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반야바라밀다
30. 반야바라밀다
  • 현진 스님
  • 승인 2020.08.19 09:43
  • 호수 15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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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써 피안으로 건너간다’ 의미

범어 ‘쁘라즈냐빠라미따’ 소리 옮김
‘빠라미따’ 두고 ‘완성’ 해석 있지만
금강경선 ‘피안으로 건너감’이 옳아

제13 여법수지분 초반에 이 경(經) 혹은 가르침을 어떻게 이름 할 지 묻는 부분이 나온다. 즉, “세존이시여! 이 경을 어떻게 이름 해야 하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하옵니까?”라고 물으니 부처님께서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이러한 이름으로 네가 받들어 지녀야하느니라”라고 답했다. 

‘금강(金剛)'은 범어 와즈라(vajra)에서 온 말로서, 선・악의 신들이 전쟁을 하는 와중에 힘을 잃은 선신들을 위해 선인 다디찌가 자신의 유체(遺體, 스스로 자신을 화장하여 만든 재)를 제공하여 만들어진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무기임을 제1회 글에서 간략히 밝혔다. 그러니 ‘금강’은 ‘와즈라’의 뜻옮김한 말이다.

‘반야바라밀'은 범어 쁘라즈냐빠라미따(prajñāpāramitā)를 소리옮김한 말이다. 이는 ‘쁘라즈냐(prajñā)’와 ‘빠라미따(pāramitā)’로 나뉘는데, 앞의 것은 뜻옮김한 ‘지혜(智慧)’는 물론 소리옮김한 ‘반야(般若)'로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며, 쁘라즈냐를 풀이하는 데 대한 이견은 거의 없는 편이다. 뒷부분은 뜻옮김한 것이 ‘도피안(到彼岸)’ 또는 ‘사구경(事究竟)’이요, 소리옮김으로는 현장 스님 이전엔 ‘바라밀(波羅蜜)’이라 하였고 현장 스님의 신역부터 ‘바라밀다(波羅蜜多)’라 하였다. 신역에서 ‘多'가 새롭게 첨부된 것은, 경전의 범어를 한문으로 옮길 때 조금의 차이도 내지 않으려는 현장 스님에겐 ‘~한 상태’를 나타내는 ‘­tā’란 꼬리말을 생략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기에 생긴 차이인 것 같다.

빠라미따를 풀이하는 데 있어선 두 가지 해석법이 존재한다. 빠라미따를 해석하여 ‘완성’이라고도 하고 ‘피안으로 건너감’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한문처럼 일부 범어도 다의성(多義性)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차이이다. 우선 pāramitā를 parama(최상, 제일)란 형용사의 여성형 명사인 pāramī에 추상명사를 만드는 조사 ­tā가 첨부된 것으로 볼 경우 그 의미는 ‘최상의 상태'가 되므로 ‘완성'이란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pāra(彼岸, 강의 건너편 언덕)에 목적격조사가 첨부되어 pāram(피안으로)이 되고, 동사 √i(가다)가 원형 그대로 과거분사로 전용되어 오고 거기에 조사 ­tā가 첨부된 것으로 보아, 이 둘을 합치면 ‘피안으로 가는 상태'가 되므로 ‘피안으로 건너감'이란 해석도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쁘라즈냐빠라미따를 ‘지혜의 완성'이냐 ‘지혜로써 피안으로 건너감'이냐를 두고 설왕설래할 수 있지만, 본 ‘금강경’의 맥락이 지혜 자체만을 강조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통해 아상(我相)을 극복하고 그 힘으로 피안에 나아갈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에 최소한 ‘금강경’에선 나중의 의미인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지혜를 의미하는 쁘라즈냐, 즉 반야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범어 ‘prajñā'의 반대말은? 바로 ‘금강경’에서 그토록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는 ‘saṁjñā’이다. 두 단어는 ‘√jñā(알다)’라는 동사를 기반으로 그 앞에 동사전치사를 달리하고 있을 뿐이다. ‘pra­’는 강조의 의미나 있는 그대로를 가리키기에 prajñā는 ‘눈앞에 무엇을 두고 보아 알듯이 알다’라고 할 수 있으며, ‘saṁ­'은 함께 등을 의미하므로 ‘무엇과 함께 혼재하여 알다’라고 할 수 있다.

복잡한 명동거리에서 ‘기도하는~’으로 시작되는 조용필의 노래 ‘비련’의 첫 소절이 들려오면 ‘꺄~’ 하는 함성이 귓가에 들려오는 듯하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면 그는 분명 조용필의 비련과 함께 20대를 보냈던 사람이다. 그렇지만 옆에 같이 걷던 20대 딸과 아들은 갑자기 아버지가 왜 그러시지? 할 것이다. 동일한 이근(耳根)으로 ‘조용필의 비련'이라는 동일한 성경(聲境)을 대했는데 인식을 달리하는 것은, 중년의 남성은 자신의 20대 때 많은 경험을 통해 축적되었다가 갑자기 소환된 ‘기억'과 함께 그 노래를 들었기에 보인 반응일 것이니, 이것이 바로 ‘산야(saṁjñā)'이다. 그에 반해 옆에서 차분히 듣고 있던 딸이 “아빠! 저 노래 차분히 들어보니 가슴을 울리는 게 있네요.” 한다면 ‘반야(prajñā)’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49호 / 2020년 8월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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