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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이인문의 ‘낙타도(駱駝圖)’

기자명 손태호

낙타의 생동감·서역인의 특징 섬세히 묘사

도화원에서 활동하며 수행화원으로 북경 두 번 다녀온 이인문 작품
신발 신은 듯 어색하게 그려진 낙타발 등 통해 중국화보 모사 추정
그림으로만 세계 접했던 시대 외국 풍물에 대한 동경심 볼 수 있어

이인문 作 ‘낙타’, 지본담채, 30.8×41.0cm.
이인문 作 ‘낙타’, 지본담채, 30.8×41.0cm.

코로나19 영향으로 해외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기에 많은 분들이 국내에서 여름휴가를 보냈다고 합니다. 여름휴가뿐 아니라 당분간 해외 출국은 여러 사정상 쉽지 않은 상황이니 여행을 좋아하고 즐기는 분들에게는 국내밖에 선택지가 없을 것입니다. 외국의 낯선 풍물과 사람, 음식 등 우리와는 다른 문화를 접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답답한 상황일 것입니다.

해외여행이 어려워지니 TV나 유튜브 등에서 외국 여행지를 감상하는 ‘랜선 투어(Line tour)’가 유행이라고 합니다. 직접 가볼 수 없으니 눈으로 대리만족이라도 즐기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여행동호회에서는 그 나라를 가고 싶은 사람들끼리 모여 캠핑을 하며 그 나라 음식을 만들어먹고, 그 나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행사도 열린다니 그동안 마음만 먹으면 세계 어느 곳에서나 갈 수 있었던 시절이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한 시절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번 전염병은 우리를 이렇게 되돌아보게 합니다.

외교 사신이 아니면 외국에 가는 것이 불가능했던 조선시대에도 외국 풍물에 대한 동경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진기한 물건이나 서적 등에 대한 수요는 매우 높았으며 중국과 일본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 대한 소식에 늘 목말라 했습니다. 이런 타국에 대한 궁금증 해소를 위해 그림이 이용되곤 하였습니다. 그 중 오늘 감상할 그림은 조선 후기 화원 이인문(李寅文, 1745~1824)의 ‘낙타도(駱駝圖)’입니다.

이 그림은 조선에서는 볼 수 없었던 외국의 진기한 동물 중 하나인 낙타가 담겼는데 김홍도와 같은 시기 도화원에서 활동했던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이인문의 작품입니다. 혹이 두 개인 쌍봉낙타에 서역인이 한 명씩 앉아서 이동하고 있습니다. 낙타의 얼굴은 간략하지만 생동감이 넘치고 몸에 난 털도 자연스럽게 표현했습니다. 이국적 모자와 핑크빛 허리띠를 찬 서역인들은 수염을 길렀으며 특유의 긴 장화 스타일의 신발도 신고 있습니다. 낙타 등에는 안장과 발걸이가 없어 실제 타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린 그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인문은 동지겸사은(冬至兼謝恩)의 수행화원으로 북경을 두 번이나 다녀온 경험이 있고 이때 북경에서 본 진기한 풍경을 담은 그림첩인 ‘한중청상첩(閒中淸賞帖)’에 수록되었기에 북경에서 낙타를 직접 보고 그렸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화보를 보고 따라 그렸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낙타 발을 보면 원래는 발톱이 두 개로 갈라졌는데 그림에서는 마치 신발을 신은 듯 어색하게 그려져 있어 더욱 그렇습니다.

낙타는 인도나 중국으로 떠난 신라 구법승들도 보았을 것이나 특별한 언급은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낙타가 직접 우리나라에 온 적도 있었습니다. ‘고려사(高麗史)’ 태조 25년(942년) 10월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임인' 25년(942) 겨울 10월 거란(契丹)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낙타 50필을 보냈다. 왕은 거란이 일찍이 발해(渤海)와 지속적으로 화목하다가 갑자기 의심을 일으켜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켰으니, 이는 매우 무도(無道)하여 친선관계를 맺을 이웃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드디어 교빙(交聘)을 끊고 사신 30인을 섬으로 유배 보냈으며,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아래에 매어두니 모두 굶어 죽었다.”

일명 ‘만부교사건’입니다. 거란이 세운 요(遼)는 이 만부교사건을 이유로 두 번이나 고려를 침공하니 낙타가 전쟁을 부른 셈이 된 것입니다. 낙타를 굶겨 죽였으니 지금 같으면 당장 동물학대라고 들고 일어날 사건이지만 당시 왕이 결정한 외교적 판단이기에 누가 감히 시비를 걸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 고려 태조는 거란과의 피할 수 없는 싸움을 염두하고 그 기세를 꺾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만부교사건의 아쉬움은 여러 번 역사에 언급됩니다. 조선후기 유득공은 ‘발해고’를 통해,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낙타가 무슨 죄가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특히 박지원은 직접 송도의 만부교를 찾아가 지금은 ‘낙타교’라는 돌비석이 있고 사람들은 ‘약대다리’라 부르는데 ‘약대’는 낙타를 부르는 우리나라 낱말이라는 것까지 조사해 기록해 두었습니다. 역시 실사구시를 중시하는 실학파의 거두답습니다.

불교설화집인 ‘백유경’에는 낙타 관련한 설화가 두 편 실려 있습니다. 두 편 모두 어리석은 인간의 헛된 욕심에 대한 경고의 내용입니다. 대한제국 말기 일본은 창경궁을 헐고 창경원이라는 동물원을 개장하였습니다. 그때 낙타도 창경원에 들어와 많은 사람들이 낙타를 보러 모여들었습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진귀한 동물이라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 소식을 들은 대한제국 마지막 왕인 순종은 “백성들이 동물을 보고 기뻐하면 나도 기쁘다. 그런데 낙타의 눈이 참으로 슬퍼 보인다” 하면서 한숨을 쉬었다고 합니다. 볼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 진기한 외국 동물을 보고 신기해하는 백성들의 마음은 이해 하지만 궁에 갇혀 일본인들의 감시 속에 살아가는 본인의 처지가 동물원에 갇힌 낙타와 다를 것이 없다는 동병상련의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림 오른쪽 위 제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큰 사막 아래 서북풍이 나부끼듯 얼굴에 남아있다(大漠下西北風 飄然殘面)’. 간재(艮齋) 홍의영(洪儀泳, 1750~1815)이 남긴 글입니다. 이인문의 ‘낙타도’를 보면서 그림으로만 세계를 접했던 그 시대에 비해 지금 얼마나 행복한 시절에 살고 있고, 그래서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하는지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손태호 동양미술작가, 인더스투어 대표 thson68@hanmail.net

 

[1549호 / 2020년 8월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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