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무심’이 곧 ‘부처’
43. ‘무심’이 곧 ‘부처’
  • 선응 스님
  • 승인 2020.11.17 09:11
  • 호수 156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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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경계가 하나임 알면 자유인

제불을 봐도 마음 따라감 없고
지옥을 봐도 두려움‧공포 없어
스스로 무심해 법계와 같으면
이것이 도인이 새길 중요 구절

73장은 “대개 사람이 죽음에 임박해서 단지 ‘5온(몸‧감수‧생각‧분별‧인식)’이 모두 ‘공(空性; Śūnyatā,suññ atā)’하고 ‘4대(흙‧물‧불‧바람)’에 ‘(영원‧절대)나’가 없음을 관하면, ‘참된 마음’은 형상이 없어서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니, 태어날 때 ‘자성’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죽을 때 ‘자성’이 가는 것도 아니다. 담연하고 원적해서 ‘마음’과 ‘경계’가 하나와 같다. 이와 같다면 곧 알 수 있어서 ‘3세(과거‧현재‧미래)’에 구속되거나 결박되지 않고 문득 세상을 벗어난 ‘자유인’이 된다. 만일 ‘제불’을 보아도 마음이 따라감이 없고, ‘지옥’을 보아도 마음에 두려움과 공포가 없어서, 단지 스스로 ‘무심’하여 ‘법계’와 같으면 이것이 곧 ‘중요한 구절’이다. 그렇게 ‘평상심’이 원인이 되며 임종할 때 결과가 되기 때문에 ‘도인’은 반드시 마음에 새겨 보아야만 한다”이다.

‘금강경’의 요체, ‘반야심경’과 황벽(?~850)의 ‘전심법요’ 내용이다. “‘자성청정심’은 원만 구족이다. ‘4대’와 ‘5음(몸‧감수‧기억‧분별‧인식)’의 ‘기관(6근)’과 ‘대상(6경)’과 ‘6식’은 ‘나’와 ‘주재자(主宰;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가 없다. 제법이 화합해서 생멸하는 ‘18계’의 자성이 ‘공’하기 때문에 ‘마음’은 본래 맑고 걸림이 없다”한 것이다. 

‘공(Śūnya)’과 공성(śūnyatā,suññatā)은 ‘삼매’로 ‘공’을 체득하고 ‘법성’, 절대적 ‘신’, 영원한 ‘영혼’이 ‘무아(anattā,anātman)’를 깨닫는다. 임철(任哲, 12세기)은 ‘달마혈맥론‧서’에서 “여러 가지 법어는 학인들의 깨달음을 미혹하게 한다. 오직 ‘혈맥론’과 ‘전심법요’가 있어서 ‘불성’을 증명한다”고 하였다. ‘마조(馬祖道一, 709∼788)어록’에서 ‘무심이 곧 부처’를 설한 후에, 백장(百丈懷海, 749~814)이 ‘전심법요’를 인증하고, 황벽제자 임제(臨濟義玄, ?~867)가 ‘임제종’을 창립해서 동북아시아에 전해졌다. 

황벽은 ‘공’에 대해서 “제도하는 주체도 제도될 대상도 모두 잊으면 ‘큰 버림’이고, 바라는 마음이 전혀 없으면 ‘중간의 버림’이며, ‘공’을 알고 집착하지 않으면 ‘작은 버림’이다. (중략) ‘법신’은 탕탕하며, 보신은 청정법이고, 화신은 ‘6도(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를 행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죽음이 닥치는 ‘노년’에야 ‘석가’를 친근하게 된다”라고 하고, 게송은 “이 때를 향해서 ‘자기’를 밝혀라, 백년 세월이 순간에 잘못이다”이다. 소옹(邵康節,1011~1077)의 ‘학불음’의 시와 ‘불조강목(17세기)’의 게송으로 간절한 마음일 때 ‘진면목’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74장은 “대개 사람이 죽음에 임박했을 때 만일 한 터럭만이라도 ‘성인’과 ‘범부’의 감정과 분별이 다하지 못해서 생각을 잊지 못하면, 나귀의 태와 말의 뱃속을 향해서 끌려 들어가게 되며, 지옥의 끓는 가마 속에 들어가게 되며, 다시 모기와 개미 등이 된다. 백운(白雲守端, 1025~1072)이 설하기를, ‘설사 한 터럭만큼의 범부와 성인의 감정과 생각을 청정하게 해서 다할지라도, 나귀의 태와 말의 배에 들어감을 면하지 못한다’한 것으로 ‘두 가지 견해’의 별이 날아서 ‘6취(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도‧천도)’로 흩어져 들어간다”이다. 

이 내용은 죽암사규(竹庵士珪, 1092~1146)선사의 ‘동림송고’에서 무업(汾州無業, 760~821)과 백운의 게송으로 ‘분별심’이 윤회의 고통인 것을 설한다. 게송에서 “맹렬한 불은 치성한데, 보검은 눈앞에 있구나” 한 것은 ‘3계(욕계‧색계‧무색계)’에서 ‘무심’의 법을 깨닫는 것이다. 즉 “이 두 구절(73‧74장)은 ‘종사’들이 ‘무심’으로 ‘도의 문’에 계합하는 길을 특별히 보여준다. 방편으로 ‘교학’ 중에 염불로 왕생을 구하는 문을 차단한다. 그러나 근기가 같지 않고 뜻과 원도 다르지만, 각각 이와 같이 두 가지가 서로 방해되지 않으니 모든 도를 발원하는 자는 항상 분수를 따라서 각각 스스로 노력하여, 최후의 찰나에 의심과 후회를 생하지 말라”이다. 불교에서 지옥(Naraka,niraya)은 ‘절대적 신’의 판단과 처벌이 아니며, 그 과보도 영원하지 않다. ‘무심이 곧 부처’지만 자신의 근기에 따라서 힘써 정진하라는 말씀이다.

선응 스님 동국대 불교학 박사 sarvajna@naver.com

 

[1561호 / 2020년 11월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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