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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선법으로 깨닫는 무상정등각

기자명 현진 스님

해탈로 나갈 수 있게 하는 모든 사유

불교에서 ‘선’이 갖는 개념은
‘좋다’보다 ‘능숙하다’ 의미
선법은 해탈로 가는 좋은 법

‘위없고도 올바르며 동등한 깨달음’이란 의미의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은 범어로 안웃따라(anuttara, 위없는)・삼약(samyak, 바른)・삼(sam, 동등한)・보디(bodhi, 깨달음)이며, 그 소리옮김이 널리 알려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 위없고[無上]・올바르고[正]・동등함[等]은 모두 깨달음[覺]이 어떤 형태인지 설명해주는 내용에 해당한다. 그 가운데 ‘동등한 깨달음’이란 곧 ‘여래와 동등한 깨달음’을 가리키는데, 수행자가 추구해야 하거나 혹은 추구해서 얻은 깨달음의 기준이 완벽한 깨달음을 얻은 여래의 깨달음과 같아야 함을 일컫는다.

삼약(samyak)은 한문 정(正)으로 옮겨지는데, 무상정등각의 경우뿐만 아니라 팔정도에서 정사유(正思惟, samyak­saṃkalpa)나 정어(正語, samyak­vāc) 등이라 할 때의 정 또한 삼약의 번역어이다. 중국에 불교가 들어오고 범어로 된 경전을 한문으로 옮길 때 특정 범어의 의미를 온전히 옮겨 담기 위해 번역어로 채용된 한자 가운데 지금 통용되는 의미보다는 한자의 문자학적인 자원(字源)이 고려된 것이 적지 않다. 이 경우엔 현재 사용되는 통상적인 의미만 고려한다면 의미가 제법 무뎌지게 되니, 바로 삼약의 정(正)이 그렇다.

범어 삼약(samyak)은 형용사 삼얀쯔(samyañc)의 부사형으로서, 다른 단어와 결합되어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삼얀쯔는 ‘함께 나아가다’ 또는 ‘특정한 방향으로 함께 가다’ 그리고 ‘결합하다, 융합하다’ 등의 의미를 갖는데, 다분히 브라만교에서 절대상태인 브라흐만과의 합일을 위해 함께 나아갈 수 있거나 또는 나아가게 할 수 있는 무엇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래서 삼약­쌍깔빠(samyak­saṃkalpa)라 하면 브라만교로서는 브라흐만과의 합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사유, 불교라면 해탈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사유를 말한다. 그러므로 정사유는 단지 올바른 사유라기보단 ‘해탈로 나아가기에 적절한 사유’라는 보다 분명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삼약의 한문 번역어인 정(正) 또한 그 어원이 되는 본래의 글자는 정(征)인데, 그 의미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황제가 군대를 일으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한문의 정사유(正思惟)도 자원(字源)의 의미를 적용하면 ‘황제가 어려운 정벌에 나서듯 해탈을 향해 고행을 감내하며 수행해나가는 사유’, 간단히는 ‘해탈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사유’라고 할 수 있으므로, 한문 정사유는 범어 삼약쌍깔빠의 의미를 오롯이 담아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제23 정심행선분에 언급된 선법(善法, kuśala­dharma)에서 꾸샬라(kuśala)의 번역어인 선(善) 또한 삼약(samyak)의 번역어 정(正)과의 관계와 유사하다. 범어 꾸샬라는, 날카로운 잎을 지닌 들풀의 일종인 꾸샤(kuśa)풀을 벨(√la, 베다) 때는 자칫하면 손을 베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는데, 손을 베이지 않고 꾸샤풀을 벨 수 있으면 제법 솜씨가 있다는 의미에서 꾸샬라(kuśala, 좋은, 솜씨 있는)라는 말이 생겨났다.

얼핏 선법(善法)이라면 악법(惡法)의 반대개념으로 치부할 수 있는데, 한문 선(善)은 착하다거나 좋다는 의미 외에도 선전(善戰)하다 할 경우엔 선의 의미가 ‘능숙한, 익숙한' 등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그래서 꾸샬라­다르마의 번역어로서 선법이라 하면 악법이 아니거나 그저 좋고 훌륭한 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솜씨가 좋거나 능숙한 법’을 말하는데, 다시 말하자면 선법은 해탈을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서 좋은 법으로서, 그렇게 나아감에 솜씨가 좋고 능숙한 법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칼로서 사람을 베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의사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람의 배를 칼로 베는 행위는 분명 좋은 일이다. 이처럼 선법 또한 아무런 조건이 없는 상태에서의 좋고 나쁜 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해탈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모든 법을 선법(善法)이라 이르고 그렇지 못한 법을 악법이 아닌 불선법(不善法)이라 분류할 때의 선법을 말하니, 불교의 용어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일정한 배경에 의해 성립되는 보다 명확하고 분명한 의미가 항상 존재한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59호 / 2020년 11월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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