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1. 그럼, 전륜성왕도 여래겠네?

기자명 현진 스님

수보리의 잘못된 답변에 핀잔주는 부처님

형색만으로 여래 추구한다면
삿된 수행임을 일깨우는 답변
구마라집역에만 등장하는 장면

‘금강경’은 수보리의 질문에 부처님께서 답하시거나 간혹 수보리에게 오히려 물음을 건네어 말씀하고자 하시는 내용을 이끌어내는 문답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26 법신비상분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 먼저 부처님께서 ‘수보리여! 누가 32상을 갖추었다면 그를 여래로 볼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시자 수보리는 ‘예! 그렇습니다. 어떤 이가 32상을 갖추었다면 그를 여래로 볼 수 있습니다’라고 답한다. 그런데 이어지는 두 분의 대화내용을 살펴보면 ‘금강경’ 전체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수보리가 부처님의 질문에 잘못된 답변을 드렸다가 핀잔까지 듣고는 다시 고쳐 말씀을 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래? 수보리여! 32상을 갖추었다고 여래라면, 그럼 전륜성왕도 여래이겠구나?”
“세존이시여! 그러고 보니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누가 그저 32상을 갖추었다고 그를 여래로 볼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선 우리의 귀에 익은 한 수의 게송을 읊으시어 가르침을 베푸는 장면으로 제26분은 마무리된다. ‘형색이나 음성으로 여래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삿되게 수행하는 것일 뿐이니 결국 여래를 뵙지 못할 것이다.’

‘금강경’에서 수보리가 부처님의 핀잔까지 듣는 모습은 사실 구마라집 스님의 한역본에만 나타나고 현장 스님의 한역본엔 보이지 않는다. 범어원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콘즈(Conze)본이 적어도 이 부분에선 동일한 내용을 보이는 현장한역본에는 그 대화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선현이여! 어떤 누가 32상을 온전히 갖추었다고 그를 여래로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가르침을 받기로는 여래로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 선현이여! 만약 그렇지 않다면 32상을 갖춘 전륜성왕도 여래일 것이다. 여래는 형상으로 드러난 것은 물론 형상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 또한 온전히 갖춘 분이기 때문이다.’

경전번역에서 일반적으로 구마라집 스님은 뜻옮김[意譯]을, 그리고 현장 스님은 글옮김[直譯]을 주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부분 또한 구마라집 스님은 당신의 의도대로 별스런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범어원문에 존재하지 않는 문장을 삽입하면서까지 뜻옮김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사실 ‘금강경’ 필사본으론 두 번째로 1931년에 중앙아시아 길기트 지역에서 발견된 ‘금강경’ 길기트(Gilgit)본에 전하는 제26분 부분은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과 그 내용이 완전히 일치한다. 즉, 비록 일부 내용만 남아있는 길기트본이긴 하지만 이 부분만큼은 온전하게 남아있어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그럼, 전륜성왕도 여래겠네?’라고 슬쩍 핀잔하시는 듯한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그럼 콘즈본은 현장역의 원본이고 길기트본은 구마라집역의 원본이라 여기겠지만, 구마라집역의 내용 가운데 어떤 부분은 길기트본엔 안 보이지만 콘즈본엔 보이기도 하는 까닭에 그 또한 그렇지 않다. 결론은, 다양한 ‘금강경’ 범어판본이 존재했었고 두 스님이 저본으로 삼은 바로 그 판본들은 최소한 지금까지 발견된 범어판본 가운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많이 읽는 구마라집 스님의 한역본이거나 아니면 현장 스님의 한역본이거나, 그 둘 가운데 어느 한역본의 한글 번역본을 읽든지 최소한 직역이니 의역이니 하는 시각은 걷어내어 버리고 두 스님이 이끄는 역장(譯場)에서 당대의 대학자들이 공들여 담은 내용을 읽어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라는 글귀는 제5분・13분・20분 및 제26분에 모두 4차례 등장한다. 우선, 여러 범본 모두 이 부분을 ‘draṣṭavya(보일 수 있는)’라는 동일한 단어로 서술하고 있으며, 현장 스님 또한 동일한 ‘관여래(觀如來)'로 옮겼다. 그런데 구마라집 스님은 제26분만을 ‘觀如來'라 옮겨놓고 나머지 세 곳은 모두 ‘見如來'로 옮겨놓았다. 별다른 굴곡 없이 두 분 사이에 문답이 오간 부분은 ‘draṣṭavya'를 見이라 옮겼고 한 차례 오답이 들어간 대화는 觀으로 옮긴 것인데, 스님은 이를 ‘있는 그대로 두고 보아[見] 앎[prajñā]'과 ‘이런저런 생각으로 살펴보아[觀] 앎[saṁjñā]'으로 구분하려는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60호 / 2020년 11월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