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소박한 정업 수행
33. 소박한 정업 수행
  • 허만항 번역가
  • 승인 2020.09.27 17:07
  • 호수 15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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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고 소박한 마음으로 정업 닦아야 극락

정업을 닦는 사람이 요령부리면 평범을 싫어해서 일 망쳐
종승과 교승 통달해도 착실히 염불한 촌부보다 못한 이유
평범하고 소박한 가풍 지키면 극락에 태어남 반드시 예견
인광 스님은 평범하고 소박하게 지속적으로 염불하는 이가 극락에 태어날 수 있다고 했다. 중국 불자들도 항상 절을 찾아 기도하기를 반복한다. 사진은 중국 한 사찰에서 불자들이 스님들 축원과 함께 기도하는 모습.

제156칙: 자기 본분을 다하라.

다른 사람은 수행을 가르칠 때 현묘한 부분에 진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는 자기 본분을 다하도록 지휘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 본분을 다할 수 없으면 설사 참선과 교학을 하나하나 근원을 철저하게 궁구할지라도 삼세부처님의 원수가 될 뿐이니, 하물며 근원을 철저하게 궁구함이 없는 일이겠는가.

제157칙: 일심으로 염불하라.

피를 뽑아서 사경하는 일을 잠시 시도하는 것을 늦추고 우선 일심으로 염불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라. 아마 피가 줄어들고 정신이 쇠약해져 오히려 수행의 장애가 될지도 모른다. 몸이 건강한 후에야 도가 융성하다. 범부 지위의 사람이 법신대사의 고행을 본보기로 삼아 본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일심을 얻을 수만 있다면 법문마다 원만하게 둥글게 갖추어진다.

제158칙: 세속과 진리는 둘이 아니다.

고학년(高鶴年) 거사는 세속에서 진리를 닦으며 인연에 따라 정진하였다. 한마디 아미타불 부처님 명호를 집지하여 자신의 본명원진(本命元辰)으로 삼았고, 참괴(慚愧, 부끄러워함) 두 글자를 끌어안고 성인에 들어가는 계제(階梯)로 여겼다. 성지 명산을 돌아다니며 탐방 사적을 기록하여 사람들의 안목을 여는 일에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으니, 확실히 법을 위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걸음을 멈추고 그만 쉴 수도 있을 것 같다. 만약 여전히 널리 다니고자 한다면 마땅히 정신으로 다니되 몸으로 다닐 필요는 없다. 아미타불 삼경과 ‘화엄경’ 일부이면 탐방 코스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칠보 연못에 편안히 앉아서 화장 세계를 두루 다니면 정신은 다닐수록 몸이 더 건강해지고, 두루 읽을수록 마음은 정일(精一)해질 것이다.

고요함에 즉 한 생각도 얻을 수 없고, 비춤에 즉 만덕이 본래 갖추어져 있다. 세속과 진리가 둘이 아니고 천세 고금이 지금 이 순간 생각에 나타나니, 가없는 찰토 바다를 거두어 일심으로 돌아간다. 별빛을 몸에 받고 달빛을 머리에 이고 다니며, 세찬 비바람을 무릅쓰는 당신과 깊은 연못에 임해 벌벌 떨고, 가파른 바위를 밟으며 놀라고 두려워하는 사람을 비교하면 하루와 일겁의 격차에 그치지 않는다. 저의 견해는 이러한데, 거사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제159칙: 정업(淨業)을 전수(專修)하라.

각하께서는 아직 삼십이 안 되었는데 이미 쇠약한 모습을 보이시니, 확실히 번잡한 것을 버리고 간단한 것으로 나아가 정업(淨業)을 전수(專修)하십시오. 정업에서 큰 성취가 있은 후에 다시 다른 법문을 홍양하십시오. 그래야 자신을 이롭게 하고 타인을 이롭게 하는 실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어도 구경은 아닐 것입니다.

제160칙: 평범하고 소박한 마음으로 정업을 닦으라.

정업을 닦는 사람은 조금도 요령을 부려서는 안 된다. 만약 요령을 부리면 평범한 것을 싫어하여 반드시 재주부리다 일을 망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왜 종승에 통달하고 교승에 통달한 사람이 항상 착실히 염불하여 더욱 실익이 있는 어리석은 촌부보다 못한 이유이다. 만약 기꺼이 이러한 평범하고 소박한 가풍을 지킨다면 극락에 태어남을 반드시 예견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극락에 태어나지 못함도 예견할 수 있다.

제161칙: 한마디 부처님 명호를 자신의 본명원진으로 삼아라.

염불법문은 필사적으로 거만한 일체지견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만이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지혜가 성인과 같을지라도 모두 내버려두고 한마디 부처님 명호를 자신의 본명원진으로 삼아 왕생을 구하길 서원하여야 한다. 설사 죽음이 핍박하여 행적을 고치도록 할지라도 얻을 수 없다, 이래야 총명한 사람이라 할 수 있고, 실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많이 알고 많이 봄으로 말미암아 의심을 결단할 수 없고, 오히려 착실히 염불하고 아무런 지식이 없는 사람이 더욱 이익을 얻기 쉬움을 모르겠는가.

제162칙: 자신과 타인을 모두 이롭게 하라.

보내온 편지를 보니, 당신이 큰 보리심을 발하였다 할 수 있다. 모쪼록 자신과 타인을 모두 이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기대한다. 그러나 당신은 “자신을 이롭게 하는 마음은 담담하고, 타인을 이롭게 하는 마음은 절절하다” 말한다. 나는 이 말도 매우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 자신을 이롭게 할 수 없으면 결단코 타인을 크게 이롭게 할 수 없으니, 양자에 대해 친소를 가리지 말아야 옳다. 그러나 타인을 이롭게 함은 바른 원 하나 일뿐, 자신을 이롭게 함에 반드시 심력을 해야 한다. 그러면 자신을 이롭게 하는 한쪽에 대해서 어떻게 담담할 수 있으면서, 함부로 대보살 신분을 배우려하는가?

제163칙: 정토오경을 청정심으로 독송하라.

당신은 ‘금강경’ 독송을 좋아하니, 응당 이 공덕으로써 왕생에 회향하면 곧 정토를 돕는 행이 된다. 정토오경의 공덕 또한 ‘금강경’에 못지 않다. 보낸 경서에서 먼저 내가 지은 서문을 상세히 읽으면 그 대의를 전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후에 다시 청정심으로 공경하며 독송하면 가없는 이익을 저절로 몸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제164칙: 마음을 거두어 들여 청정한 마음으로 염불하라.

옥봉법사의 행지는 좋으나, 도리는 매우 치우쳤다. 예를 들어 그가 말한 염불 4대 요결은 의도는 결코 나쁘지 않다. 어휘를 사용해 논설할 수 있으나 완전히 고덕과 상반된다. 염불은 “망상을 없애지도, 일심을 구하지도 못한다” 이는 완전히 정도에 벗어나는 잘못된 논설이다. 불경에서는 일심을 구하라고 가르치는데, 그는 구하지 말라 한다. 망상을 없애지 않고 어떻게 일심을 얻을 수 있는가?

대세지보살께서는 “육근을 모두 거두어 들여 청정한 염을 이어가라” 하셨다. 그는 산란한 마음으로 염불하라 가르치고, 마음을 거두어들임을 칭찬하지 않는다. 염불에 일체 장애가 없을지라도 삼매를 몸소 증득하고자 고요할 수 있으면 당연히 좋지만, 고요할 수 없어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는 고요함은 그르다 한다. 이는 명호를 집지하면서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부처님을 생각하는 뜻에 크게 어긋난다. 이러한 설법의 잘못은 정말 말로 다하기 어렵다.

허만항 번역가 mhdv@naver.com

 

[1555호 / 2020년 9월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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