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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미얀마 스님들의 탁발행렬 ASMR

사각사각 탁발 나선 스님들의 향긋한 맨발걸음 소리

공양하는 모양새는 다르지만 한결같이 기쁨에 찬 모습으로 스님 맞아
탁발 통해 스님은 신도들이 만들고 신도는 스님들이 만듦을 깨달아
스님의 발자국 마을 정화하고 축복의 빗자루가 지나가는 것 처럼 보여

다곤묘네 마을 삼야디따사원 스님들의 탁발.

어린 시절 사립문 앞에서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하는 소리가 들리면 할머니가 항아리에서 곡식을 한 양재기 퍼서 걸망에 부어드리는 것을 늘 상 보았다. 간혹 목청 좋은 스님이 탁발가를 부르시면 양재기에 곡식이 더 많이 담기곤 했다. 어른들이 들일을 가시고 혼자 집을 보다가 염불하는 스님이 오시면 할머니께서 하시던 대로 양재기로 곡식을 퍼서 달려 나가느라 곡식을 마당에 줄줄 흘렸고, 쬐끄만 아이의 손이 걸망에 닿지 않자 스님께서 대신 건네받아 부으셨다. “아파트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낮선 이에게는 절대 문을 열어 주지 말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요즈음 아이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온갖 예능과 기예가 넘쳐나는 요즈음이기에 한국에서는 일주일간 행해지는 축제에 춤과 노래가 없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미얀마 양곤의 마하시선원에서 열리는 축제는 법문만으로 그 공간을 가득 채웠고 탁발 행렬도 염불이나 탁발가 같은 것 하나 없이 촘촘히 걷는 발걸음만 있었다. 어린 시절 탁발의 그리움이 있던 터라 다곤묘네 마을의 삼야디따 스님들의 탁발행렬을 따라 나섰다. 논과 밭으로 이루어진 넓은 들판의 다곤은 마을의 절반이 크고 작은 사원과 승원으로 이뤄졌다. 이 지역의 이름인 ‘다곤’은 ‘양곤’이 세워지기 전 옛 왕실의 이름이다. ‘양곤’은 ‘다곤’을 점령하여 세웠으므로 ‘적’이라는 뜻을 지닌 ‘양’을 붙여 ‘적을 무찌른 곳’ 이라는 뜻의 ‘양곤’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요즈음은 ‘네삐도’로 수도를 옮겼으므로 양곤도 옛 도성이 되었다. 미얀마의 도성이 이렇게 빈번히 바뀌는 데는 전통적으로 새로운 왕조는 새로운 곳에 도성과 왕실을 짓는 유습이 있기 때문이다.

삼야디따 스님들의 탁발 수레.

다곤 지역 묘네에는 사원과 승원이 밀집해 있었다. 이 가운데 삼야디따 사원은 어린 동자승을 비롯해 노장 스님에 이르기까지 20여명의 스님들이 거주하며 마을 교육과 수행, 경전 공부와 신행 지도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새벽 5시 무렵 모든 스님들은 불당에 모여 예불과 함께 경전을 염송한 뒤에 탁발을 나섰다. 한 아이가 1~2미터 앞에서 경쇠를 치면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스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문 앞으로 나와 기다리다가 합장 예경하며 공양을 올렸다.

이러한 공양의 모양새도 사람에 따라 가지각색이지만 한결같이 기쁨에 찬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비쿠’라는 말에는 ‘빌어서 먹는’ ‘얻어먹는’ 이라는 뜻이 담겨있지만 탁발 스님들이 미얀마의 거리와 마을을 누비는 발걸음을 보면 마치 축복의 빗자루로 아침을 여는 행렬과도 같아 단어의 의미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중에 어떤 할머니는 땅바닥에 꿇어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지어서 스님들을 기다리는데 그 모습이 너무도 경건하여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도 없었다. 할머니는 20년이 넘도록 공양을 하루도 쉰 적이 없다고 하는데, 매일 이 할머니의 공양을 받아오는 스님들의 심정이 어떤지 물어보았다. “그러한 공양을 받는데 어찌 수행을 게을리 할 수 있겠습니까”. 공양하는 사람들과 스님들의 얘기들 들으면서 스님은 신도들이 만들고, 신도는 스님들이 만듦을 여실히 느꼈다.

양곤 시내 탁발 행렬.

가마솥 보다 더 큰 통을 실은 수레가 공양 행렬 뒤를 따랐다. 마을을 한 바퀴 도는 사이에 스님들의 발우가 차면 그것을 큰 통에 부어 담았다. 탁발을 마치고 돌아오면 수레에 실린 큰 통에 밥과 찬이 그득해졌다. 이러한 음식은 스님들의 일용 음식일 뿐 아니라 그 마을의 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이기도 하였다. 손님인 필자에게도 탁발해온 밥과 찬으로 차린 아침 식사가 제공되었다. 차려진 찬 중에는 생선을 튀긴 것도 있었다. 한국 같으면 고기라 마음에 걸릴 수도 있겠지만 탁발에 의존하는 미얀마 승가에서는 육식금지와 같은 계율은 당치않았다.

주말에는 마을 아이들을 위한 담마스쿨이 열렸다. 인도네시아의 쓰나미 뉴스가 온 세계를 강타한 2004년 다곤묘네에도 극심한 수재(水災)로 많은 고아들이 생겼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되자 스님들이 이들을 보살피고 가르쳤다. 미얀마의 열악한 경제 사정에 비해 문맹률이 낮은 데는 담마스쿨의 역할이 컸다. 담마스쿨에는 글자 교육 뿐 아니라 바느질, 그림 그리기, 만들기, 노래반 등 다양한 취미반이 있었다. 크레파스가 부족해 한 통으로 여러 명이 나누어 쓸 정도로 취약한 교육 환경 속에서도 아이들의 표정이 너무도 밝은데다 웃음소리도 청량하기 그지없었다. 온갖 장난감과 첨단 장비를 갖춘 한국 아이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천진하고 맑은 다곤묘네의 아이들을 보면서 “누가 더 부자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다곤묘네의 마을 골목을 둘러보니 대문 앞에 조그만 당이 차려져 있는 집이 많았다. 미얀마의 토속 신들을 집안의 수호신처럼 모신 곳인데, 스님들은 이러한 모습을 이단이나 미신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미얀마 토속 신앙의 성지인 뽀빠산을 가보면 이를 좀 더 실감할 수 있다. 미얀마의 토속신인 ‘낫’을 모신 사당의 높은 단 중앙에는 어김없이 불상이 모셔져 있었다. 그런가하면 사원이나 탑 입구에 수위병처럼 서 있는 신들도 알고 보면 ‘낫’이었다.

마하시선원축제에서 공양하고 있는 사람들.

이러한 모습을 한국의 상황에 빗대면 우리네 서낭당 신이나 마을 앞의 장승이 부처님을 지키는 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신장(神將)은 인도 민간 신앙에서 온 뱀의 신 나가(Naga), 약샤(Yakśa), 건달바, 아수라, 긴나라, 구반다와 같은 캐릭터들이다. 한국인의 불교 신행과 불교음악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관세음보살도 힌두신 ‘아바로키테스와라’를 음역한 것이고, 정근에 많이 칭명되는 지장보살도 힌두신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러한 신앙이 미얀마에는 없다. 인도와 국경을 접하며 살아온 사람들이라 이러한 대상이 인도의 힌두신화에서 나온 캐릭터임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벼랑에 매달린 황금바위 짜익띠요에 가기 위해 양곤 교외 깐뿐에서 버스를 탔다. 짜익띠요 산자락에 다다르니 한 밤중이 되었다. 각처에서 온 사람들이 누구의 안내도 없이 어디론가 주루루 가기에 따라 갔더니 수십명이 한 방에서 쪼그리고 밤을 새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벽 네시 무렵 흐르는 물에 눈꼽만 떼고 짐을 챙겨 나서니 사방에 대기하고 있는 차들의 엔진 소리가 요란하였다. 탱크같이 생긴 트럭의 높은 바퀴 위에 올라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주춤거리니 차에 올라탄 사람들이 낚아채듯 끌어 올려 주었다. 청년들은 트럭 뒤 범퍼에 대롱대롱 매달려 달렸다. 가파른 경사에 구불구불 휘어진 골짜기를 휘휘 도는 순간들은 위험천만한 곡예 같았지만 미얀마 사람들에게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어렵게 도착하고서도 “여성이 손을 대면 벼랑에 걸린 바위가 떨어진다”하여 가까이 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인파 속에 숨어들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휘리릭~’하고 호루라기를 불며 경비가 달려와 막아서는 바람에 걸음을 돌려야했다.

양곤 교외 마을의 탁발과 공양
양곤 교외 마을의 탁발과 공양

남자들은 준비해간 금종이를 바위에 붙이고 있었지만 여신도들은 저만치 떨어져 기도하거나 혹은 주변의 산사에서 기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짜익띠요를 향해 남녀노소가 이렇게 많이 모여드는 데는 평생 짜익띠요 파고다 순례를 세 번 이상 하면 건강과 부,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그렇게 새벽기도를 마치고 내려오니 골짜기 곳곳에 스님들의 탁발행렬이 있었다. 우리네 고찰 주변에 토속품 가게와 음식점이 있듯이 짜익띠요 입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들 모두 불자들이라 아침이면 스님께 공양할 밥을 담은 대야를 들고 서서 기다렸다. 탁발하는 스님들을 보면, 아주 드물게 한 사람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5~6명의 스님들이 줄지어 탁발을 하였다. 탁발팀이 많으므로 공양을 위해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끊임없이 주걱을 퍼 올렸다. 시절이 변한지라 요즈음은 과자 봉지와 케이크, 약품도 있었다. 예전에는 현금 공양은 받지 않았지만 드물게 현금을 내놓는 불자들도 있었다.

양곤 시내의 탁발 행렬을 따라 다녀보기도 했다. 아스팔트대로 위의 탁발행렬이 아침까지 이어졌다. 이 가운데 가마솥만큼 큰 대야에 밥과 찬을 지어와 스님들의 발우에 끊임없이 퍼 올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풍경은 작은 골목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곳곳에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공양을 위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만달레이, 껄로, 인레, 퍼야 등 가는 곳마다 미얀마의 거리와 마을은 스님들의 공양 행렬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맨발로 사각사각 마을 곳곳을 걸어가는 발자국은 마치 마을을 정화하고 축복하는 법의 빗자루가 쓸고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짜익띠요 파고다의 아침.

한국에서는 탁발하는 스님들이 염불이나 탁발가를 하지만 미얀마에서는 집이나 가게에서 불교음악이 들려왔다. “나모 따사~”로 시작되는 예경문이나 “에와 메 수담 ~”으로 시작하는 초전법륜경, “담맛싸와나깔-로 ~”로 시작하는 보호경 등 필자도 알아듣는 대목을 만날 때면 더 없이 환희심이 났다. 무엇보다 향그런 소리는 들판을 지날 때 곳곳에서 들려오는 벌레소리와 바람 소리 가운데 사각 사각 들리는 스님들의 맨발자국 소리였다.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을 그 때 알았더라면 그 소리를 녹음해 약간의 화음과 악기 한 개 정도만으로 훌륭한 명상음악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윤소희 음악인류학 박사·위덕대 연구교수 ysh3586@hanmail.net

 

[1559호 / 2020년 11월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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