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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와스뚜(vastu)는 곧 육경(六境)’

기자명 현진 스님

지속적으로 머물러 있거나 유지하고 있는 상태

구마라집 스님은 法으로 보고
현장 스님은 事로 번역했지만
명사적 의미보다 동사적 성격
우리말 번역은 ‘일삼음’이 적당

제14 이상적멸분 중반부에, 앞서 살펴보았던 ‘와스뚜(vastu)’가 다시 등장한다. 먼저 해당문장의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문은 다음과 같은데, 원문에 비해 제법 축약된 번역문에서 ‘와스뚜’에 해당하는 번역어는 ‘法’이다. “만약 보살이 마음을 法에 머문 채 보시를 행한다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이내 보이는 것이 없는 것과 같으며, 만약 보살이 마음을 法에 머물러 두지 않은 채 보시를 행한다면 마치 눈이 있는 사람이 햇빛이 밝게 비치면 갖가지 빛깔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동일한 부분의 현장 스님 번역은 범어원문과 거의 차이가 없는데, ‘와스뚜’가 ‘事’로 번역되어 있다. “비유컨대 마치 한 선비가 깜깜한 방 안에 들어가면 보이는 것이 전혀 없는 것과도 같나니, 보살이 만약 事에 떨어진다면 이른바 事에 떨어져 보시를 행하게 되므로 그 또한 거듭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할지니라. 비유컨대 마치 눈 밝은 선비가 밤을 지나 새벽이 되어서 햇볕이 나왔을 때 갖가지 빛깔을 보는 것과도 같나니, 보살이 事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이른바 事에 떨어지지 않고 보시를 행하게 되므로 그 또한 거듭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할지니라.”

이에 해당하는 범어원문을 직역해보면 이러하다. “그것은 또한 마치 어둠속에 들어간 사람이 어떤 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렇게 와스뚜에 떨어진 보살은 와스뚜에 떨어져 베풂을 행한다고 보여야 한다. 그것은 마치 시력을 갖춘 사람이 밤이 새고 태양이 떠올랐을 때 여러 가지인 형색들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렇게 와스뚜에 떨어지지 않은 보살은 와스뚜에 떨어지지 않고 베풂을 행한다고 보여야 한다.”

앞서 제4 묘행무주분에서 와스뚜란 ‘전체 흐름의 한 부분을 고정된 실체로 인식하여 그것에 집착’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와스뚜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행해야 한다는 말은 우리가 보시를 행할 때 인식된 특정한 상황만을 진실된 것으로 여기고 그것에 집착한 채 보시를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와스뚜를 이렇게 풀어쓰지 않고 교리용어로 이르면 곧 육경(六境, 색・성・향・미・촉・법)이다. 그러므로 보시를 행할 때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대상인 육경에 대해 그 무엇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그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은 채 보시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범어 ‘vastu’는 동사 ‘√vas(살다, 머물다)’에 조사 ‘­tu’가 첨부되어 형성된 중성명사로서, 자리・장소 혹은 존재・참됨 등의 뜻을 지닌다. ‘√vas’는 또한 어떤 상태에 지속적으로 머물러있거나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동사이기도 한데, 그러한 유동적인 의미가 고정적인 의미의 ‘六境’보다 ‘금강경’에 쓰여진 ‘vastu’가 나타내고자 하는 본뜻이라 할 수 있겠다.

한문 ‘事’는 글자의 연원에 따르면 신에 대한 기원의 말을 써서 나뭇가지에 맨 팻말을 손에 든 모양에서 온 상형자(象形字)에 해당하며, 제사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그 행위를 나타냄을 기본으로 하여 어떤 일이나 그 일을 수행한다는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현장 스님이 와스뚜를 事로 옮긴 데는 단순히 ‘일’이라는 현대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자원(字源)에 근거하여 ‘맞닥뜨린 어떤 상황에 있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애착을 갖고 행위를 일삼다’라는 의미에서 그 번역어로 채택된 것이라 유추해볼 수 있다. 그래서 이 문단에서 事의 적합한 우리말 번역어는 ‘일삼음’ 정도가 되겠다.

한문 ‘法'은 글자의 연원에 따르면 재판에 져서 더럽혀진 신수(神獸)인 치(廌)를 가죽부대에 넣어 물[水]에 던지고 가버리는[去] 모양에서 온 회의자(會意字)에 해당하며, 법이나 규칙 혹은 그러한 것을 따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구마라집 스님 또한 자원(字源)에 근거한 의미로 法자를 가져다 썼다고 볼 수 있는데, 명사적인 法이란 의미보다는 다분히 동사적인 ‘정해진 것을 따르다’란 의미가 그것이다. 그래서 이 문단에서 法의 적합한 우리말 번역어는 ‘따름’ 정도가 되겠다.

이처럼 ‘금강경’에는 글자의 해석에 있어서도 ‘와스뚜’하지 않아야 읽히는 것이 있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51호 / 2020년 9월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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