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결역(缺譯)
36. 결역(缺譯)
  • 현진 스님
  • 승인 2020.09.27 15:16
  • 호수 15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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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역·직역에서 발생한 해석의 차이

구라마집 스님은 의역에 중점
현장스님, 범본에 충실한 번역
부분 차이 있어도 내용은 같아

지금까지 가장 널리 읽히는 ‘금강경’ 한문본은 구마라집 스님이 범본을 번역한 것이다. 그것의 구경무아분 뒷부분에 이르러 세존께서 수보리에게 “보살이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케 하리라고 스스로 말한다면 그를 보살이라 일컬을 수 없다. 왜냐하면 보살이라 일컬을 만한 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일체법에 사상(四相)이 없다고 말한다”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등장한다.


세존께서 수보리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전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는데, 범본과 현장 스님의 번역본을 살펴보면 그 중간에 결역(缺譯)된 부분이 존재한다. 즉, “보살이라 일컬을 만한 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부분이 범본엔 “보살이라 일컬을 만한 법이 존재하겠느냐?”라고 세존께서 수보리에게 물어보시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세존의 질문에 답하는 수보리의 “보살이라 이름 할 조금의 법도 없습니다”라는 내용 및 수보리의 답변을 들으시고 “유정이란 유정이 아니라고 여래께서 말씀하셨으니, 그래서 유정이라 이름한다”라는 세존의 말씀이 결역된 채 “그래서 붓다는 일체법에~”라는 내용으로 바로 이어질 뿐이다.

사실, 결역된 부분은 내용상 이미 수없이 반복 언급되는 부분이어서 설령 빠트리더라도 문맥의 흐름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을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범본을 기준으로 구마라집 스님이 일정한 문장 전체를 번역하지 않은 것은 이곳이 처음이 아니라 법회인유분부터 등장하여 구경무아분 이전까지 이미 네 곳이나 나타나는데, 선현기청분에선 아예 그 첫머리에 ‘그때 수보리도 대중들과 함께 앉아있었다’는 부분이 결역되어 있다. 어차피 ‘그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일어나…’라는 문장에 앞서 ‘수보리가 대중들과 함께 앉아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도리어 연문(衍文)이라 해도 그리 틀린 표현은 아닌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문학작품이 아니라 경전의 글귀인 까닭에 어떤 자세가 보다 적절한 것인지는 한 차례 더 고려해 보아야할 것 같다.

구마라집의 ‘금강경’에는 몇몇 문장이 결역된 것 외에 내용이 축소되어 번역된 것도 여러 곳에 나타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4상과 주・수・항에 대한 언급이다. 먼저 ‘금강경’의 대표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인 4상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일컫는데, 현장 스님의 번역본에는 4상에 5상이 더한 총 9상이 서술되어 있다. 현장 스님이 거의 직역에 가까운 번역을 한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정작 널리 통용되는 범본에는 4상뿐인 것이 조금은 혼란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추가 언급된 5상은 모두 아상의 확대개념으로서 힌두교의 비쉬누파 등 특정 종파 등에서 고정불변의 실체로 간주하는 것들인데, ‘대반야경’에도 9상으로 나타나는 까닭에 현재 전해지는 범본에 4상뿐이라고 현장 스님이 억지로 9상으로 늘려놓은 것이라 보는 것도 무리이다.

주・수・항의 문제란, 범본의 내용을 기준할 때, 제2 선현기청분에서 수보리가 세존께 대승불자로서 깨달음의 마음을 낸 이는 마음을 어떻게 머무르게[住] 하고 어떻게 닦아야[修] 하며 어떻게 항복시켜야[降]하는가를 여쭙는 내용이 있다. 현장 스님은 이 부분을 범본처럼 세 가지 항목으로 옮긴 데 반해 구마라집 스님은 닦음 항목은 생략한 채 머무름과 항복시킴의 두 항목으로만 서술하고 있다. 그것을 후대의 주석가들은 어차피 마음을 항복시키려면 닦는 과정이 필수적이니, 구마라집 스님의 경우는 과정의 수(修)를 결과의 항(降)에 들어있는 것으로 보면 다름이 아니라고 해석하고 있다.

구역(舊譯)과 신역(新譯)을 대표하는 두 스님이 계셨던 시기는 300년이 더 차이가 난다. 현장 스님은 구역이 범본에 비해 내용의 출입이 심할 것이라 여기고 직접 인도로 가서 원본을 구해서 온전한 번역본을 이루려는 마음에 나라에서 금하였고 목숨까지 걸어야 되는 인도로의 만행을 떠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후대 연구가들은 현장역은 범본의 온전한 직역(直譯)으로 여긴다. 번역문의 차이는 인도・중국의 문화 및 저본이 된 판본의 차이에서도 왔겠지만, 결국엔 뜻옮김[意譯] 하느냐 말옮김[直譯] 하느냐에 가장 큰 원인이 있는 것 같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55호 / 2020년 9월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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