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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다라니경과 보협인경

시대 따라 다른 경전을 법신사리로 석탑에 봉안

8~10세기 사찰·탑 급증할 때 ‘진신사리’ 대신 봉안된 ‘법신사리’
조탑 공덕을 담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통일신라 대표 사례
고려시대 유행한 ‘보협인경’은 1007년 개성 총지사서 최초 간행

해인사 길상탑에서 발견된 소탑 : 895년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소탑(小塔) 77기와 99기에 각각 넣어 봉안했다. 현재 157기가 남아 있다.
해인사 길상탑에서 발견된 소탑 : 895년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소탑(小塔) 77기와 99기에 각각 넣어 봉안했다. 현재 157기가 남아 있다.

사람들이 탑에 지극한 예경(禮敬)을 드리는 까닭은 그 안에 봉안된 불사리 때문이다. 모든 불교국가 온 누리마다 오랜 세월 동안 숱한 탑이 세워진 것도 결국 사리신앙의 표현과 다름없다. 불사리를 공경해야 한다는, 다시 말해서 탑을 세우는 공덕이 무량함을 언급한 이야기는 거의 모든 불교 경전마다 빠짐없이 강조되곤 했다. 탑을 세우는 일, 곧 조탑(造塔)의 공덕을 주제로 한 경전도 있으니, 다라니경 계열의 경전들이 그렇다. 

본래 ‘다라니’란 지혜나 삼매 또는 산스크리트어 음을 외는 진언(眞言) 등을 두루 가리키는 용어이다. 한자로는 총지(摠持)·능지(能持)·능차(能遮)라고 번역한다. 다라니 경전에는 불사리를 경배하는 공덕도 언급되어 있어서 사리신앙의 성전(聖典) 역할도 하게 된 것이다. 여러 종류가 있지만, 다라니에 관한 다종다양한 경전들을 두루 가리키기 위해 그냥 ‘다라니경’이라고도 한다. 

다라니 계열의 경전 중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에 탑을 쌓아 공양하면 개인과 국가 모두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가장 구체적으로 나온다. 이 경전에서 불탑에 관한 이야기는, 7일 뒤에 죽어서 16군데 지옥에 떨어질 운명인 바라문을 위해, 만일 다라니를 일곱 번 외우고 다라니경을 탑에 넣으면 극락세계에 태어날 것이라는 석가모니의 설법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렇게 세운 사리탑을 사람들이 77번 돌면서 다라니를 77편 외운 뒤, 다라니경 77본(本)을 베껴 작은 토탑(土塔) 77기에 하나씩 공양하면, 그 공덕으로 인해 수명이 연장되고 모든 업장이 사라지며, 영원히 삼악도(三惡道)를 떠나 태어나는 곳마다 모든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혹은 77기가 아니라 99기를 조성해야 한다는 다라니경도 있다. 그래서 895년 해인사 길상탑에 다라니경을 넣을 때 99기와 77기씩 따로 봉안하기도 했다(‘吉祥塔中納法賝記’).

보협인석탑 : ‘보협인다라니경’을 법신사리로 봉안한 보협인탑. 고려시대에 보협인경이 유행했음을 보여주는 실물 자료다. 

우리나라에서 8세기부터 10세기 초반은 불교가 양적 팽창을 이루던 시기였다. 사찰과 탑이 급증하였는데, 진신사리만으로는 그런 추세를 맞추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진신사리 대신 법신사리로 다라니경이 봉안되는 일이 많아졌다. 경주 황복사 삼층석탑, 산청 석남사 석탑, 봉화 서동리 동삼층석탑, 대구 동화사 금당암 서탑, 합천 해인사 묘길상탑, 양양 선림원지 삼층석탑, 공주 수원리 삼층석탑, 함양 승안사지 삼층석탑 등 전국의 적잖은 신라와 고려 초 석탑에 다라니경이 봉안되었다. 이 중 국보로 지정된 8세기의 불국사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대표적 실물 사례이다. 

1966년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일명 석가탑을 해체 복원할 때 발견된 ‘무구정광대라니경’은 702년 중국에서 처음 한문으로 번역되었고, 또 불국사는 751년에 창건되었으므로 간행 시기도 그 사이로 추정할 수 있으니 무려 1300년도 더 되었다. 이 책은 손으로 베껴 쓴 사경(寫經)이나 목판(木版)에 새겨서 찍은 책이 아니라, 경전에 나오는 글자 하나하나를 모두 나무 활자로 인쇄한 목판 활자본이다. 다라니경으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또 목판으로 인쇄한 책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었기 때문에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이라는 영예도 얻었다. 

그런데 석가탑에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만 아니라 ‘보협인다라니경’도 함께 봉안되었음이 최근에야 확인되었다. 이 경전은 1966년 탑신부 2층 사리공에서 발견되었는데, 당시에는 먹 글자 일부만 겨우 보였을 뿐 무슨 내용인지도 알지 못했다. 오랜 세월 동안 대부분 삭아 없어진데다가 남은 조각들마저 뭉치 상태로 엉겨 있었기 때문이다. 기술이 없어서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가, 근래에 과학기술을 동원해 분석되기 시작했고, 2007년에 그 조사 내용이 발표되었다. 그 결과 ‘安置如是'라고 적힌 글자들을 통해 이 종이 뭉치가 바로 ‘보협인다라니경’임이 밝혀졌다. ‘보협인다라니경’에 나오는 ‘書寫此經置塔中(이 경전[보협인다라니경]을 베껴서 탑에 안치한다)’는 구절과 일치해서다. 

그런데 어째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보협인다라니경’이 함께 봉안되어 있었던 것일까? 전자는 석탑을 처음 세웠던 8세기에, 후자는 고려 초에 석탑을 보수할 때로 약 300년의 시차를 두고 봉안된 것이다. 따라서 탑에 봉안하는 다라니경이 통일신라에서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대세였다가 고려로 오면서 ‘보협인다라니경’으로 바뀌었던 변화를 알 수 있다. 

772년 인도의 불공(不空)이 번역한 이 경전의 정식 이름은 ‘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경(一切如來心秘密全身舍利寶篋印陀羅尼經)’이다. ‘모든 부처님 마음의 비밀이 전하는 전신사리가 담긴 보물 상자 같은 경전’이라는 뜻이며, 줄여서 ‘전신사리경’이라고 한다. 다라니를 간행하여 불탑에 공양하면 개인과 국가 모두 복을 받는다는 면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비슷하다. 그런데 다라니경 77본 혹은 99본을 그 숫자대로 탑마다 넣어야 한다는 규정이 없어서 대중으로서는 봉안에 들어갈 공력과 비용이 좀 쉬운 면이 있었다. 고려에서 대중화한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보협인다라니경’은 고려시대 1007년에 개성 총지사(摠持寺)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책이다. 이 경전은 2007년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상 복장에서 발견되었다. 탑이 아닌 불상에 봉안되었으며, 불국사 보협인경이 필사본인 것과 달리 목판본이라는 특징이 있다. 이 다라니와 같은 판본으로 일본 도쿄박물관본, 김완섭소장본, 그리고 월정사본 등이 있다. 김완섭소장본은 도난당했고, 월정사본은 아직 보존처리 중이라 지금까지는 보광사 보협인경이 온전한 유일본인 셈이다. 

‘보협인경’이 봉안된 탑을 보협인탑이라고 하는데, 이를 처음 세운 사람은 중국 오월(吳越)의 국왕 전홍숙(錢弘俶, 948∼978)이다. 실제의 삶도 인도 아육왕과 흡사했던 그는 평소 흠모한 아육왕의 행적을 좇아 금·동·철로 작은 탑 8만 4000개를 만들고 하나하나마다 이 경전을 봉안했다. 고려도 그 영향을 받은 것인데, 형태도 오월의 그것과 아주 비슷한 예가 1967년 천안 대평리사지에서 수습된 보협인석탑(국보 209호)이다. 현재 모습이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고려에서 ‘보협인경’을 법신사리로 봉안했던 풍조를 보여주는 귀중한 실물 자료이다. 

신대현 능인대학원대학 불교학과 교수 buam0915@hanmail.net

 

[1559호 / 2020년 11월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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