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0. 32대 총무원장 지관 스님 - 상

역대 고승 비문정리 등 한국불교학 새 지평 연 대표적 학승

1947년 해인사서 자운 스님 은사로 출가…봉암사 결사에 참가
1960년 최연소로 해인사 강주…해인사 주지·동국대 총장 역임
1990년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설립…‘가산불교대사림’도 간행

조계종 32대 총무원장에 취임한 지관 스님은 2005년 11월14일 서울 조계사에서 취임법회와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개관식을 봉행했다. 

2005년 10월31일 세간의 이목이 조계종으로 향했다. 이날 조계종은 법장 스님의 입적으로 공석이 된 총무원장을 새롭게 선출했다. 종단 안팎을 넘나들며 이슈의 중심에 섰고, 마지막 육신마저 사회에 회향한 법장 스님의 행보는 조계종의 사회적 위상을 견인했다. 그렇기에 누가 법장 스님의 뒤를 이을 것인가는 종단 안팎의 주된 관심사가 됐다.

32대 총무원장 선거는 지관·정련·법열·월서·대우·각명·장주 스님이 후보등록하면서 다자구도로 출발했지만, 선거막판 종책모임의 지원을 받은 지관 스님과 정련 스님의 양자대결로 굳어졌다. 지관 스님은 당시 여권으로 분류되던 일승회와 화엄회가 내세운 후보였고, 정련 스님은 야권인 보림·금강회의 지원을 받았다. 지관 스님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학승으로, 해인사 주지·동국대 총장을 역임한 현직 원로였다. 정련 스님은 조계종 포교원장을 거쳐 부산지역에서 어린이 포교와 복지를 이끌었다. 두 스님 모두 총무원장으로 손색이 없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러나 법장 스님 재임기간 끊임없이 대립각을 세웠던 여야의 분위기만큼 선거기간 두 후보는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법보신문(2005년 10월31일)’에 따르면 이날 개표는 후보가 받은 지지표를 일일이 호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두 후보는 ‘엎치락뒤치락’을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지지자들은 ‘롤러코스터’를 타야만 했다. 개표는 1시간여 만에 종료됐다. 그 결과 지관 스님이 선거인단 320명 가운데 165표를 획득해 당선됐다. 146표를 얻은 정련 스님과는 19표 차이에 불과했다. 야권으로서는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야권은 “선거불복”을 선언했다. 

‘주간경향(2005년 11월11일)’에 따르면 정련 스님 선거대책위는 지관 스님이 당선증을 받은 그 시각, “선거결과에 대한 승복을 유보한다”고 발표했다. 정련 스님 측 선대위는 “지관 스님이 1989년 동국대 총장 시절 부정입학 문제로 실형을 선고 받아 후보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관 스님 측은 “사회법으로 집행유예 판결은 유예기간이 끝나면 소멸되고, 유예기간 이후 결격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실형을 받은 것도 “개인 비리가 아닌 재단의 문제에 연루돼 총장으로서 책임을 진 것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이미 중앙선관위의 자격심사를 거쳤음에도 야권은 이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럴수록 지관 스님의 향후 행보도 순탄치 않음을 예고했다. 

지관 스님은 이날 “수행종풍을 진작해 승가의 위의와 질서를 확립하겠다”고 밝혔다. “사회적 자비행을 적극 실천해 불자와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종단건설” “94·98년 멸빈자 사면” 등도 약속했다. 지관 스님의 당선 소감은 “스님들의 수행정진 함양과 위의 회복”에 방점이 찍혔다. 이는 평생 학승으로서 불교정신과 가치를 선양해 온 스님의 삶과 무관하지 않았다. 

‘가산지관율사의 계율관(경성 스님, 율장연구회)’ 등에 따르면 지관 스님은 1932년 경북 포항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5세 되던 해 어머니를 여였고, 10세 이후에는 이름 모를 열병에 시달렸다. 백약이 무효였다. 그러다 부친이 데려다 준 법성사에서 관음진언 기도를 하면서 병이 완치되는 영험을 얻었다. 이렇게 맺은 불연은 출가로 이어졌다. 16세 되던 해 탁발 나온 용명 스님을 따라 해인사를 찾아 자운 스님과 사제의 연을 맺었다. 

1947년 사미계를 받은 스님은 이듬해 성철·청담 스님 등이 주도한 봉암사 결사에 은사와 함께 참여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당대 선지식들과 함께 한 봉암사 결사는 스님이 평생 수행자로서 본분을 잃지 않게 한 버팀목이 됐다. 훗날 스님은 “봉암사 결사에서 눈 밝은 스승들이 종풍의 횃불을 높이 들고 용맹 정진하던 모습은 내 초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회고했다.(법보신문, 2011년 5월16일) 

이후 스님은 해인사와 통도사 강원에서 당대 대강백인 운허 스님으로부터 경전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학승의 길에 들어섰다. 교학에 대한 탁월한 이해는 스님이 1959년 표충사·동화사 강사를 거쳐 1960년 역대 최연소 나이로 해인사 강주에 취임하는 배경이 됐다. 이후 10여년 간 학인들을 지도하며 경학을 익혔다. 

스님은 전통교학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1961년 10월경 해인사 주지스님의 권유로 그해 신설된 마산대학(경남대학 전신) 종교학과 3학년에 편입해 외전에 대한 이해도 넓혔다. 당시 스님은 어린 나이에 출가해 중고등학교 등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해인사 강원 강사 경력을 인정받아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입시제도가 명확히 정착되지 않았고, 대학마다 특별전형 형태가 다양했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이는 2007년 세간을 뒤흔든 ‘신정아 허위학력 파동’ 당시 지관 스님도 ‘허위학력 논란’에 휘말리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이후 스님은 동국대 대학원에 입학해 1969년 석사에 이어 1976년 불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5년 동국대 교수로 임용돼 대학 강당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동국대 불교대학장(1980년), 교육대학원장(1984년)을 거쳐 1986년 동국대 총장으로 선출됐다. 스님은 자신의 관점에서 불교를 재해석한 저술 작업도 병행했다. ‘치문경훈 주해’(1963) ‘대혜서장 주해’(1963) ‘규봉도서 주해’(1963) ‘고봉선요 주해’(1964) ‘보조절요 주해’(1964) ‘선종약사’(1964) ‘능엄경 약해’(1967) ‘한국불교소의경전 연구’(1969) ‘남북육부 율장 비교연구’(1976) ‘불교교단 발달사’(1977) ‘조계종사’(1979) ‘해인사지’(1992) 등을 잇따라 펴냈다. 

스님은 1990년 2월 동국대 총장에서 물러난 이후 이듬해 6월 사비를 털어 서울 종로에 ‘가산불교문화연구원’을 설립했다. “한국불교가 빛나기 위해서는 한국불교 문화를 학문적, 과학적으로 연구해 불교정신 문화의 뿌리를 튼튼하게 해야 한다”(김광식, 지관대종사 탑비 건립사업 보고서)는 취지였다. 가산불교문화연구원을 통해 스님은 불교교육, 학술, 출판, 교화 등의 사업을 진행하고 불교 대중화에 매진했다. 

스님이 학문적으로 역점을 둔 분야는 금석학이었다. 역대 고승들의 비문을 찾아 교열하고 역주하는 작업이었다. 고승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은 1차 사료로서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불교사, 문화사, 경제사, 지역사, 생활사를 살필 수 있는 한국문화의 집합체로 꼽혔다. 스님은 강원, 경상, 충청도 지역 사찰과 폐사지에 남아 있는 고승들의 비문 332기를 빠짐없이 정리하고 분석했다. 이를 통해 1992년 신라 고승들의 비문을 정리한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을 시작으로 고려편(1·2·3·4), 조선편(1)을 연이어 발간했다. 2000년에는 조선과 근현대 고승들을 망라한 ‘한국고승비문총집’도 간행했다. 

지관 스님의 학문적 열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스님은 1982년 ‘불교종합백과사전을 발간하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가산불교대사림’ 작업에 착수했다. “삼장 연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교학에 대한 개념, 술어, 사건, 문화 등에 대한 기초가 반드시 수반돼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1999년 1권이 발간된 이후 현재까지 17권이 간행됐다. 비록 지관 스님이 2012년 입적하면서 완간을 보지 못했지만 ‘가산불교대사림’은 “일반·세계·한국불교 술어 등을 집대성한 불교학연구의 결정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가산불교연구원은 2022년 지관 스님의 입적 10주기에 맞춰 ‘가산불교대사림’ 22권을 모두 완간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관 스님은 학자로서 길을 걸으면서도 여러 직책을 맡아 종무행정에 역량을 발휘했다. 1965년 11월 1대 중앙종회 보궐선거에 당선된 이후 2대 중앙종회를 거쳐 3대 중앙종회의원에서는 부의장에 선출됐다. 1970년 30대의 나이에 해인사 주지에 취임해 해인사 대적광전을 중수하고 사적비를 건립했으며, 1993년 다시 해인사 주지에 뽑혀 사찰을 일신했다. 2001년 원로의원, 2003년 대각회 이사장, 동국역경후원회 이사장에 추대되기도 했다. 

지관 스님의 취임법회는 2005년 11월14일 서울 조계사 대웅전에서 봉행됐다. 조계종은 이날 2002년 5월부터 건립에 나선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 대한 개관식도 함께 진행했다. 지관 스님은 취임사를 통해 “공의에 의한 종단운영을 통해 대중화합을 반드시 실현, 종단중흥을 이룩하겠다”고 다짐했다. 승가의 위계질서 확립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를 위해 2006년 2월 스님들의 가사를 통일하는 작업부터 착수했다. 각양각색의 가사를 통일하고, 대종사, 종사, 종덕, 대덕, 중덕, 견덕의 법계별로 가사의 조수를 달리했다. 이는 승단의 정체성과 위계질서를 확립하겠다는 의미였다. 조계종이 통일가사를 제정한 것은 종단출범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계종은 앞서 ‘늦깎이 발심자’의 출가를 보장하기 위해 출가나이 제한도 40세에서 50세로 재조정했다. 출가나이를 40세로 제한한 것은 2002년 9월이었다. IMF구제금융 사태 이후  고령자출가자가 급증하면서 승가교육의 질이 하향된다는 우려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출가제한 나이를 50세에서 40세로 상향했었다. 그러나 이 제도가 도입되면서 출가자가 급감했다. 뒤늦게 불교에 귀의한 발심자들의 출가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는 요구도 커지면서 중앙종회는 2005년 11월10일 169차 정기종회에서 다시 출가제한 나이를 50세로 환원했다. 

지관 스님은 2006년 2월27일 총무원 호법부 상임감찰에 비구니 정현 스님을 임명했다. 호법부 상임감찰에 비구니스님이 임명된 것도 처음이었다. 비구니스님들의 범계여부에 대해서는 비구니스님이 조사하도록 한다는 취지였다. 

지관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법장 스님의 갑작스런 입적으로 혼란을 겪던 조계종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550호 / 2020년 8월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