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30대 총무원장 정대 스님
37. 30대 총무원장 정대 스님
  • 권오영 기자
  • 승인 2020.07.03 19:32
  • 호수 15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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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정치 수완으로 종단 현안 해결한 ‘행정 달인’

완주 위봉사서 전강 스님 만나 출가…1963년 용화사서 수계
총무원 사회·재무·총무부장 등 역임…8선 중앙종회의원 지내
중앙승가대 이전·역사문화기념관 착공 등 종단 숙원사업 해결
정대 스님은 2002년 종단사태로 얼룩진 총무원 청사를 대신할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을 착공했다. 출처=‘천지는 꿈꾸는 집이어니’

1999년 11월15일, 조계종 제30대 총무원장 선거에서 정대 스님이 선출됐다. 이날 정대 스님은 선거인단 318명 중 307명이 참석한 가운데 166표(54%)를 획득했다. 134표(44%)를 얻은 지선 스님과는 32표차였다. 선거에 앞서 종단 안팎에서는 지선 스님의 우세를 점치는 분위기였다. 유력한 후보였던 고산 스님이 불출마한 데다 중앙종회 최대계파였던 ‘육화회(직지사단)’와 실천불교전국승가회를 중심으로 한 ‘일여회(훗날 무차회)’가 지선 스님 지지를 표명한 상태였다. 육화회와 일여회 소속 종회의원과 교구본사주지 60여명은 11월5일 오후 서울 시내 한 음식점에서 지선 스님 추대모임을 갖고 공동 선거대책본부를 꾸리기도 했다.(한겨레신문, 1999년 11월6일자) 반면 정대 스님은 30대 총무원장 선거가 본격화될 때까지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다. 일부 언론에서 후보로 거론되기는 했지만 출마로 이어질지 불투명했다. 심지어 정대 스님은 지선 후보선거대책위원회에서 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했다.(연합뉴스, 1999년 11월7일자) 

정대 스님을 출마로 이끈 것은 월주 스님의 정치적 기반이자 선우도량 회원들이 주축이 된 ‘청림회(훗날 금강회)’와 영담 스님이 중심이 된 범어문중의 ‘무등회(훗날 보림회)’였다. 이 무렵 청림회와 일여회는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서 있었다. 두 계파의 핵심세력들은 1994년 종단개혁과 월주 총무원장 체제를 이끄는 등 돈독한 관계였지만 실천승가회가 월주 스님의 종단운영에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실천승가회가 1998년 종단사태를 불러온 월주 스님의 3선에 대해 노골적인 반대 입장을 보이면서 감정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이런 가운데 지선 스님의 출마로 ‘고산 스님 재추대론’이 무산되고, 고산 스님의 출마포기로 이어지면서 무등회의 미움도 샀다. 결국 일여회에 대한 반감은 청림회와 무등회의 공통분모가 됐다. 이들은 후보등록 막판 정대 스님을 찾아가 후보수락을 이끌어냈다. 

정대 스님의 출마로 지선 스님의 대세론은 급격히 흔들렸다. 정대 스님은 육화회 소속 스님들과 친분이 두터운 데다 정치적 수완이 뛰어나 지선 스님을 지지했던 상당수 스님들의 이탈을 이끌어냈다. 정대 스님이 짧은 선거운동기간에도 예상을 깨고 큰 표 차로 당선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했다. 

정대 스님의 당선으로 끝난 30대 총무원장 선거는 이후 종단 정치지형의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까지 총무원장 선거에서 후보가 속한 문중과 인물평이 어떠냐가 중요한 변수였다면, 30대 총무원장 선거부터는 어떤 계파로부터 지원을 받느냐가 당락을 좌우했다. 각 계파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종책모임이 종단정치의 중심으로 등장했고, 중앙종회 내에서 ‘여야’의 개념이 뚜렷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종단 정치권력구조의 흐름과 과제-종회를 중심으로’, 법안 스님, 2014년)

이런 정치적 배경에서 30대 총무원장에 취임한 정대 스님은 처음부터 난관이 예상됐다. 그러나 정대 스님은 탁월한 정치적 수완으로 종단 현안을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이는 스님의 오랜 종무행정 경륜이 배경이 됐다. 

정대 스님

정대 스님 법문집 ‘천지는 꿈꾸는 집이어니’(2008년, 초당)에 따르면 스님은 1937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다. 전북대 영문과를 졸업한 스님은 건강이 좋지 않아 찾았던 완주 위봉사에서 당대 선지식 전강 스님을 만나 출가했다. 1년여간 행자생활을 마친 스님은 1963년 인천 용화사에서 전강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이후 수원 용주사 중앙선원을 시작으로 도봉산 망월사, 덕숭산 수덕사선원 등에서 용맹정진했고, 1967년 통도사에서 월하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스승으로부터 ‘판치생모(板齒生毛)’라는 화두를 받고, 한번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먹고 자는 일도 잊으며 정진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3년여의 치열한 정진 끝에 스님은 ‘중생과 부처가 다름이 없고, 마음 밖에 부처도 중생도 없다’는 견성의 경지를 체험했다. 

스님은 수행과정에서도 불사와 포교에 매진했다. 1969년 여주 신륵사 주지를 맡은 이후 14년간 극락보전, 구룡루, 조사당 등의 복원불사를 진행하면서 사찰의 면모를 일신했다. 용주사 주지 때는 중앙선원을 다시 열어 스승의 유지를 받들었다. 1973년 총무원 사회국장에 발탁된 이래 재정국장, 규정국장 등을 잇따라 맡으면서 종무행정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듬해 총무원 사회부장에 취임한 이후 1987년까지 사회부장 2회, 재무부장 4회, 총무부장 2회 역임하면서 종단의 재정 관리와 종무행정의 기틀을 다졌다. 정대 스님이 ‘행정의 달인’이라는 별칭을 얻은 것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됐다. 1975년 4대 중앙종회의원으로 선출된 이후 6대를 제외하고 12대까지 빠짐없이 종회의원에 선출됐다. 그 과정에서 중앙종회 부의장과 의장을 역임하면서 종단 정치의 중심에 섰다. 

1999년 11월23일 서울 조계사에서 고불식으로 총무원장으로서 첫발을 내디딘 정대 스님은 이튿날 기자회견을 열어 종단운영에 대한 계획을 밝혔다. 스님은 94년과 98년 종단사태로 멸빈 징계를 받은 스님들에 대한 사면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정부도 미전향 장기수를 풀어주는 마당에 자비종단을 자처하는 조계종이 징계자들을 묶어놓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종단 안정과 화합을 위해서는 멸빈자 사면이 전제돼야 한다”(연합뉴스, 1999년 11월24일자)는 이유에서였다. 이를 위해 2000년 3월 146회 임시중앙종회를 앞두고 종헌개정안을 발의했다. 종헌부칙을 신설해 “통합종단 이후 징계자 중 참회·자숙하는 자를 대상으로 행해지는 징계의 사면, 경감, 복권은 종헌 128조의 단서조항(멸빈자는 사면대상에서 제외한다)을 적용하지 않는다”고 명시해 멸빈자 사면에 대한 길을 텄다. 다만 멸빈자는 승적을 복원할 수 있지만 일체의 공직에 취임할 수 없도록 단서조항을 담았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멸빈자 사면에 대한 중앙종회의 반응은 냉랭했다. 중앙종회는 “종도들의 여론 수렴이 우선 필요하다”며 설문조사, 공청회 등을 이유로 차일피일 미뤘다. 중앙종회는 그해 연말까지 멸빈자 사면에 대한 이렇다 할 논의를 진행하지 않았다. 결국 정대 스님이 취임초기부터 의욕적으로 추진한 멸빈자 사면은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멸빈자 사면은 무산됐지만, 정대 스님은 영축총림 통도사와의 해묵은 갈등을 풀어냈다. 총무원과 통도사의 갈등은 영축총림 방장 월하 스님이 1998년 월주 스님의 3선 논란으로 촉발된 종단사태에서 정화개혁회의를 지지하면서 비롯됐다. 이후 정화개혁회의 측이 총무원을 점거하고 대규모 폭력사태가 발생하는 분규로 치달았다. 중앙종회는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1999년 7월26일 141회 임시회에서 영축총림 해제를 결의하고 통도사 말사인 울산 문수사, 해남사 및 창녕 관룡사를 직영사찰로 지정했다. 월하 스님도 영축총림 방장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자 통도사는 그해 8월2일 울산지법에 ‘영축총림 해제결의 등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통도사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총림해제 등의 결의 및 처분은 신청인의 지위나 종교 활동에 근본적인 제약을 가하는 것으로 그에 대한 근거규정이 명백하지 않다”며 ‘영축총림 해제’ 효력정지를 결정했다.(법보신문, 1999년 9월1일자) 총무원과 통도사 측은 긴 법정공방을 이어갔다.

그러나 정대 스님이 취임과 함께 사면 논의에 불을 지피면서 영축총림과의 갈등은 점차 풀려나갔다. 2000년 3월14일 중앙종회는 146회 임시회를 열어 종단화합을 위해 총림에서 해제됐던 통도사를 다시 총림으로 지정했으며, 문수사·해남사·관룡사에 대해서도 직영사찰에서 해제했다. 통도사 대중들의 요구를 수용해 2001년 9월4일 151회 임시회에서 월하 스님을 영축총림 방장으로 재추대하기도 했다. 이로써 1998·1999년 종단사태로 촉발된 총무원과 통도사 측의 오랜 갈등은 사실상 봉합됐다.

정대 스님은 전임 총무원장 고산 스님이 물꼬를 튼 남북불교교류를 활성화하는 데도 기여했다. 2000년 5월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박태화 조선불교도연맹 위원장에게 봉축메시지를 전달했고, 북측도 이에 화답했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남북 공동발원문을 채택한 적은 있었지만, 조계종과 조불련 대표가 봉축메시지를 교환한 것은 처음으로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스님은 그해 6월 ‘민족공동체추진본부(민추본)’도 발족했다. 민추본은 총무원장 직속기구로 남북교류 및 통일운동을 전담하는 조직이었다. 남북불교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정대 스님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였다. 비록 정부의 반대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달라이라마 방한’도 정대 스님이 재임기간 관심을 둔 사안이었다. 

정대 스님은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정치권과 갈등을 빚는 일도 있었다. ‘동아일보(2001년 1월19일자)’에 따르면 정대 스님은 이날 김중권 민주당 대표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겨냥해 “그 사람이 집권하면 단군 이래 희대의 보복정치가 난무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말해 파문이 일었다. 이 무렵 정치권에서는 1997년 대선 때 안기부 돈이 선거자금으로 유입된 의혹과 관련해 여야간 공방이 치열했다. 한나라당에서는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정치보복”이라는 입장이었다. 정대 스님의 발언과 관련해 여야 정치권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민주당은 “큰스님의 말씀은 촌철살인이었다”고 평했고, 한나라당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직접적인 대응은 자제하는 분위기였다.(동아일보, 2001년 1월20일자) 대신 이 총재는 이일을 계기로 사찰을 찾는 빈도를 늘렸고, 불교계에 호감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럴수록 여권도 조계종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비록 구설수에 오르긴 했지만 정대 스님의 직설화법은 정치권이 불교계를 주목하도록 하는 결과를 낳았다. 

정대 스님은 종단의 숙원사업을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논란이 컸던 중앙승가대 김포 학사 이전 문제를 중앙종회와의 협의를 통해 풀어나갔고, 2001년 8월5일 동국대 동국역경원이 36년 만에 고려대장경을 318권의 한글대장경으로 완역한 기념법회도 봉행했다. 

정대 스님은 선학원과의 해묵은 갈등도 풀어냈다. 스님은 2002년 3월5일 선학원 이사장 정일 스님과 만나, ‘조계종-선학원 정상화 합의문’을 체결했다. 합의문에 따르면 선학원은 정관에서 ‘조계종의 종지종통을 봉대한다’는 문구를 삽입하고, 임원도 조계종 승려 중 덕망 높은 스님을 선출하기로 했다. 대신 조계종은 선학원 스님들에 대한 제재를 해제하기로 했다.(법보신문, 2002년 3월13일자) 이에 따라 1978년 선학원이 조계종 스님을 임원에서 배제하는 내용으로 정관을 개정하면서 비롯된 선학원과 조계종의 갈등이 봉합됐다. 그해 4월30일에는 종단분규로 얼룩진 총무원 청사를 허물고 그 자리에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을 건립하는 기공식을 진행하기도 했다. 

정대 스님의 재임기간에는 정부와 지자체의 대규모 토목공사와 개발에 따른 환경문제가 화두가 됐다. 2002년 서울외곽순환도로 북한산 관통터널과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터널 구간은 불교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공사구간에 인접한 사찰과 환경단체는 수행환경에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 있고, 생태계 교란 등 생태환경에도 적지 않은 피해를 줄 수 있다면서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정대 스님은 2002년 3월5일 ‘정부의 무분별한 개발에 따른 생태계 및 사찰환경 파괴를 규탄’하는 범불교도 결의대회를 서울 조계사에서 개최하면서 불교계의 의지를 모았다. 이 문제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여야 후보들에게도 관심사가 됐다. 그해 연말 대선을 앞두고 여야 후보로부터 ‘북한산 관통도 및 천성산 관통터널 백지화’라는 공약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런 가운데 동국대이사장 녹원 스님이 그해 11월29일 기자간담회를 열어 “12월20일부로 이사장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대신 “정대 스님이 이사장 직무대행을 맡아 달라”고 요청해 큰 파장이 일었다. 당시 녹원 스님은 이사장 임기가 1년여 남은 상태였지만 이사선임과 총장선출, 일산불교병원 개원 등의 문제로 조계종과 갈등을 겪어온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법인 직원의 공금횡령사건까지 불거지면서 녹원 스님은 이사회로부터 사퇴압박을 받았다.(연합뉴스, 2002년 11월29일자) 때문에 녹원 스님은 정대 스님과 후임문제를 두고 논의를 해오고 있었다.(법보신문, 12월4일자) 그러나 정대 스님이 이사장대행을 맡는 것은 조계종 종헌에 명시된 겸직금지조항을 위반하는 것이어서 총무원장에서 물러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정대 스님은 동국대이사장을 선택했다. 스님은 12월9일 기자간담회를 열어 “종단 안정을 위해 총무원장으로 왔는데 이제 종단이 안정됐지만, 동국대 사정이 어려워 와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면서 “원장직을 사임하고 동국학원으로 자리를 옮기겠다”고 공식 밝혔다. 동국대이사회는 그해 12월23일 정대 스님을 새 이사장으로 선출했다. 정대 스님은 이듬해 1월15일 총무원장에서 퇴임했다. 

동국대이사장으로 취임한 정대 스님은 학교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갑작스런 건강악화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03년 11월18일 관악산 삼막사에서 세수 67세, 법랍 42년으로 입적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544호 / 2020년 7월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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