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6.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작품

기자명 김준희

현실에 더 충실해 실패 트라우마 극복한 거장

첫 교향곡 실패로 3년간 공백…연주여행하며 자신감 회복
‘큰 손의 천재 피아니스트’라는 기대가 오히려 작곡에 족쇄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염려’ 떨치고 마침내 걸작 탄생시켜

스타인웨이 피아노 앞의 라흐마니노프.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 2번 C단조, Op.18’은 가장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는 명곡이다. 이 곡은 그의 작곡 활동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의 작품이다. 17세 때 첫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고 작곡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에게, 첫 교향곡 초연의 실패는 크나큰 시련이었다. 그는 악계의 혹평으로 인해 자신감을 잃은 채 우울증을 앓으며 3년 이상을 아무런 작품도 쓰지 못했다. 다행히 모스크바 사설 단체의 오페라에서 지휘를 하며 음악활동을 계속 할 수 있었다. 그는 연주여행을 하며 유럽, 미국, 영국 등에서 작품들을 연주할 수 있었고, 가는 곳 마다 찬사를 받았다. 런던의 음악협회에서는 라흐마니노프에게 그의 관현악곡과 피아노 작품을 소개해달라는 제의를 해왔다. 

라흐마니노프는 첫 번째 협주곡 보다는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길 원했고 러시아로 돌아와 다시 작곡을 결심했다. 우울증이 재발하는 듯 했지만 아마추어 음악가이자 의사인 니콜라이 달 박사에게 치료를 받은 후 극복할 수 있었다. 1900년부터 피아노 협주곡 작곡에 몰두하기 시작한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피아니즘과 정교한 오케스트레이션을 바탕으로 역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첫 악장의 꾸준하면서 절도 있는 진행, 두 번째 악장의 꿈꾸는 것 같은 달콤한 선율, 마지막 악장 끝부분의 주요 선율의 고조됨, 이 모든 것들과 여러 인상적인 특징들이 조화를 이뤄 이 작품은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며 가장 사랑받는 작품으로 남게 된다. ‘크렘린의 종’이라고도 불리는 첫 악장의 도입부에서부터 마지막 악장의 휘몰아침까지 특유의 피아니즘을 빠짐없이 담고 있는 이 작품으로 라흐마니노프는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라흐마니노프는 스스로 피아노 독주곡을 작곡하면서 음악적으로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첫 협주곡의 무난한 발표 후에 독주곡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프렐류드 C#단조, Op.3-2’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 곡은 ‘환상적 소품(Morceaux de fantaisie)’의 두 번째 곡으로 ‘종’이라는 부제와 어울리는 라흐마니노프의 개성과 함께 러시아 특유의 침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 기교적으로 크게 어렵지 않은 이 곡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곡이기도 하다. 

프렐류드 작품3-2 자필악보.

라흐마니노프는 말년에 이런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피아노 독주곡을 작곡하는 것은 교향곡이나 협주곡을 작곡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피아노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에도 정통한 라흐마니노프를 보면 상당히 의외의 일이다. 길고 큰 손을 가진 천부적인 피아니스트였기에 오히려 작곡을 하는데 있어서는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 또한 모든 작곡가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선보이는 첫 번째 교향곡의 초연 실패는 그에게 트라우마와도 같았다. 

어린 시절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에서 작곡과 피아노를 함께 전공했었다. 작곡 공부는 피아니스트로서의 발전을 돕는 일이었지만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이 작곡가로서의 활동에 언제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작곡가로서 훌륭한 작품을 남기면서도 그에게는 피아니스트로서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놓을 수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몇 마디 정도 손가락이 길었고 테크닉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났다. 그래서 라흐마니노프에게는 훌륭한 피아노 독주곡을 남기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중아함경’ 제43권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과거를 쫓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염려하지 말라.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 오로지 현재 일어난 것들을 관찰하라.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말고, 그것을 추구하고 실천하라. (165 온천림천경)’ 삶의 지침과도 같은 부처님 말씀이다. 라흐마니노프는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피아노 연주와 좋은 작품을 써야한다는 압박감의 돌파구를 찾았다. 훌륭한 지휘 활동으로 새 작품의 발표를 의뢰받은 것은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결과와도 같았고, 달 박사와 함께 꾸준한 치료도 계속했다. 마치 ‘중아함경’의 말씀을 실천한 것만 같은 그의 다각도 노력은 트라우마와도 같은 실패의 기억을 지우고, 앞으로 올지도 모르는 또 다른 실패에 대한 두려움까지 극복했다. 두 번째 피아노 협주곡의 성공은 그에게 훌륭한 피아노 작품을 쓸 수 있는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10개의 프렐류드, Op.23’ ‘13개의 프렐류드, Op.32’는 세련된 연주능력이 요구되는 작품들이다. 풍부한 음악적 흐름으로 테크닉적인 부분을 더욱더 부각시킬 수 있는 이 곡들은 출판되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전통적인 프렐류드의 형식이 확장되어 발전된 이 곡집은 바흐나 쇼팽의 작품들처럼 조성구조에 기반을 두지 않고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다.  또한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에서 타나예브와 아렌스키에게 배운 대위법적 표현법도 갖추고 있다. 특히 Op.23의 다섯 번째 곡인 G단조 프렐류드는 전형적인 화성변화를 느낄 수 있는 리드믹컬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곡이다. 스케일이 큰 당당한 행진곡풍 작품이며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고독한 느낌의 서정성이 돋보이는 중반부를 거쳐 후반부로 갈수록 주제의 극적인 긴장감이 고조된다.

라흐마니노프의 독립적인 작품 중 가장 수준 높은 곡은 단연 ‘회화적 에튜드(소리 그림에 의한 에튜드, Etude-tableaux)’이다. Op.33과 Op.39, 각각 9개 곡들로 이루어진 두 작품집은 기교와 음악적 능력, 그리고 시적이고 회화적인 능력을 고루 표현해야 하는 곡들이다. 쇼팽의 에튜드처럼 한 가지 테크닉적 요소를 중심으로 만들지 않고 기술적으로 강조하고 싶은 소재들이 곡 전반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 있다. 특히 Op.39의 마지막 곡인 D장조 에튜드는 라흐마니노프의 작품들 중 가장 기교적으로 어려운 곡 중의 하나로 꼽힌다. 

라흐마니노프는 테크닉과 파워, 감수성을 모두 갖춘 피아니스트였기에 그가 직접 연주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작곡한 기술적·음악적으로 난해한 곡들은 당대의 연주자들 뿐 아니라 현재의 피아니스트들도 도전적인 숙제를 준 것과도 같다. 지나간 일에 지나치게 근심을 두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일에 마음을 쓰며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일은 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라는 ‘중아함경’의 말씀처럼 스스로를 성찰하고 극복해 낸 라흐마니노프. 긴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하는 이때, 독보적인 세련된 정서를 지닌 라흐마니노프의 작품들로 피아니스트로서의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

김준희 피아니스트 pianistjk@naver.com

 

[1550호 / 2020년 8월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