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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구마라집의 의도

기자명 현진 스님

번역이 다르더라도 더 깊은 의미부여

각기 다른 범어지만 동일한 번역
알음알이로 아는 것은 본질 아냐
설령 틀렸더라도 더 의미가 깊어

구마라집 스님은 각기 다른 범어 3개에 대한 한문 번역어로 동일한 상(相)을 사용하여 ‘금강경’을 번역하였다. 첫째는 아상・인상 할 때의 ‘상’으로서 범어로는 산즈냐(saṁjñā)인데 음역은 ‘산야’요 의역은 ‘지식(知識)’이니, 그 반대어인 쁘라즈냐(prajñā)가 ‘반야’와 ‘지혜(智慧)’로 옮겨진 것에 맞춘 것이다. 둘째는 32상・80종호 할 때의 ‘상’으로서 범어로는 락샤나(lakṣaṇa)인데 일종의 징후로 드러나서 감각기관에 감지(√lakṣ)된 모양새를 가리키므로 ‘감지새’로 옮겨놓는다. 셋째는 범어로 니미따(nimitta)에 해당하는 ‘상’인데 섬세히 가늠(√mi)된 모양새를 가리키므로 ‘가늠새’로 옮겨놓는다.

‘지식’인 산즈냐와 ‘감지새’인 락샤나 및 ‘가늠새’인 니미따 등 셋은 다시 앎의 종류인 산즈냐와 모양새의 종류인 락샤나・니미따로 다시 나눌 수 있다. 그래서 비록 구마라집 스님은 셋 모두 동일한 상(相)으로 옮겼지만, 현장 스님은 앎의 종류에 속하는 산즈냐만을 상(想)으로 옮겨서 모양새를 나타내는 나머지 두 상(相)과 구분해놓았다.

그렇지만 지식과 감지새와 가늠새, 이 셋을 관장하는 주체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다면, 즉 무아론에 바탕하여 헤아려본다면 어차피 이 셋은 모두 반복된 것이 쌓여서 생긴 현상을 그렇다고 느낀 것일 뿐이며 일종의 온(蘊)의 결과물이기에 그렇게 둘과 하나로 구분할 필요가 없기도 하다. 마음을 셋으로 나누어 심・의・식으로 구분하면 마음이라고 여기는 것의 단계적인 흐름을 살펴볼 수 있듯이, 이 세 가지 또한 감지・가늠・앎의 순서로 나열해놓으면 이 셋 나름대로 단계적인 흐름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로부터 어떤 모양새가 감지됨[감지새, lakṣaṇa]이 반복되면 심(心)이라 번역된 찌따(citta, 감지된 것)를 3업을 쌓아 일으키는 능력으로 간주하는 것과 유사하며, 감지된 모양새를 지속적으로 가늠함[가늠새, nimitta]이 반복되면 의(意)라 번역된 마나스(manas, 생각)를 헤아리는 능력으로 간주하는 것과 유사하며, “아상이다” “인상이다” 할 때의 상은 감지된 것을 가늠하여 기억해놓은 알음알이를 불러내어 그것에 의존하여 앎[지식, saṁjñā]이 반복되면 식(識)이라 번역된 위즈냐너(vijñāna, 구별해 앎)를 구별하여 가리는 능력으로 간주하는 것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구마라집 스님이 그 셋을 모두 상(相)으로 번역해버린 까닭은, 앞서 언급한 것 외에도, 무엇을 지혜롭게 알지 못하고 알음알이로 안다는 것은 어차피 그것의 본질이 아닌 겉의 모양새만 알아 온전한 지혜가 아니기에 그저 감지되거나 가늠된 모양새와 별다르지 않다는 의미에서 락샤나・니미따와 동일한 범주에 놓아버린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여리실견분과 이색이상분에 나오는 ‘여래는 모습을 갖추었다 하여 보일 수 있겠느냐?’라는 내용에서 가리키는 상은 셋 가운데 락샤나(lakṣaṇa, 감지새)에 해당한다. 세존의 답변은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인데, 우리가 이 부분을 범본의 내용과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은 간략히 줄여놓은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 때문이다. 해당 부분의 범본 원문은 “모습이 갖추어졌다고 하는 바로 그만큼 헛되다 할 수 있으며, 모습이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바로 그만큼 헛된 것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여래는 모습[相, lakṣaṇa]과 모습 아님[非相, alakṣaṇa] 그 모든 것을 통해서만 보여질 수 있다”라는 해석 외에 별다른 해석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 가운데 ‘若見諸相非相'을 범본의 내용에 근거하여 ‘若見諸相與非相(만약 모든 상인 것과 상 아닌 것을 본다면)'으로 해석하지 않고 ‘若見諸相是非相(만약 모든 상이 상 아님을 본다면)’으로 해석한다면 분명 틀린 해석이 되는데, 그 틀린 해석으로 인해 더 깊은 의미가 우러나오게 되었으니, 그 상(相)이 감지새나 가늠새에 머물지 않고 지식(saṁjñā)까지 아우를 수 있음으로써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범어의 각기 다른 세 단어를 한문에서 같은 상(相)으로 옮긴 스님의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57호 / 2020년 10월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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