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31대 총무원장 법장 스님-하
39. 31대 총무원장 법장 스님-하
  • 권오영 기자
  • 승인 2020.07.31 21:25
  • 호수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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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파병·북핵 문제 해결 위해 민간사절로 활약…종단 위상 높여

94·98년 멸빈자 사면 위해 세 차례 종헌개정 시도했지만 무산
조계사 주지교체 이후 보림·금강회 등 야권 반발로 시련 겪어
북핵 문제로 미국 순방·남측 대표로 평양 ‘6·15통일축전’ 참가
법장 스님은 2005년 5월12일 정부특사 자격으로 이라크 자이툰 부대를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2003년 3월24일 제31대 총무원장에 취임한 법장 스님은 종단현안 해결에 착수했다. 첫 과제는 94·98년 멸빈자 사면이었다. 멸빈자 사면은 30대 총무원장 정대 스님 때부터 추진된 사안이지만, 중앙종회의 반발로 번번이 무산됐다. 이런 가운데 종정 법전 스님이 그해 1월5일 신년하례 법회에서 “징계자 사면을 진행해 종단 구성원 모두 화합해야 한다”고 밝히면서 사면논의에 다시 불을 지폈다. 원로회의도 2월27일 총무원장을 인준하면서 이례적으로 유시를 발표해 “징계자에 대한 전면적 사면을 시행하라”고 촉구했다.(법보신문, 2003년 3월5일자) 종정스님의 당부에 이어 원로회의 유시까지 발표되면서 멸빈자 사면은 그 무렵 종단의 최대 화두가 됐다. 

법장 스님은 취임과 동시에 사면논의를 본격화했다. 원로스님들의 유시가 아니더라도 사면은 스님이 후보시절 내세운 공약이었다. “종단 발전을 위해서는 모든 종도들을 포용해 원융종단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스님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그러나 멸빈자 사면은 종헌개정이 선행돼야 한다는 점에서 난관이 예상됐다. 멸빈자 사면에 대한 중앙종회 각 계파의 입장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3분의 2이상 동의를 얻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스님은 총무원 집행부와 중앙종회 각 계파대표가 참여하는 사면복권검토위원회를 구성해 의견을 모으기로 했다. 두 차례 논의 끝에 사면복권검토위원회는 4월10일 “종헌개정을 통해 1962년 통합종단 출범 이후 멸빈자들에 대한 포괄적인 사면을 적극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법보신문, 2003년 4월16일자) 

법장 스님은 합의에 따라 4월11일 ‘징계 사면·경감·복권심사 신청공고’를 내고 부처님오신날을 즈음해 대대적인 사면을 예고했다. 때맞춰 교구본사주지들도 4월23일 ‘종단 대화합을 위한 사면·복권 촉구 결의문’을 발표하면서 멸빈자 사면은 가시화되는 듯 했다. 이런 분위기 탓에 언론은 “조계종이 1962년 통합종단 출범 이후 최대 규모의 사면복권을 단행할 것”(경향신문, 2003년 4월17일자)이라는 보도를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종헌개정안은 종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4월29일 158차 임시중앙종회에서 종헌개정안은 찬성 41, 반대 30, 기권 1표로 부결됐다. 31대 총무원장선거에서 종하 스님을 지지했던 “보림회와 금강회가 종헌개정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법보신문, 2003년 5월7일자) 종정스님과 종단 원로의 간곡한 당부도 또다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원융·화합종단을 기치로 내걸고 멸빈자 사면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었던 법장 스님으로서도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날 표결 결과를 지켜보며 침통해하는 법장 스님의 표정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결국 멸빈자 사면은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2003년은 조계종이 환경운동으로 두각을 나타낸 해이기도 했다. 그해 3월부터 수경 스님이 중심이 된 종교계는 정부의 새만금 간척사업 중단을 요구했다.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는 “새만금 간척사업이 진행될 경우 엄청난 환경재앙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며 3월28일부터 전북 부안에서 서울까지 60여일간 ‘3보1배’를 진행했다. 법장 스님도 4월19일 ‘3보1배’ 현장을 찾아 “새만금 간척사업 반대는 교단차원에서 지원할 것”이라고 지지의사를 밝혔다. 300km에 이르는 험난한 여정을 무릅쓰고 ‘뭇 생명들을 위해’ 몸을 던진 종교인들의 ‘3보1배’는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비록 새만금간척사업은 예정대로 추진됐지만, 수경 스님 등이 진행한 ‘3보1배’는 ‘인간의 이기에 맞서 생명평화를 외쳤던’ 불교계 환경운동이 세간으로부터 주목받는 결과를 낳았다. ‘3보1배’는 이후 비폭력평화시위의 모델로 정착되기도 했다. 그해 북한산 관통도로 건설문제도 도마에 올랐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불교계의 반대를 수용해 ‘백지화’를 공약으로 제시한 상태였다. 정부는 불교계, 환경단체 등과 노선 재검토를 추진했지만, 이미 상당부분 공사가 진척된 탓에 이를 되돌리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노 대통령은 그해 12월22일 합천 해인사를 찾아 종정 법전 스님을 예방하고 불교계에 양해를 구했다. 현직 대통령이 조계종 종정을 예방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으로, 불교계에 대한 노 대통령의 예우라는 평가도 나왔다. 

법장 스님은 종단변화를 위한 개혁과제들도 하나하나 실행에 옮겼다. 승가교육에 ‘선교육후득도’를 추진했다. 승가대학 등 기본교육기관에서 4년 수학하면 비구계를 받을 수 있던 교육제도를 변경해 승가대 4년 과정을 수료한 스님에게 사미계를 주고, 대학원 2년 과정을 마쳐야 구족계를 받을 수 있는 방안이었다. 스님들의 자질향상을 위해서는 교육 강화가 우선돼야 한다는 취지였다. 유사종단 출현에 따른 혼란을 막고 종단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종단을 상징하는 ‘삼보륜’ 문장을 처음 제정해 특허청에 등록했다. 신도법을 개정해 “조계종 신도는 삼귀의와 오계를 수지한 자”로 명시했다. 신도 자격을 규정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2004년 5월31일에는 해인사에서 원로 27명에게 대종사 법계 품서식을 진행했다. 수행력과 지도력을 갖춘 원로스님들에게 대종사 법계 품서식을 진행한 것은 통합종단 출범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스님은 남북불교교류 사업에도 적극 나섰다. 전임 총무원장 때부터 추진해 왔던 금강산 신계사 복원의 첫 삽을 떴다. 2004년 4월6일 금강산 신계사에서 대웅전 착공식을 진행한 조계종은 2007년까지 신계사를 모두 복원하기로 했다. 신계사 복원은 남북불교 교류의 첫 결실이기도 했다. 홍수 피해를 입은 불교국가 스리랑카에 종합복지시설을 갖춘 ‘조계마을’을 건립해 한국불교 세계화의 초석도 다졌다. 그해 부처님오신날에는 불자들의 자긍심 향상을 위해 ‘불자대상’을 신설하고, 첫 수상자로 황우석 서울대교수와 박세리 골프선수를 선정했다. 

총무원 집행부스님들을 중심으로 편부모 및 빈곤가정의 자녀들과 후원약속을 맺는 일도 진행했다. “행사용 결연이 아닌 편부모 아이들의 할아버지 혹은 아버지로서 빈자리를 채워주고,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될 때까지 벗이 되겠다”는 취지였다. 법장 스님도 편모 슬하의 최이슬(가명)양과 인연을 맺고 아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할아버지’가 되겠다고 약속했다.(한겨레신문, 2004년 6월21일자) 법장 스님의 한걸음 한걸음은 조계종과 사회에 큰 울림이 됐다. 

그러나 법장 스님의 행보가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스님은 서울 조계사 주지를 교체한 일로 중앙종회 보림회·금강회로부터 집요한 공격을 받아야 했다. 조계사 주지교체는 법장 스님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멸빈자 사면이 배경이 됐다. 법장 스님은 2004년 3월 임시중앙종회를 앞두고 멸빈자 사면을 다시 추진했다. 스님은 중진급 종회의원들을 잇따라 만나 “종단화합 차원에서 반드시 멸빈자 사면이 이뤄져야 한다”고 설득했다. 총무원장의 강한 의지에 따라 ‘종헌개정안 통과’에 힘이 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중앙종회는 법장 스님의 간곡한 호소를 외면했다. 3월18일 열린 제162회 임시회에서 종헌개정안은 찬성 53, 반대 21표로 부결됐다. 가결정족수인 54명에 단 1표가 부족했다. 1년 전에 비해 찬성표가 늘어 가결정족수에 근접했다는 것은 성과였다. 그러자 중앙종회의원 58명은 제163차 임시회 소집을 요구해 4월1일 종헌개정안을 다시 다루기로 했다. 종헌개정에 찬성했던 몇몇 종회의원들이 개인적인 일로 표결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2주 뒤 임시회를 열면 가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기도 했다.(법보신문, 2004년 3월24일자) 그러나 이번에도 종헌개정안은 찬성 50, 반대 28표로 부결됐다. 멸빈자 사면은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종단 화합과 원융종단을 실현하겠다는 원력을 가졌던 법장 스님으로서는 뼈아픈 결과일 수 있었다. 

이런 가운데 법장 스님은 6월7일 직영사찰 조계사 주지 지홍 스님을 전격 해임했다. “지홍 스님이 멸빈자 사면문제 등을 두고 총무원장과 마찰을 빚었기 때문”(한겨레신문, 2004년 6월7일자)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이 당시 지홍 스님은 법장 스님이 추진한 멸빈자 사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총무원장이 당연직 주지인 직영사찰의 관리인이 인사권자에 반하는 행동을 한 것에 대한 ‘괘씸죄’가 적용됐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지홍 스님이 소속된 종책모임 금강회는 성명을 내고 “원칙 없는 인사”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영담 스님이 주축이 된 보림회도 6월16일 기자회견을 열어 “총무원장이 과욕과 독선으로 종단 화합과 안정을 해치고 있다”며 비판에 합세했다. 한발 더 나아가 보림회는 “법장 스님이 복지기금 조성을 위해 추진한 보험 사업도 총무원장이 특정업체와 인연이 있기 때문”이라며 의혹을 제기했고, ‘선교육후득도’제도와 관련해서도 “한국불교 1600년사를 뒤엎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보림회와 금강회가 결속해 총무원장 비판에 나서면서 조계종은 내홍의 늪에 빠져들었다. 이후 여권으로 분류되던 일승회와 야권인 보림·금강회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종단 곳곳에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영담 스님 등은 신 총무원 청사로 사용될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건립공사와 관련해 거듭된 의혹을 제기하면서 법장 스님의 재임기간 내내 발목을 잡았다. 그럴수록 종단 혼란은 가속화됐고, 법장 스님의 시름도 깊어졌다. 

2005년 들어 법장 스님은 대외활동 비중을 높였다. 5월10~14일 스님은 정부특사 자격으로 이라크에 파병된 자이툰 부대를 격려 방문했다. 전쟁이 한창인 이라크 지역을 공식 방문한 것은 종교인으로서 법장 스님이 유일했다. 그해 5월24~26일에는 미국 워싱턴도 방문했다. 이 무렵 북한의 핵실험으로 한반도에는 전쟁의 기운이 감돌았다. 미국은 연일 북한을 압박하며 긴장국면을 조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법장 스님은 미국 국가안보회의(NSC)에서 국무부 관계자 등과 만났다. 스님은 “한반도 통일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며 “북핵문제는 인내심을 가지고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경향신문, 2005년 5월27일자) 당시 북핵 문제와 관련한 민간사절로서 법장 스님의 활약은 세간으로부터 큰 이목을 끌었다. 그럴수록 조계종의 위상은 높아졌다. 

법장 스님은 다시 그해 6월15일 평양에서 열린 ‘6·15통일대축전’의 남측 명예대표로 추대돼 북한을 방문했다. 스님은 6월14일 평양 김일성종합경기장에서 열린 개막식에서 “남북이 손잡고 협력하면서 이 땅을 평화와 번영의 땅으로 가꿔나가고, 자손만대 평화와 자비가 넘치는 축복받은 땅을 우리 후손들에게 당당히 물러주자”고 밝혀 참석대중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스님의 발걸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해 7월19일에는 대만불교와의 교류를 위해 불광산사를 방문해 성운 대사와 상호협력을 약속했고, 7월30일에는 러시아 사할린을 방문해 일제강점기 징용됐다 귀환하지 못한 동포들을 위한 위령제도 봉행했다. 다시 8월3일 아시아불교대표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도 방문했다. 스님의 해외순방길을 합치면 족히 1만km는 넘었다. 

지병인 협심증이 재발한 것도 이 무렵이다. 스님은 그해 9월5일 서울대병원에 입원하기 위해 총무원장 집무실을 나섰지만,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스님은 9월11일 새벽 3시50분경, “나에게 바랑이 하나 있는데, 입도 없고 밑도 없다. 담아도 담아도 넘치지 않고, 주어도 주어도 비지 않는다”는 글을 남긴 채 적멸에 들었다. 법랍 45년, 세수 64세였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548호 / 2020년 8월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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