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정조대왕 ‘국화도’
42. 정조대왕 ‘국화도’
  • 손태호
  • 승인 2020.11.17 11:26
  • 호수 156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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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혜경궁 홍씨 만수무강 위해 그린 그림

아래위·바위 구도 불안정해 아쉽지만 방아깨비로 생동감 가득 
학문·예술 사랑한 문예군주…‘부모은중경’ 간행 등 효성도 깊어
힘든 세상살이 헤쳐온 세상 모든 부모님 건강·장수하기를 기원
정조대왕 作 ‘국화도’, 종이에 수묵, 86.5×51.3㎝, 18세기, 동국대학교박물관.
정조대왕 作 ‘국화도’, 종이에 수묵, 86.5×51.3㎝, 18세기, 동국대학교박물관.

매년 이맘때면 서울 조계사 앞마당은 온통 국화꽃 향기로 가득합니다. 비록 도심 사찰이지만 절을 찾은 많은 방문객에게 우리 사찰의 아름다운 풍경을 전하기 위해 국화꽃 잔치를 여는 것입니다. 국화는 우리나라 꽃 중에 가장 늦게 피는 꽃입니다. 그래서 가을을 대표하는 꽃이 국화입니다. 이렇게 국화가 만발하는 계절에 국화꽃 그림을 감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국화도가 많지만 이번에는 여러 이유로 의미가 깊은 ‘국화도’ 한 점을 감상해보겠습니다. 

왼쪽 벼랑에 바위가 튀어나와 있고 그 주변으로 들국화가 무더기로 피어 있습니다. 바위 밑둥은 짙은 먹으로 이끼가 퍼져 있고 위아래로는 바랭이가 뻗어 있습니다. 이끼를 농담으로 구분하여 사용했고, 바랭이는 담묵으로 표현해 국화를 돋보이게 했습니다. 바위 옆에서 나온 국화 줄기는 마치 바위를 뚫고 나온 듯 강한 선을 사용했습니다. 잎도 농담의 변화를 주어 단조로움을 피했습니다. 꽃의 모습은 국화 특유의 가늘고 긴 꽃잎이 꽃술을 중심으로 펼쳐졌는데 정면, 측면 등 표현이 다양하여 작가의 그림 솜씨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무게 중심을 위해 바랭이와 국화를 위, 아래로 펼쳐 구도가 다소 딱딱하고 옆에서 튀어나온 바위의 구도가 참신하지만 위치상 다소 불안정해 보이는 점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위로 향한 국화 끝에 방아깨비 한 마리를 그려놓아 자칫 단조롭고 딱딱해 보일 수 있는 부분을 상쇄시켜 생동감을 얻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선, 색, 구도 등을 종합해보면 전문 화사는 아니지만 그림에 조예가 깊은 인물의 작품으로 방아깨비에 맞춰진 시선은 자연스럽게 우측 상단 위 인장으로 옮겨 갑니다.

서명 없이 무심히 찍은 인장은 “萬川明月主人翁(만천명월주인옹)’입니다. 풀이하면 ‘온갖 물줄기를 고루 비추는 밝은 달의 임자’라는 내용으로 정말 자부심이 굉장한 내용입니다. 과연 조선시대 이런 뜻의 호를 사용한 인물은 누구였을까요? 이 호의 주인은 바로 조선 제22대 임금이자 학문과 예술을 사랑한 최고의 문예군주 정조대왕의 호입니다.  

국화의 원산지는 중국이고 고려 말에 한반도로 전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중국 송나라 때 유몽(劉蒙)의 ‘국보(菊譜)’에 신라국(新羅菊)이란 국화품종에 대한 기록이 있고 일본의 ‘왜한삼재도회(倭漢三才圖會)’에는 4세기경 백제에서 청·황·홍·백·흑 등 오색의 국화가 일본으로 수출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훨씬 이전부터 한반도에 국화가 있었으므로 중국, 한반도를 함께 원산지로 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그후 국화는 15세기 강희언의 원예지 ‘양화소록(養花小錄)’에 20종, 또 ‘화암수록’에는 154종이나 등장하니 그만큼 많이 가꾸어 길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 들국화(野菊)는 국화의 종(種)이 아니고 구절초, 개미취, 개쑥부쟁이 등과 같이 들에 피는 야생종 국화를 총칭하는 말로 문인들이 만든 이름입니다. 

국화는 매화·난초·대나무와 함께 사군자 중 하나지만 육조(六朝)시대의 시인 도연명이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삼경은 이미 황폐했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여전하구나”라고 읊은 후 고고한 은일자를 상징하는 꽃이 되었습니다. 국화가 다른 꽃들이 앞다투어 피는 봄이나 여름이 아닌 꽃이 지고 낙엽이 떨어지는 황량한 가을에 고고하게 피어나기에 고고한 은자의 이미지가 강조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조는 은일을 염두하고 그림을 그렸을까요? 임금이 은둔자의 상징으로 붓을 들었을 리 없습니다. 아마도 국화의 또 다른 의미의 즉, 불로장수의 의미로 그렸을 것입니다. 국화 밑에서 나오는 샘물은 국화수라 하여 오랫동안 마시면 늙지 않으며 풍도 고칠 수 있다고 하였고, 국로수(菊露水)라 하여 국화꽃에 맺힌 이슬을 털어 마시기도 했습니다. 의학서 ‘본초강목’에는 국화차나 국화주를 오랫동안 복용하면 혈기에 좋고 몸을 가볍게 하며 쉬 늙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장수의 꽃이기에 국화는 기국연년(杞菊延年) 등 축수 문구와 함께 환갑·진갑 등 잔칫상에 축하꽃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림처럼 장수를 상징하는 바위와 함께 그려지면 그 의미가 더욱 강조됩니다. 그래서 바위와 함께 그려진 정조대왕의 ‘국화도’는 장수를 간절히 축원하는 그림인 것입니다. 정조대왕은 화성 용주사에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간행하고 화성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정성들여 성대하게 치를 만큼 효성이 깊었습니다. 아마도 이 ‘국화도’도 어머니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1735~1815)의 만수무강을 위해 그린 그림으로 추측됩니다. 

조선의 임금 중 그림에 특별한 애정을 가진 왕이 여럿 있습니다. 세종은 난과 대나무 여덟 폭을 그려 신인손에게 하사했고, 문종은 매화나무를 그려 안평대군에게 선물했습니다. 선조와 인조도 직접 그리거나 감상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여 화사들을 극진하게 대우하였습니다. 조선후기에는 영조가 어릴 적 겸재 정선에게 직접 그림을 배우기도 하였고, 분원의 도자기에 밑그림을 그리기도 하였으며, 자신의 작품을 아버지 숙종에게 보여주어 칭찬받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정선, 김두량 같은 화가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으며 당대 예원의 총수인 선비화가 강세황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이런 예술을 중시하는 문화를 이어받은 정조는 학문과 예술적으로 가장 뛰어난 임금이었습니다. 정조는 도화서 화원들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으로 김홍도, 이인문 등과 같은 뛰어난 화가들을 배출했고 서민들 삶의 모습인 풍속화를 적극 권장해 우리나라 회화사를 더욱 풍부하게 하였습니다. 조선의 왕들은 이렇게 그림을 좋아하고 직접 그렸지만 아쉽게도 왕이 직접 그린 작품 중 남아 있는 그림은 정조대왕의 ‘국화도’와 ‘파초도’ 딱 두 점뿐입니다. 정조대왕은 회화이론뿐 아니라 기량까지 갖춘 진정한 문예군주였음을 이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조대왕은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이토록 기원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혜경궁 홍씨는 정조 사후 15년을 더 살다가 81세 1815년(순조15년)에 눈을 감았습니다. 결과적으로 혜경궁 홍씨는 정조대왕의 장수 발원으로 장수를 이뤘으나, 아들을 앞서 보내는 고통은 피하지 못했습니다. 찬 서리를 딛고 돌아와 한 해 마지막으로 피어나는 들국화. 정조대왕의 ‘국화도’를 보면서 힘든 세상살이를 헤쳐온 세상 모든 부모님들이 늘 건강하게 장수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손태호 동양미술작가, 인더스투어 대표 thson68@hanmail.net

 

[1561호 / 2020년 11월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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