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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대원 장경호 거사의 발원과 대중불교 운동

기자명 고명석

“보살도 실천으로 어두운 중생사회 등불 되자”

불교 가치관 입각한 기업경영으로 동국제강 그룹 비약적 발전
대원회‧대원불교대학‧시민선방 세워 불교인재 양성 토대 마련
전 재산 기부로 대한불교진흥원 설립, 불교대중화에 불꽃 지펴

대원 장경호 거사는 굳은 신심으로 불교 대중화를 발원하고 꽃피운 근현대 장자로 손꼽힌다. 장경호 거사가 남산에 대원정사와 함께 세운 대원불교회관 옛 모습.

우리나라 근현대 대표적 기업인으로서 불교 대중화의 실질적 지평을 열어나갔던 사람이 장경호 거사다. 그의 자제들 또한 그러했다. 특히 한국불교의 새로운 변모를 꾀하며 대중불교, 생활불교의 기치를 내걸고 불교를 이 삶의 현장에서 구현해 나가고자 몸소 그 길을 열어나갔던 이가 그다. 그는 이를 지속하기 위해 목숨을 마치기 전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으며 대한불교 진흥의 초석을 다지는 편지를 대통령에게 쓴다.

“이 사람은 올해 77세의 고령인 동국제강의 창업자 장경호입니다. 이제 멀지 않아 이 생을 마칠 것을 내다보고, 인생무상의 대도 앞에, 조용히 그리고 엄숙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며…(중략) 세상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좋은 일은 많을 줄 압니다. 그 좋은 일이란, 자기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중생을 위하는 길이며, 불교가 인간정신을 선도하고 어려운 때일수록 국가민족을 수호·발전시키는 데 중요하다고 확신하게 된 본인은 오직 불교중흥이라는 일념만으로 저의 조그마한 사재를 내어놓게 되었습니다. 1975년 7월10일 장경호 합장”

장경호(張敬浩, 1899~1975) 거사는 우리나라 굴지의 기업 동국제강 창업자이며 대한불교진흥원이 설립자이다. 자호는 대원(大圓)이다. 그는 부산 동래구 초량동의 독실한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어머니 손을 잡고 통도사에 다녔다. 19세 때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일본유학도 떠난다. 대원은 17세 때 느닷없는 동생의 죽음, 그리고 나라를 잃은 슬픔으로 번민하며 길을 찾다가 불경을 탐독한 후 ‘부처님 말씀대로 살면 사람노릇 하겠구나’라는 마음을 굳히게 된다.

그는 27세 되던 해 통도사 구하(九河) 스님 회상에서 화두를 들고 동안거 결제에 든다. 해제 날, 대웅전에 꿇어앉아 “이제 나는 상업에 종사하여 크게 돈을 벌리라. 하여 그 모든 것을 불교에 바치겠다”라고 발원한다. 1929년 가마니 회사 대궁양행을 비롯해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며 돈을 벌어들인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못 만드는 사업에서 성공을 거두고 이듬해 조선특수합금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제강업에 뛰어든다. 그는 1954년 동국제강을 창업한다. 동국제강 그룹은 한때 재계서열 5위, 혹은 10위에 들 정도로 대기업으로 발전한다.

대원은 경영 일선에서 부끄러움 없는 기업인이 된 것은 부처님께 귀의한 덕이며 참선 수행을 통해 지혜를 닦았기 때문임을 주위 사람들에게 누누이 강조하였다. 그는 큰 부자가 되었음에도 절약하며 검박한 생활을 하였다. 기업경영에서 불교의 가치관에 입각하여 사람의 존귀함과 평등성을 중요시 했다. 이는 동국제강의 경영이념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예불은 물론 두 시간씩 참선에 들었다. 3개월 동안 안거에 드는 일도 많았다.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사찰을 찾아 불공을 올렸다.

대원은 1960년대 들어 동국제강 경영을 서서히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부인 추적선화 보살과 더불어 불교신행 생활을 돈독히 한다. 1970년대 그는 도심 속에서 불교 대중화와 생활화의 길에 본격적으로 접어든다. ‘자아를 발견하여 지상에 낙원을 이룩한다’라는 그의 불교관을 이루어 내고자 함이었다. 본래 청정한 내 마음의 발견. 그 마음이 이 세상 모든 것을 해결하는 열쇠임을 자각. 이러한 자아의 완성과 더불어 이 땅의 낙원인 불국토가 실현. 그래서 그는 1972년에 대원회를 설립하여 매주 법회를 보고 토요일마다 불교계 주요 인사들을 초청하여 정기적으로 좌담회를 개최한다. 그 결과 불교 대중화의 구체적인 틀이 형성된다. ‘각종 의식을 현대화하자’ ‘대중을 위한 불교교육제도를 만들자’ ‘현대적 불교문화를 새로이 펼치자’ ‘시민들을 위한 수행 선방을 만들자’ ‘집집마다 부처님을 모시자’ ‘병원, 방송국, 신문사, 잡지사 등등을 건립하자’ 등이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대원은 남산 기슭에 적지 않은 규모의 대원정사(大圓精舍) 건물을 마련한다.

“본인은 한국인으로서 이 나라 사회에 보은하고 도움이 되는 길을 생각해 왔습니다. 오랜 불교 신앙의 체험을 통해서 인간정신의 올바른 향도는 어떤 제도나 지식 위주의 교육보다는 양심을 깨우는 종교 운동이 가장 중요함을 확신합니다. 이리하여 모든 불교인의 한결같은 염원에 부응하고자 이곳 남산 기슭에 조그마한 대중도량을 마련하였습니다…(중략) 바라건데 고승대덕님과 석학 등 관계되시는 분들은 미혹된 대중의 길잡이로서 앞장서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많은 청신남녀 불자들은 이곳에서 진실로 부처님의 정신을 체험하고 인격 양성에 힘쓸 것이며,
나아가 보살도의 실천생활을 통해 어두운 중생사회에서 밝은 등불이 되시어, 사회의 안정과 국가 발전에 기여하시기를 축원해 마지않습니다. 나무 대자대비 석가모니불”

대원정사는 불교방송국을 개국하려고 방음장치까지 마련한 건물이었다. 통불교와 사부대중의 화합, 그리고 불교의 생활화, 대중화를 지향하고자 했다. 그래서 대원은 이곳에서 2년제 대원불교교양대학을 열고, 이어서 내소사 해안 스님을 모시고 시민선방을 개원한다. 불교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와 더불어 수행을 통한 자기 체득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대원불교대학은 최초의 신도 교육기관으로 3000여명이 이곳을 거쳐 갔다. 시민선방도 24시간 개방되는 최초의 체계적인 도심 선방이었다. 1975년 대원은 참선으로 암의 고통을 이겨내면서 죽음이 다가오자 자신의 전 재산 30억 6000여만원(현재 자산가치 3000억)이라는 거금을 기부하여 대한불교진흥원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대원의 불교 대중화 원력은 그의 차남 중원 장상문 거사를 통해 더욱 구체화 된다. 중원은 선친을 이어 1980년대에 출판사 대원정사, 월간 대원(훗날의 대중불교), 주식회사 대원사를 설립하여 대중문화를 선도한다. 1989년도부터 불교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대중불교 전국결사대회를 이끌어 불교의 대중화, 교리의 생활화, 의식의 현대화라는 이념을 바탕으로 집집마다 부처님 모시기, 마을마다 회관 건립, 직장마다 법회봉행, 모든 가정의례의 불교화, 오계 지키기의 생활화를 전개한다.

그리고 1990년 5월에 대망의 불교방송국을 개국한다. 진흥원은 1989년에 불교계 최초로 대원이 세우고자 했던 다보수련원을 괴산에 마련한다. 그의 다섯째 아들 동국산업 장상건 회장은 자신의 사재를 사회에 환원하고자 평화통일과 인류 화합을 발원하며 경주에 황룡원(皇龍院) 중도타워를 짓고 전통문화 체험, 명상체험, 교육, 세미나 공간 등의 종합적인 현대적 수련원 공간을 마련한다. 한 사람의 원력이 이렇게 불교 대중화의 장엄한 불꽃을 지폈다.

고명석 불교사회연구소 연구원 kmss60@naver.com

 

[1548호 / 2020년 8월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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