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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32대 총무원장 지관 스님 - 중

전임 총무원장 숙원 98년 멸빈자 사면 해결…종단 안정 토대 마련

조계종 총무원장으로는 처음으로 ‘사형제도’ 반대 공식 표명
종교간 화합·환경운동에 관심…‘불교환경의제21’ 선포하기도
마곡사·관음사 주지 선출 문제로 잡음…종단 내홍으로 시름

지관 스님은 2006년 9월27일 서울 조계사에서 불교환경실천 운동을 담은 ‘불교환경의제21’ 선포식을 가졌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지관 스님은 뛰어난 학승이었다. 오랜 기간 해인사 강주와 동국대 교수를 역임해 조계종 내에서 상당수 스님들이 문중을 떠나 제자그룹으로 분류됐다. 그렇기에 지관 스님에게 드러내놓고 반기를 들 수 있는 스님이 많지 않았다. 여기에 해인사 주지와 중앙종회 부의장, 동국대 총장 등을 거친 종무 경험은 32대 총무원 집행부가 연착륙하는 배경이 됐다. 

‘종단안정과 화합’을 기치로 내건 지관 스님의 첫 행보는 98년 멸빈자 사면이었다. 94·98년 멸빈자 사면은 전임 총무원장 정대·법장 스님이 역점을 두고 추진한 일이었다. 그러나 중앙종회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이런 가운데 지관 스님은 2005년 11월 총무원장 취임과 동시에 98년 종단사태로 멸빈된 정우·성문·원학·현소 스님의 승적을 복원했다. 멸빈 징계가 확정돼야 승적이 말소되지만, 이들은 아직까지 징계가 확정된 상태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법보신문(2003년 3월26일, 2005년 11월21일, 2006년 2월16일, 2009년 8월25일자)’에 따르면 ‘98년 멸빈자 징계확정여부 논란’은 1999년 10월1일 29대 총무원장 고산 스님이 ‘총무원장 부존재확인소송’에서 패하면서 비롯됐다. 총무원장 선거과정에서 불법적 요소가 발견돼 고산 스님의 총무원장 당선이 무효라는 판결이었다. 이는 종단 내부에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켰다. 고산 스님이 총무원장 당시 내린 징계 등 모든 종무행위도 무효가 될 수 있었다. 

그러자 중앙종회는 1999년 10월, 144회 임시회를 열어 ‘해종행위조사특별위원회법 등에 의한 징계자들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특별심사위원회를 구성해 징계 여부에 대한 재심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특별심사위원회는 1998년 징계자에 대한 재심사를 진행하면서도 멸빈자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멸빈자를 재심사 대상에 포함시킬지 여부에 대한 논란 때문이었다. 특별심사위원회는 2001년 9월19일 7차 회의까지 열어 멸빈자에 대한 재심사 여부를 논의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판단을 유보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98년 멸빈자 징계확정여부 논란이 재점화된 것은 2003년 7월24일이었다. 이날 조계종 법규위원회는 “98년 종단사태 징계자들은 특별법에 의해 심사하는 것이 적법하다”고 결정했다. “98년 멸빈자도 재심사 대상이고, 재심사가 진행되지 않았기에 이들의 징계는 확정되지 않은 것”이라는 취지였다. 총무원장 법장 스님은 법규위원회 결정에 따라 98년 멸빈자에 대한 승적복원을 추진했다. 그러나 야권인 금강·보림회의 거센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관 스님이 98년 멸빈자 승적을 복원한 것은 ‘98년 멸빈자 징계확정여부 논란’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었다. 종헌개정 없이 98년 멸빈자를 사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다시 소집된 특별심사위원회는 2006년 3월9일 98년 종단사태로 멸빈된 8명의 스님 가운데 월탄·정우·원학·현소·남현·성문 스님에 대해 공권정지 10년, 정영 스님에 대해 ‘문서견책’을 결정했다. 다만 전 조계사 주지 현근 스님에 대해서는 원심과 같은 멸빈을 판결했다. 그러나 현근 스님도 2009년 8월 법규위원회의 징계유예 결정으로 승적을 회복했다. 이에 따라 98년 멸빈자 사면논란은 일단락됐다. 94년 멸빈자 사면은 여전히 남은 과제였지만, 지관 스님이 취임과 동시에 98년 멸빈자 사면문제를 풀어낸 것은 종단화합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종단 현안을 풀어낸 지관 스님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 무렵 세간에서는 ‘사형제도 폐지’여부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지관 스님은 2006년 3월30일 성명을 내고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박탈하는 사형은 ‘제도적 살인’”이라며 “가장 존엄한 생명을 빼앗는 사형 제도를 폐지하고 종신형을 입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조계종 총무원장이 사형폐지 의견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은 처음이었다. 스님은 한발 더 나아가 그해 5월1일 서울구치소를 방문해 사형수를 위한 수계법회도 진행했다. 지관 스님의 이 같은 행보는 사회적으로 큰 울림을 줬다. 

지관 스님은 종교간 화합에도 앞장섰다. ‘연합뉴스(2006년 4월27일자)’에 따르면 스님은 그해 4월27일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서울 성북동 성가정입양원을 찾아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정진석 추기경과 환담했다. 조계종 총무원장이 가톨릭 복지시설을 찾은 것은 처음 있는 일로 종교간 화합을 기원하는 의미로 해석됐다. 그해 12월21일에는 정진석 추기경이 조계종 사회복지시설인 승가원을 답방하기도 했다. 

지관 스님은 환경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스님은 그해 9월27일 서울 조계사에서 ‘불교환경의제21’ 선포식을 개최했다. ‘불교환경의제21’은 부처님 생명·생태사상을 사회에 구현하고 ‘환경’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대한 불교적 대안을 제시하자는 취지였다. 조계종은 이날 공동실천사업으로 △생태사찰 만들기 △빈그릇 운동 △친환경 공양미 운동 △환경 5계지키기 등을 제시했다. ‘빈그릇 운동’에는 불자뿐 아니라 일반인 등 150만명이 동참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06년은 조계종이 폐사지에서 출토됐거나 일제강점기에 반출된 성보문화재 반환에 적극 나서면서 큰 성과를 낸 해이기도 했다. 양주 회암사는 그해 2월1일 문화재청과 양주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되찾았다. 오대산 월정사도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돼 도쿄대에 소장돼 있던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환수에 나서 7월7일 돌려받았다. 그러나 2004년부터 이어져 온 삼성 리움미술관 소장 가평 현등사 사리구 반환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이 사리구는 원래 현등사 3층 석탑에 봉안돼 있었지만, 어느 시기에 도난됐다. 그러다 삼성 리움미술관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현등사는 2004년 삼성문화재단에 반환을 요구했다. 사리구 표면에 ‘운악산 현등사’라는 명문이 새겨져 원소유처가 현등사였음이 확인됐지만, 삼성 측은 “1981년 문화재수집가로부터 적법한 절차로 구입한 것”(연합뉴스, 2006년 4월19일)이라며 반환을 거부했다. 결국 현등사는 법원의 판단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울서부지법 민사합의13부는 7월20일 “‘운악산 현등사’가 지금의 현등사인지 인정할 근거가 부족한 데다 조선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찰의 동일성이 줄곧 유지돼 왔다고 보기 어렵다”며 “현등사라는 이름이 같다 하더라도 별개의 권리주체로 보는 게 타당하다”(한겨레신문, 2006년 7월20일)고 삼성 측의 손을 들어줬다. “옛 현등사와 지금의 현등사는 동일성 없는 별개의 사찰”이라는 법원의 판결은 불교계의 공분을 자아냈다. 이때부터 사리구 반환운동은 현등사를 넘어 조계종 전체의 문제로 확산됐다. 

조계종 총무원은 8월2일 성명을 내고 “재판부의 판결은 1700년 한국불교의 역사와 전통을 간직해온 조계종의 법통을 전면 부정한 것”이라며 “현등사 사리구 반환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라고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조계종은 ‘사리 제자리 찾기 추진위원회’를 발족했다. 추진위는 조계사 및 전국교구본사 법원의 판결에 항의하는 현수막 게시, 사리친견 법회개최, 천만불자 서명운동 등을 진행하기로 했다. 삼성을 향한 비난여론이 급격히 확산됐다. 결국 삼성문화재단 그해 9월25일 조계종 총무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현등사 사리구를 반환하겠다고 밝혔다. 이로써 2년 넘게 끌고 온 현등사 사리구 반환 문제도 일단락됐다. 

2007년 들어 정부는 국립공원입장료를 전면 폐지했다. 국민들의 여가와 편익을 위해 자연경관이 좋은 국립공원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정부의 일방적인 국립공원입장료 폐지로 불교계는 곤혹스런 상황에 빠지게 됐다. 국립공원입장료에는 사찰이 받는 문화재관람료도 포함돼 있었다. 사찰들은 국립공원관리공단이 합동 징수한 문화재관람료를 문화재 유지 관리하는 비용으로 사용해 왔다. 그럼에도 정부가 문화재관람료에 대한 아무런 협의 없이 국립공원입장료를 폐지하면서 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사찰들은 단독으로 문화재관람료를 징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다보니 사찰들은 문화재관람료 징수문제로 몸살을 앓아야 했다. 탐방객들과 마찰을 빚는 사례가 속출했으며, 불교계를 향한 비판여론도 커졌다. 불교계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정부가 사찰 땅이 포함된 지역을 일방적으로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입장료를 받아오다 불교계와 아무런 상의 없이 입장료를 폐지하면서 빚어진 일이었지만, 그 책임은 고스란히 사찰이 떠안게 된 상황이었다. 조계종은 강하게 반발했다. 조계종 교구본사주지회의는 1월12일 “사찰사유지를 국립공원구역에서 해제해 달라”고 요구했다. 조계종의 반발에 다급해진 정부는 1월17일 ‘문화재관람료 협의체 구성’을 제안하며 협의에 나섰지만 입장차를 좁히지 못했다. 현재까지도 문화재관람료 문제는 조계종이 풀어야 할 현안 가운데 하나다.

이러는 사이 종단 내부에서 중앙종회의원, 교구본사주지선출 등 선거로 인한 잡음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조계종 선거에서) 6억원을 쓰면 당선되고 4억원을 쓰면 떨어진다”는 ‘6당4락’이라는 말이 일반언론에 보도(경향신문, 2006년 10월25일)되고, 사찰말사 주지 임명대가로 수억원을 받은 현직 마곡사 주지가 구속되는 일(연합뉴스, 2007년 1월2일)도 있었다. 4월에는 제주 관음사 주지선출 문제로 세간의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전임 주지 측이 일방적으로 사찰을 운영하고, 종헌종법을 무시하며 차기 주지 선출에 나서자 총무원이 제동이 걸고 나섰다. 총무원은 위법한 관음사 주지선거를 중단시키고 직무대행을 임명해 사찰 정상화에 나섰지만, 전임 주지 측이 이를 거부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결국 총무원은 8월23일 사찰인계 강제집행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해 세간으로부터 따가운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2007년 6월 동국대에서 ‘신정아 허위학력’ 문제가 불거지면서 조계종은 위기의 늪으로 빠져 들었다. 지관 스님의 고민도 차츰 깊어졌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552호 / 2020년 9월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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