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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불사리의 종류- 진신사리와 법신사리

부처님 신골은 진신사리·경전은 법신사리

진신사리, 몸 전체가 사리인 전신사리·낱알 상태 쇄신사리로 구분
법신사리, 경전이 불신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인식에서 출발
우리나라는 사리신앙 대중화할 무렵 법신사리 개념 빠르게  전파

1987년 발견된 당나라 법문사의 불지(佛指)사리. 현전 유일한 부처님의 손가락뼈 사리로, 7세기 중국에서 성행한 진신사리 신앙의 일면을 보여준다.

불사리는 부처님의 유신(遺身)인데, 그를 가리키는 용어가 다양하여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에 조금 복잡한 면이 있다. 이런 까닭은, 부처님 육신에서 부처님의 정신을 찾고, 나아가 불교를 각계각층에 전파하기 위해 사리의 범위를 확대해 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개념이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불사리는 부처님의 신골(身骨, 혹은 遺骨 또는 靈骨)인 진신(眞身)사리,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불교 경전인 법신(法身)사리 등으로 크게 구분된다. 또 진신사리는 다시 전신(全身)사리와 쇄신(碎身)사리로 나뉜다. 전신사리는 신골의 일부가 아닌, 말 그대로 몸 전체가 하나의 사리라는 뜻이다. 달리 육신(肉身)사리라고도 한다. 부처님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리라는 의미이니, 비근하게 쓰는 예로 다보불(多寶佛)을 전신사리라고 칭하는 것이 그것이다. 부처님의 정신을 사리에 비유해 나온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서 석가모니가 열반한 뒤 다비를 하자 나온 사리, 그러니까 낱알 상태로 된 사리를 쇄신사리라고 한다(운허용하, ‘불교사전’, 동국역경원, 1961). 보통 우리가 말하는 사리가 바로 이 쇄신사리이다. 한편, 사리는 팔리어로 Śarīra인데 이는 전신사리를 뜻하는 단어이고, 쇄신사리는 따로 Dhātuya라고 불렀다는 견해도 있다(‘망월불교대사전’의 ‘사리’, 1936). 

그런데 ‘법원주림’의 ‘인증부’ ‘보살처태경(菩薩處胎經)’에 나오는 석가모니의 설법을 인용하여, “모든 부처의 전신사리는 이 땅 밑의 금강세계에 있다. 금강국토의 두께는 84만억 리이다. 모든 부처의 몸을 빻아서 얻은 사리가 다 그 국토에 있다”라고 나온다. 이는 전신사리란 보통 말하는 유골로서의 불사리가 아니라, 불사리로 상징되는 부처님의 순수한 정신과 가르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사리의 개념이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사리신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나온 가장 의미 있는 개념은 무엇보다 법신사리가 아닐까 한다. 불교 경전을 진신사리와 동격으로 여긴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혁명적인 새로운 사고(思考)였다고 할 만하다. 그에 따라 불교 경전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높아지게 되었고, 자연스레 불교 교리도 더욱 발전하였으니, 법신사리 개념의 성립은 사리신앙을 한 차원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법신사리의 개념을 잘 알아둘 필요가 있다.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1965년 석탑을 해체 수리하던 중 발견했다.

법신사리의 개념은, 불법의 정수가 불교 경전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므로 결과적으로 불신(佛身)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사실 이미 ‘금광명경(金光明經)’에 ‘오직 여여여여지(如如如如智)만이 있으니, 이것을 법신이라고 한다(惟有如如如如智 是名法身)’라고 하여 불신과 법신을 동일시한 확장된 개념이 나온다. 여여여여지는 모든 장애를 없애고 모든 선법(善法)을 갖춘 상태를 말한다(이기영, ‘불신에 관한 연구’, 1966). 

법신사리 개념은 이후 더욱 확장되어, 불교 경전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의발(衣鉢), 더 나아가 금․은․유리·수정․마노 같은 보석까지 그 범주 안에 넣었다. 그래서 사리장엄에 사용된 보석은 단순한 보석이 아니라 ‘인조(人造) 사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사리란 단순한 육신의 결정체가 아니라 진리 또는 불법을 나타내는 법신의 결정체로서 신앙 될 수 있다는 관념이 성립된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법신사리 개념은 언제부터 나타났던 것일까? 

7세기 후반 당나라의 현장·의정 등 구법승들이 인도에 다녀온 뒤 그들의 여행기를 통해 인도의 법신사리 봉안 사례와 관련 경전 등이 소개되었다. 이후 중국에서 법사리 개념이 정립되기 시작한 것 같다. 예를 들면 의정이 번역한 ‘욕불공덕경’에 “마땅히 사리를 공양해야 한다. 이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신골사리이고 다른 하나는 법송사리이다(當供養舍利 然有二種 一者身骨舍利二者法頌舍利)”라고 하여 법사리로 ‘연기법송(緣起法頌)’을 제시한 내용이 있다. 또 의정의 여행기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에도, “높이 5~6촌 되는 작은 탑을 조성하고 사경한 경문을 안치하였는데, 이를 ‘법사리’라고 한다(作小窣堵波高五六寸 書寫經文 以置其中 謂之法舍利也)”라고 나온다. 이를 통해 중국 사람들은 인도에서 나온 법신사리 개념을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크게 유행한 것 같지는 않다. 사리신앙 발전 초기에 왕실과 귀족 계층을 중심으로 감득과 감응 등 진신사리에서 나타나는 위력과 효험을 보다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장미란, ‘한국 사리신앙의 전래와 성격’, 2013). 그러다가 오대십국 시대의 오월국 이후인 10세기 무렵부터 법신사리 신앙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중 금판 ‘금강경’. 불교 경전을 진신사리와 동격으로 봉안했을 만큼 법신사리가 존숭되었다.

그에 비해서 우리나라는 사리신앙이 대중화할 무렵부터 법신사리 개념도 빠르게 퍼져나갔다.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 등 남아 있는 유물로 볼 때 늦어도 8세기 초에는 법신사리 신앙이 활발히 이뤄진 듯하다. 경전으로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특히 애호되었으니,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자세히 알아보겠다. 그 밖에 ‘금강경’ 또는 반야경 계열의 경전도 봉안되었는데, 그 대표적 예가 1965년 발견된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의 사리장엄이다. 

왕궁리 오층석탑에는 금판(金板) ‘금강경’ 19장과 더불어 별도의 유리 사리병 안에 진신사리 16매가 들어 있어, 진신사리와 법신사리가 함께 봉안된 사례로 기록된다. 사리 16매 중 5매는 1966년 영주 부석사 부근 폐사지의 삼층석탑 2기를 부석사 경내로 옮길 때 분안(分安)하였고, 나머지는 왕궁리 오층석탑에 재봉안했다고 알려져 있다. 봉안 시기는 통일신라 또는 고려 초로 추정된다. 그런데 금판 ‘금강경’이 ‘관세음응험기’에 나오는 백제 무왕이 제석사 목탑에 봉안했다는 반야경으로 추정되기도 하니, 만약 그렇다면 우리나라 법신사리 신앙의 역사가 좀 더 올라갈 수 있다.

신대현 능인대학원대학 불교학과 교수 buam0915@hanmail.net

 

[1557호 / 2020년 10월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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