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설법과 중생
39. 설법과 중생
  • 현진 스님
  • 승인 2020.10.27 09:50
  • 호수 15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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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비논리’는 사유의 깊이 더해주는 긍정적 역할 

설한다고 할 어떤 법도 없다는 건
금강경 특유의 ‘즉비논리’ 담은 것
즉비논리 흔적마저 지우려는 의미

제21 비설소설분엔 ‘설법’에 대한 세존과 수보리의 문답이 오가는데, 느닷없이 “수보리여! 내가 설한 법이 있다고 여기지마라! 그런 생각도 하지 말지니라. 누구라도 여래가 설한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니, 내가 설한 바를 이해할 수 없었기에 생긴 일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부분은 범문의 내용과 그것을 번역한 구마라집 스님 및 현장 스님의 번역문에 의미상 큰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어지는 문장에서, 여래가 설한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 되는 까닭을 범문에선 “법을 설한다, 법을 설한다 말하지만 법을 설한다고 이름 할 그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해놓고 있다. 누가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그를 비방하는 것이요, 좋게 보더라도 그의 속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오해일 것인데, 여래의 설법이 바로 그와 같다는 말이다.

그런데 구마라집 스님은 이 부분을 ‘설법자, 무법가설, 시명설법(說法者, 無法可說, 是名說法, 법을 설한다는 것은 설할 만한 법이 없으므로, 그것이 법을 설한다고 이름 되어지는 것이다)’으로 옮겨놓았으며, 현장 스님은 조금 더 범문에 가깝게 ‘설법설법자, 무법가득, 고명설법(說法說法者, 無法可得, 故名說法, 법을 설한다 법을 설한다는 것은 얻을 만한 법이 없으므로, 그래서 법을 설한다고 이름한다)’이라 옮겨놓았다. 앞서 보았던 ‘A는 A가 아니므로 A라 한다’라고 하는 ‘금강경’ 특유의 즉비논리가 있다. 여래가 설한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 되는 까닭을 밝혀놓은 문장은 범문을 기준하여 볼 때 분명 즉비논리로 서술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두 스님의 번역문은 즉비논리로 서술된 것으로 여기면 그렇게 여겨질 정도의 약간은 혼란스런 문장으로 옮겨져 있다.

비설소설분의 후반부인 ‘이시혜명수보제~시명중생(爾時慧命須菩提~是名衆生)’ 부분은 원래 구마라집 번역본에 존재하지 않던 것인데, 당나라 장경 2년에 영유(靈幽) 법사가 보리류지 번역본에서 빌려와 보충하여 끼워 넣은 것이므로, 이 부분의 번역은 실은 구마라집의 번역이 아니다. 영유 법사가 굳이 이 부분을 보충한 까닭은 아마도 바로 앞의 문장이 즉비논리인 듯 즉비논리 아닌 듯 한 애매한 문장으로 되어 있기에 이 부분을 산입해놓음으로써 그 혼란을 조금은 덜고자 하는 의도라고 보면 어떨지 모르겠다.

범문을 중심으로 내용을 살펴보면 분명 비설소설분의 전반부인 설법부분과 후반부인 중생부분은 의미상 그리 부드럽게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구마라집 스님이 번역한 범어 판본에 후반부의 내용이 있었다 하더라도 스님의 성격상 과감하게 생략해버렸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현장 스님은 그대로 전체 내용을 옮겨 놓았다.

영유 법사가 뒷부분을 보충하게 된 이야기는 설화로 전한다. 당 장경 2년에 법사가 입적하여 명부에 들어가니 명왕(冥王)이 법사에게 “살아서 무엇을 하였냐”고 묻자 “항상 ‘금강경’을 독송하였노라”고 답하였다. 명왕이 법사에게 한 번 외워보라고 하고는 그 끝에 “한 대목이 빠졌소. 그대는 ‘금강경’을 읽은 공덕이 지대하여 다시 인간세계로 돌려드릴 테니 사람들에게 널리 바른 ‘금강경’을 전하도록 하시오. 정본은 호주 종리사(鐘離寺) 석벽에 새겨져있소이다”라고 하였다. 그로 인해 다시 회생한 법사는 비설소설분의 후반부를 보충해 넣게 되었다고 한다.

제20 이색이상분까지는 앞서부터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던 즉비논리 형식의 문장이 이어지다가 비설소설분에선 전반부엔 즉비논리 유사한 문장이, 후반부엔 다시 즉비논리가 나왔다가 그 후론 제23 정심행선분과 제31 지견불생분에 한 차례씩 등장하며 마무리된다. ‘A는 A가 아니므로 A라 한다’라는 즉비논리는 분명 ‘금강경’에서 그 사유의 깊이를 더해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문장형식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아공(我空)을 설하고 난 다음에 그 흔적마저 법공(法空)으로 지워버리듯이, 사유에 유용했던 즉비논리 또한 그것이 남길 흔적을 지워버리고자 이곳 비설소설분에서 자연스런 문맥의 흐름에 약간은 거슬리는 듯한 전반부의 ‘설법’과 후반부의 ‘중생’을 배치해놓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58호 / 2020년 10월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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