 가처분’신청도 받아들이고, 직무대행으로 정화개혁회의 측 도견 스님을 선임했다. 

법원의 판결은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정화개혁회의 측은 “사필귀정”이라며 환영의 뜻을 밝혔고, 총무원 측은 ‘법통수호대책위’를 구성해 “법원의 판결은 종헌질서를 유린한 법난”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양측의 물리적 충돌은 불가피해졌다. 

총무원 측은 즉각 항소의 뜻을 밝혔지만, 이럴 경우 법원이 임명한 도견 스님을 직무대행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어 자칫 정화개혁회의 측에 총무원을 넘겨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반면 항소를 포기하고 법원의 1심 판결을 수용하면 고산 스님은 총무원장에서 물러나야 하지만, 직무대행자인 도견 스님의 활동도 정지될 수 있었다. 법원이 가처분 결정을 인용하면서 직무대행 도견 스님의 활동기한을 “총무원장 부존재확인 소송 확정 때까지”로 못 박았기 때문이다. 결국 총무원 측은 10월4일 재판부에 ‘항소포기서’를 제출했다.(한겨레신문, 1999년 10월6일자) 이로써 정화개혁회의 측이 제기한 ‘총무원장직 부존재 확인청구’소송은 1심 판결로 확정됐다. 총무원 측은 총무원장 유고에 따른 직무대행으로 총무원 총무부장 원택 스님을 선임하고, 문제가 됐던 선거법을 개정해 조속한 시일 내에 30대 총무원장 선거를 실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법원 판결로 재기를 노렸던 정화개혁회의 측은 반발했다. 10월11일 도견 스님 등 정화개혁회의 측 스님과 신도 100여명이 조계사 진입을 시도하면서 이를 막는 총무원 측과 충돌이 발생했다. 이틀에 걸친 양측의 대치로 10여명이 부상을 입는 등 유혈사태가 발생해 조계종은 다시 세간의 따가운 비판에 내몰렸다. 

이런 혼란 속에서 조계종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30대 총무원장 선거일을 11월15일로 확정하면서 조계종은 빠르게 선거체제로 전환됐다. 당시 종단 안팎에서는 “법원 판결로 상처 입은 종단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고산 스님을 재추대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경향신문, 10월15일자) 실제 고산 스님은 10월29일 “법통수호를 위해 십자가를 지겠다”(한겨레신문, 10월30일자)며 사실상 출마를 선언했다. 고산 스님의 출마는 단일후보에 따른 추대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후보등록이 시작되자, 지선 스님이 출마를 선언했다. 여기에 고산 스님의 지지그룹으로 여겨졌던 ‘육화회(직지사단)’가 지선 스님 지지로 돌아서면서 ‘고산 스님 재추대론’은 무산됐다. 훗날 고산 스님의 상좌인 영담 스님이 주축이 된 ‘보림회’가 ‘육화회’ 출신의 ‘무량회’와 오랜 기간 대립각을 세웠던 것도 이런 정치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시각이 있다. 

고산 스님은 11월5일 기자회견을 열어 “산중으로 돌아가 부처님 전에 발원하고 참회하는 것으로 불제자의 도리를 다 하겠다”면서 총무원장 불출마를 선언했다. 고산 스님의 불출마선언은 종단 안팎에서 큰 충격을 던졌다. 당시 고산 스님은 가장 유력한 총무원장 후보였다. 이에 대해 고산 스님은 훗날 “애초에 경선까지 하며 그 자리를 계속할 생각이 없었기에 열의가 있는 젊은 사람에게 밀어준다는 생각으로 그만뒀다”며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 생각 때문에 망가지는 것”(한겨레신문, 1999년 12월4일자)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고산 스님이 불출마한 가운데 11월15일 진행된 제30대 총무원장 선거에서는 후보등록 막판 출마를 선언한 정대 스님이 당선됐다.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고산 스님은 통영 연화사로 돌아와 자신이 공언한대로 수행과 포교에 매진했다. 전국 사찰에서 보살계와 특별법회를 열어 부처님 가르침을 전했다. 2006년 원로의원, 2008년 조계종 전계대화상에 이어 2013년 9월 쌍계총림 초대 방장에 추대돼 후학들을 지도해 오고 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542호 / 2020년 6월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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