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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간경공덕’과 ‘깨달음’

기자명 선응 스님

경전 읽는 소리만 들어도 인연 공덕

경전지혜 배움은 금강 먹는 것
칠보를 보시하는 것보다 수승
경전 읽고 스스로 향해서 공부
글자나 알고 읽으면 깨침 불가

불교의 핵심 수행은 ‘선(禪, dhyāna,jhāna)’이다. 붓다는 ‘부정‧자비‧수식‧인연‧염불’의 ‘5정관법’을 설하셨다. ‘선정’의 과정은 생각을 ‘멈춤’과 ‘집중’으로 ‘연기‧고통‧무상‧무아’의 ‘법성’을 깨닫는다. 

중국은 안세고(148~180)와 구마라집(334~413)이 ‘선경(禪經, Dhyāna-sutras)’을 한역한 후 인도 달마(382~536)대사가 ‘선법’을 전했다. 인도에서는 10세기 이슬람교도 침략 후 쇠퇴하였고, 18세기 미얀마에서 ‘마음챙김경(Satipaṭṭhāna-sutta)’과 ‘청정도론(Visuddhimagga)’을 의지해서 샤도우(Ledi Sayadaw, 1728~1816)와 위말라((U Vimala, 1899∼1962) 스님이 ‘빨리경전’의 ‘관법’을 세계화했다. 

대승경전으로부터 ‘선정’의 방편으로, ‘염불, 진언, 참회, 간경, 사경’ 등이 일반화된 수행이 되었다. ‘대승경’을 논리적으로 완성한 용수(150~250)와 삼론종을 성립한 혜원(334~416)도 ‘염불수행’을 강조했듯이 ‘염불’은 ‘선정삼매’의 수단이다. 

53장에서는 경전의 공덕을 설한다. “경전 읽는 소리를 들으면 (반야경) 귀에 경이 있는 인연이 되며, (법화경) 기뻐하는 복덕이 따른다. 허깨비 같은 몸은 다함이 있지만 진실한 수행은 없어지지 않는다.” 

이 내용은 ‘치문경훈‧석문등과기서’에서 경전을 읽는 소리만 들어도 그 인연과 공덕이 있다는 것이다. ‘치문경훈’은 북송의 택현온제(?~1130)선사의 ‘치림보훈’ 1권을 지현영중(12세기) 스님이 1313년 편집했다. 태고보우(1301~1382)선사가 원나라에서 가지고 와서 유통시켰다.

해석하시길 “경전에서 지혜를 배우는 것은 금강을 먹은 것과 같아서 없어지지 않고 ‘칠보’를 보시하는 것보다 수승한 것을 밝힌 것이다. 영명연수(904~975)선사가 설하시길, ‘듣고 믿지 않아도 오히려 부처님 종자의 인연이 맺어지고, 배워서 성불하지 않아도 오히려 인천의 복보다 수승하다’”고 했다. 

‘화엄경’에서 “비유하면 장부가 금강을 조금만 먹어도 끝내 소화시키지 못하고 그 몸을 뚫고 밖으로 나와 버린다. 왜 그런가? 금강은 몸속의 더러운 것들에 뒤섞여 함께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여래께 작은 선근을 심는 것도 이와 같다. 일체 유위의 모든 행과 번뇌의 몸을 뚫고 지나서 함이 없는 구경지에 이른다. 왜 그런가? 이 적은 선근이 유위의 모든 행이나 번뇌와 함께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내용이다. 연수선사는 법안종 3조이고 ‘종경록’ ‘만선동귀집’ ‘유심결’을 지었다. 

54장에서는 “경전을 읽을 때 만일 스스로를 향해서 공부를 하지 않으면 비록 수많은 대장경을 다 보았다고 해도 오히려 이익이 없다”고 했다. ‘종경록’에서 글만 읽고 논하는 자는 “손가락을 보고 달의 본체라고 하는 것과 같이 자성을 보지 못하고 교설과 문자만을 판단하는 것이다”라고 한 내용이다. 

다시, “이것은 어리석은 공부는 마치 봄날에 새가 지저귀고 가을밤에 벌레가 우는 것과 같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규봉종밀(780~841)선사가 설하기를 ‘글자나 알고 경을 읽는 것으로는 원래 깨달아 증득할 수 없고, 글을 새기고 뜻을 해석하는 것으로는 오직 탐욕과 성냄과 삿된 견해만 치성할 뿐이다’”라고 해석하셨다. 

‘치문경훈’에서 무진거사(1044~1122)가 “경‧율‧론의 삼장이 그대 자신이고, 그대가 곧 삼장이다”라고 설한 내용과, 종밀의 ‘도서’에서 ‘자신의 마음’을 알아서 통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내용이다. 

55장은 “배움이 도에 이르지도 못했는데도 보고 들은 것을 자랑하고 뽐내려고 한갓 구설로 변론하며 서로 이익을 다투는 자는 마치 화장실에 단청을 하는 것과 같다”이다. ‘선림보훈‧서호기문’에서 법원녹공(991∼1067)이 도오사가진(?~1064)에게 한 말을 인용하였다. 

해석하시길 “(‘치문경훈’에서) 특별히 말세에 어리석은 배움을 밝혔다. 배움이란 본래 자성을 닦는 것인데 온전히 사람을 위해서 익히는 이것은 진실로 어떤 마음인가?”라고 한 이 내용은 자성을 깨달아 불조의 혜명을 잇는 것이 불자의 일이지 세상에 쓰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선응 스님 동국대 불교학 박사 sarvajna@naver.com

 

[1552호 / 2020년 9월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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