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탑으로 보는 중국 사리신앙 ② - 오월왕 전홍숙의 팔만 사천 탑 봉안 불사
14. 탑으로 보는 중국 사리신앙 ② - 오월왕 전홍숙의 팔만 사천 탑 봉안 불사
  • 신대현 교수
  • 승인 2020.07.28 10:48
  • 호수 15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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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공양 위한 8만4000탑 조성으로 불국토 구현

수 멸망 후 한족 세운 당 역시 불교를 국가 발전 위한 지렛대 삼아
당대 사람들, 사리신앙 돈독해 인도 사리탑 친견 인생 염원 삼기도
오대 들어오면서 모든 탑마다 ‘전신사리경’ 봉안하는 대불사 이뤄
975년에 세워진 오대의 전탑인 뇌봉탑. 전홍숙이 자신의 왕비를 위해서 지었기에 황비탑, 서관(西關) 지역의 전탑이라 하여 서관전탑 등으로도 불리는 명소다.

중국에서 사리신앙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때는 수(隋, 581~618)‧당(唐, 618~907)에서 오대(五代, 907~979)에 이르는 약 400년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은 남북조(420~589)시대로, 대략 황하를 중심으로 하여 남쪽에 송(宋)을 비롯해 그 뒤를 이은 제·양·진 등 한족(漢族) 네 나라, 북쪽에는 북위(北魏)와 거기에서 갈라진 동위와 서위, 북제와 북주 등 선비족(鮮卑族) 다섯 나라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남북조 각국은 군사력뿐만 아니라 문화와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왕권 강화를 위해 불교를 적극 장려하였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이 시기에 불사리신앙도 큰 발전을 이루었다. 

남북조 여러 나라의 각축장이던 중원은 마침내 581년 선비족이 세운 수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지난 회에서 말한 것처럼, 수의 사리신앙은 문제(文帝) 양견(楊堅)이 야심적으로 추진한 인수사리탑(仁壽舍利塔)으로 대변된다. 양견은 그 옛날 인도의 아소카왕이 그랬던 것처럼 불교를 통해 통일전쟁의 후유증을 치유하려 했다. 그래서 자신의 롤 모델 아소카왕을 본받아 인수사리탑을 조성한 것이다. 비록 8만4000탑에는 한참 못 미치는 111기에 그치기는 했어도 사리신앙의 전국화에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사실 양견은 어릴 적 이름이 불법의 수호신 중 하나인 ‘나라연(那羅延)’일 정도로 불교를 깊이 믿었던 사람이어서 불사리의 신앙적 의미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뇌봉탑 지궁에서 2001년에 발견된 보협인탑. 네 면에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인 본생담이 새겨져 있다.

수는 불과 38년 만에 멸망하고 한족이 세운 당이 그 뒤를 이어 중원의 영주가 되었다. 민족은 달랐지만 당 역시 전대와 마찬가지로 불교를 국가의 화합과 발전을 위한 지렛대로 삼았다. 그에 따라 사리신앙이 활짝 꽃피우게 되었다. 특히 당대(唐代) 사람들은 사리신앙이 아주 돈독하여, 인도에 가서 사리탑을 친견하고 오는 일을 인생의 염원으로 여겼다. 요즘 말로 ‘버킷 리스트’였던 셈이다. 

물론 인도는 아주 먼 나라였기에 보통 사람들로서 인도 순력은 꿈도 꾸기 어려웠을 것이다. 대신 고승들이 멀리 인도에서 사리탑을 예경한 이야기에 유달리 관심이 많았다. 의정(義淨, 635~713)스님이 645~695년 사이 인도에 가서 직접 보고 들은 인도 구법승들의 이야기인 ‘대당 서역 구법 고승전’이 큰 화제가 된 것이 대표적 예이다. 이 책에는 당시 사람들의 불사리 경배 염원의 풍조가 반영되어 인도의 사리탑들을 빠짐없이 찾으며 최대한의 경배를 올리는 장면들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한편 이 책에는 나란다 사원에 머물며 율과 논을 공부하고 여러 불경을 서사(書寫)했던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 구사학(俱舍學)에 조예 깊었던 혜륜(惠輪) 등 인도에 유학했던 신라 스님 일곱 명과 고구려 스님 한 명의 행적도 나온다. 대부분 현지에서 입적했지만 현태법사(玄太法師)처럼 돌아온 스님도 있었으므로 이들에 의해 인도의 불사리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전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오대에 들어오면서 예전 수 문제의 인수사리탑 조성을 능가하는 대불사가 이루어졌다. 오대 때 명멸했던 10국 중 하나인 오월(吳越, 893~978)의 마지막 왕 전홍숙(錢弘俶, 929~988)이 8만4000기를 조성해 전국에 봉안한 일이 그것이다. 인도 아소카왕의 고사를 본받은 것이라 일명 ‘아육왕 탑’이라고 하고, 또는 모든 탑마다 ‘보협인다라니경(寶篋印陀羅尼經)’(일명 ‘보협인경’ 또는 ‘전신사리경’)을 넣었기에 ‘보협인탑’이라고도 한다.   
 

천안 대평리사지 발견 고려 보협인석탑.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보협인탑으로 전홍숙의 영향을 받아 고려 초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 탑들은 높이 1미터 안팎의 작은 금속탑으로, 사각형 탑신 위에 놓인 옥개석의 네 모서리를 귀접이마냥 위로 치켜 올린 아주 독특한 형식이다. 특히 탑마다 ‘보협인다라니경’을 봉안한 점은 이 탑의 성격을 가장 분명하게 해 주는 특징이다. 탑을 쌓아 공양하면 개인과 국가 모두 복을 받는다는 믿음을 담고 있는 경전은 이 외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있는데, 둘 다 진신사리와 비견되는 법신사리(法身舍利) 개념의 지평을 넓혀준 책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유행했다가 고려시대에서는 오대의 영향을 받아 ‘보협인다라니경’이 인기를 모았다. 

전홍숙의 아육왕탑 혹은 보협인탑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것도 있지만, 1957년 중국 저장성 진화[金華]의 만불탑 지궁(地宮, 탑의 지하 시설)에서 15기가 한꺼번에 발견된 이래 근래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만불탑 보협인탑에는 ‘오월국왕 숙이 삼가 보탑을 8만4000곳에 세워 영원토록 공양드리고자 한다. 때는 을축년(965)이다’(吳越國王俶 敬造寶塔八萬四千所 永充供養 時乙丑歲記)라고 새겨져 있었다. 비슷한 무렵에 약간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어 ‘동양의 피사의 사탑’으로 불리는 쑤저우[蘇州]의 운암사(雲岩寺) 호구탑(虎丘塔) 지궁에서도 철제 보협인탑이 나왔다. 2001년 항저우[杭州] 뇌봉탑(雷峰塔)의 지궁 철제 사리함에서 순은제 보협인탑이 발견되었을 때도 화제가 되었다. 975년 전홍숙이 세운 뇌봉탑은 일명 황비탑(黃妃塔) 또는 서관전탑(西關塼塔)이라 하여 명승으로 꼽힌 곳이라 특히 관심을 많이 모은 것이다. 가장 최근에는 2016년 상하이 융평사(隆平寺) 지궁에서 보협인탑이 나오는 등 지금까지 발견된 ‘오월왕 전홍숙 아육왕탑’은 수 십 기에 이른다.  
 

중국 명대에 그린 전홍숙 초상화.

사실 전홍숙은 960년 고려 광종이 중국에 사신을 보내 불경을 구할 때 ‘천태론소’ 등을 제공해주어 우리나라와 인연이 없다 할 수 없다. 천안 대평리사지에 있었던 보협인석탑도 그 영향을 받아 조성된 것이다. 이 탑은 보협인탑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현 동국대박물관 소장). 

팔만 사천 탑 조성을 통해 불국토를 구현하려 했던 오월왕 전홍숙의 의지는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중국 사리신앙의 역사는 그의 8만4000탑 조성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인도 아육왕이 불사리를 나누어 8만4000탑에 봉안했던 일은 후대 여러 왕들이 흠모하는 전설이 되었다가, 천 년이 지나 중국에서 재현된 것이다.

신대현 능인대학원대학 불교학과 교수 buam0915@hanmail.net

 

[1547호 / 2020년 7월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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