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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31대 총무원장 법장 스님-상

탁월한 친화력·리더십 강점…첫 비구니 부장 임명 등 파격행보

출가한 사촌 형님 모습 동경하다 1960년 원담스님 은사로 출가
1994년 ‘생명공양회’ 본부장 맡아 불교계 장기기증운동 싹틔워
2003년 총무원장 당선…사회적 문제 적극 나서 불교 위상 제고

31대 총무원 집행부를 구성한 법장 스님은 2003년 3월7일 종정 법전 스님을 예방했다. 법장 스님의 오른쪽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문화부장 탁연, 호법부장 현진, 총무부장 성관, 재무부장 태연, 종정예경실장 선각, 사회부장 미산, 해인사 주지 세민 스님 . ‘인곡 법장 대종사 행장 화보집’
31대 총무원 집행부를 구성한 법장 스님은 2003년 3월7일 종정 법전 스님을 예방했다. 법장 스님의 오른쪽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문화부장 탁연, 호법부장 현진, 총무부장 성관, 재무부장 태연, 종정예경실장 선각, 사회부장 미산, 해인사 주지 세민 스님 . ‘인곡 법장 대종사 행장 화보집’

2005년 9월11일 오전 조계종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이날 새벽 3시50분 총무원장 법장 스님이 심장수술 후유증으로 입적했다. 현직 총무원장의 입적은 1971년 청담 스님과 1979년 경산 스님(개운사·조계사 총무원 분규 당시 조계사측 총무원장)에 이어 세 번째였다. 

법장 스님의 입적은 뜻밖이었다. 9월5일 서울대병원에 입원할 때만 해도 간단한 심혈관 수술로 여겼고, 수술경과도 좋아 일반병실에서 회복기를 맞고 있는 상태였다. 총무원 사서실은 “일주일 후 종무에 복귀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연합뉴스, 2005년 9월9일자) 그랬기에 조계종 총무원은 그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법장 스님은 마지막 가는 길도 파격이었다. ‘연합뉴스(2005년 9월12일자)’에 따르면 조계종 장의위원회는 9월12일 “장기기증운동단체인 생명나눔실천본부를 이끈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스님의 법구를 동국대 일산병원에 기증키로 했다”고 밝혔다. 스님은 1994년 3월24일 생명나눔실천본부에 ‘장기기증 및 사후시신 기증’을 서약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영결식 이후 수덕사에서 열릴 다비식도 취소됐다. 큰스님의 영결식에서 다비가 진행되지 않는 것은 종단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마지막 법구마저 병원에 기증한 스님의 무소유 실천행은 세간의 큰 관심을 모았다. 장례기간 서울 조계사에 마련된 ‘생명나눔실천본부’ 접수처에는 스님과 불자, 시민들의 ‘장기기증 및 사후시신 기증 서약’이 줄을 이었다. 

법장 스님의 영결식은 9월15일 조계사에서 3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종단장으로 엄수됐다. 영결식에 참석한 종단스님과 정관계 인사들은 법장 스님의 갑작스런 입적에 아쉬움과 비통함을 드러냈다. 종정 법전 스님은 “원융과 화합으로 종풍을 드높였던 그 모습은 산승의 눈에도 밟힌다”고 했고, 티베트 달라이라마는 조문을 보내 “세계불교도는 위대한 스승을 잃었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이 대독한 메시지를 통해 “열반에 드는 순간까지 모든 것을 중생들에게 아낌없이 주고 가신 무소유 실천은 큰 울림으로 남는다”고 애도했다. 이어 “실천적 불교의 위상을 정립한 분”(정동채 문광부장관)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 전쟁에 반대하고 이라크, 평양, 워싱턴을 방문해 평화의 꽃을 피우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한 분”(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 “빈부와 세대 간 갈등을 허물고 용서와 화합, 상생의 세상을 만드는 데 혼신을 바친 분”(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중생과 함께 울고 웃으신 분”(박원순 아름다운가게 상임이사) 등 법장 스님을 기리는 정관계 인사들의 추모사도 발표됐다.

이들의 추모사는 법장 스님이 평생 걸어왔던 삶과 무관하지 않았다. 스님은 스스로 “중생의 고통을 모으러 다니는 나그네”라고 칭할 만큼 따뜻함을 간직한 수행자였고, 부처님가르침을 바탕으로 ‘세계일화’를 꿈꿨던 원력가였다. 

‘인곡 법장대종사 추모집(인곡법장문도회, 2006)’에 따르면 법장 스님은 1941년 6월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세 살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면서 가난과 맞서야 했고, 어린 나이부터 생계의 일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가난의 뼈저린 경험은 훗날 스님이 사회복지 일선에 나서게 된 배경이 됐다. 스님의 불연은 1958년 4월 어느 날, 사촌형님인 법융 스님을 만나면서 비롯됐다. 1950년 7월 열한 살 나이로 예산 수덕사로 출가한 법융 스님은 서울에 볼 일이 있을 때면 스님의 집을 찾곤 했다. 잿빛 승복을 입고 허름한 걸망 하나를 등에 짊어지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법융 스님의 뒷모습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 달여 뒤 수덕사로 발길을 옮겼다. 꼭두새벽에 울리는 목탁소리, 염불소리, 온 산 가득히 울려 퍼지는 범종소리는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한 편안함을 줬다. 출가를 결심한 것도 이때였다. 행자생활은 고됐다. 산에 올라가 땔감을 하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쌀 씻고, 물 기르고, 청소하는 등 하루하루가 눈코 뜰 새 없었다. 그러길 2년. 스님은 1960년 수덕사에서 원담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고 본격적인 출가수행자의 길에 들어섰다.

1965년 3월에는 부산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도 받았다. 비구계를 받고 돌아온 날, 은사 원담 스님은 “앞으로 경을 보든,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무슨 일을 하든지 신심일여(信心一如)로 할 것 같으면 그것이 바로 정진이다. 언제 어디서나 네가 신심일여로 머무는 곳, 바로 거기가 선불장이고 판도방이니 이 한 생각을 놓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은사스님의 송곳 같은 가르침은 이후 법장 스님이 출가수행자로 걸어가야 할 지침이 됐다. ‘신심·원력·무사심(無邪心)’을 평생 삶의 지표로 세운 것도 이 무렵이다. “△새벽예불에 빠지지 말 것 △매일 30분 이상 참선 정진할 것 △도량 청소에 반드시 참여할 것 △대중공양을 할 것 △사하촌에 절대 오래 머물지 말 것”이라는 ‘법장 오계’를 정해 하루하루를 돌아봤다. 출가수행자 본분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했다. 

수덕사 재무와 총무 등을 거친 스님은 1981년 중앙종회 사무처장에 이어 7대 중앙종회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중앙무대에 진출했다. 이듬해 총무원 사회부장으로도 발탁됐다. 대외활동이 잦은 소임을 맡으면서 스님은 점차 불교의 사회참여와 복지활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어린이포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87년 스님은 서산에 있던 사설사암 삼선암을 인수해 서광사로 개칭하고, 그곳에 180평 규모의 어린이 불교회관을 건립했다. 1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어린이 유치원을 설립했고, 작은 동물원도 마련했다. 당시 시설비로만 2억6000만원의 거금이 투입됐다. ‘농촌지역에 큰돈을 들여 유치원을 지을 필요가 있느냐’는 반발도 있었지만 스님은 물러서지 않았다. “어린이불자를 키우지 않으면 참된 성인 불자도 나올 수 없다. 성인 불자 수만 늘리겠다는 것은 훔쳐오는 것과 같다”(1992년 9월20일 불교방송 대담)는 게 스님의 소신이었다. 이후 서광사는 충남지역 포교중심도량으로 성장했다.

1992년 4월 스님은 수덕사 주지로 부임했다. 출가 본사이자 수덕사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기에 스님은 누구보다 절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수덕사는 한국불교중흥조로 불리던 경허·만공 스님의 주석처로 근대 한국불교의 구심점이 됐던 사찰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사세가 크게 기울었다. 무엇보다 사찰 경내까지 식당과 상점, 여관 등이 들어서면서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스님은 주지 부임과 동시에 10년 계획으로 수덕사 성역화불사에 착수했다. 사찰전각을 새롭게 중수하고, 어지럽던 사하촌도 정비했다. 10여년 간 스님이 정비하고 중창한 수덕사 전각만 32곳에 달했다. 오늘날 수덕사가 덕숭총림으로서의 위상을 갖출 수 있었던 것도 법장 스님의 성역화불사가 밑바탕이 됐다. 

이런 가운데 1994년 3월 스님은 ‘생명공양실천회’ 출범과 함께 본부장을 맡으면서 불교계 장기기증 운동에 첫발을 내디뎠다. 자신도 심근경색으로 사경을 헤맨 적이 있고, 그때 병원에서 장기이식 받지 못해 죽어간 모습들을 목격한 일에서 비롯됐다. “단 한 생명이라도 더 건질 수 있다면 지옥에 가더라도 힘을 보태겠다”(인곡 법장대종사 회고록)는 원력을 세운 것도 이때였다. 이 무렵 불교계 장기기증운동은 이웃종교에 비해 후발주자였다. 스님은 이웃종교계와 교류하며 노하우를 배웠고, 1995년부터 신장이식, 뇌사자 장기기증, 골수기증 등을 이뤄내면서 불교계에 ‘생명나눔운동’을 차츰 정착시켰다. 그 공로로 2001년 12월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기도 했다. 

스님은 2002년 11월 교구본사주지연합회장에 선출되면서 종단 정치의 중심에 섰다. 탁월한 친화력과 리더십으로 유력한 종단 실력자로 도약했다. 이런 가운데 2003년 1월15일 30대 총무원장 정대 스님이 동국대 이사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사퇴를 선언했다. 이로 인해 조계종은 선거 국면으로 전환됐다.

‘종단정치권력구조의 흐름과 과제-종회를 중심으로(법안 스님, 2014년)’에 따르면 이 무렵 조계종 중앙종회는 종책모임을 중심으로 ‘여야’ 성향이 뚜렷해졌다. 정대 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이끈 청림회와 무등회(훗날 보림회)가 여권으로, 지선 스님을 후보로 내세웠던 일여회(훗날 무차회)와 직지사단이 중심이 된 육화회가 야권으로 분류됐다. 31대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이들은 후보추대 작업에 나섰다. 육화회에서 이름을 바꾼 원융회와 일여회는 법장 스님을, 청림회와 무등회에서 이름을 바꾼 보림회가 종하 스님을 추대했다. 양측의 세 대결은 팽팽했다. 그러나 양측 모두 조용한 선거를 내세우면서 이렇다 할 잡음은 나오지 않았다. 그해 2월14일에는 한국불교기자협의회 등의 주최로 종단 사상 처음으로 총무원장 후보자토론회가 열려 달라진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2월24일,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31대 총무원장 선거에서는 선거인단 321명 가운데 319명이 참석, 179표를 얻은 법장 스님이 당선됐다. 종하 스님은 140표에 그쳤다. 이 같은 선거결과는 현응 스님 등 청림회 소속 스님들이 대거 법장 스님을 지원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왔다.(법보신문, 2003년 2월26일자) 당선증을 교부받은 법장 스님은 “이번 선거는 변화와 도약이라는 미래지향의 가치를 창출하려는 종도들의 소중한 뜻이 반영된 것”이라며 “특정문중과 교구에 머물지 않고 화합과 원융의 종단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총무원장에 당선된 법장 스님은 자신의 공약실현을 위해 의욕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첫 시작은 비구니 위상제고였다. 스님은 3월4일 총무원 집행부를 구성하면서 비구니 탁연 스님을 문화부장으로 발탁했다. 비구니 스님이 총무원 집행부 부장으로 임명된 것은 1962년 통합종단조계종이 출범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파격에 가깝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종단 일각에서 적지 않은 반발도 있었다. 그러나 법장 스님은 “비구니 스님의 지위를 향상시키겠다는 것은 내 공약”이라며 “시대적인 변화와 요청을 반영한 것”(연합뉴스, 3월4일자)이라고 밀어붙였다. 비록 비구니스님 1명을 총무원 부장에 임명한 것에 그쳤지만, 비구니 위상제고를 위한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성과로 평가됐다. 

스님은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해 이라크에서 발생한 전쟁과 관련해 성명을 내고 이웃종교계와 연대해 “조속한 전쟁중단과 평화정착을 위한 캠페인”을 진행하기로 했다. 불교문화재에 대한 책임 있는 관리와 지원을 위해 문화재청을 차관급으로 승격시키는 일에도 나섰다. 종단 안팎을 넘나드는 법장 스님의 광폭행보는 불교계뿐 아니라 세간에서도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조계종을 향한 세간의 시선도 차츰 변해갔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546호 / 2020년 7월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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