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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해석의 차이

기자명 현진 스님

경전도 어떤 시각서 읽느냐에 따라 해석 달라

기록이 발달한 중국과 달리
인도는 구전이 발달한 문화
문화차이 이해해야 바른 해석

경전을 가리키는 산스끄리뜨는 실이나 끈을 의미하는 쑤뜨라(sūtra)이므로 한문으로는 끈으로 종이를 묶어놓은 모습을 본뜬 상형자인 책(冊)에 해당하는데, 한문번역어로는 경(經)이 사용된다. 경(經)이란 날줄이 걸린 베틀[巠] 곁에 실[糸]을 쌓아둔 모습이다. 베를 짤 때는 베틀에 이미 걸려있는 날줄에 맞춰 씨줄을 어떻게 먹이느냐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문양의 온갖 천이 짜여지듯이, 쑤뜨라인 경전도 성인이 말씀해놓으신 것을 어떤 근기에서 어떤 시각으로 읽어내느냐에 따라 그 해석에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경전에 대한 갖가지 해석은 날줄에 씨줄이 잘 걸린 정도만 넘어서면 ‘틀렸다’기보단 ‘다르다’란 표현이 바를 것 같다.

‘금강경’에서, 우리가 지니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일관되게 강조되는 사상(四相)이 있다. 이를 중국에선 보편적으로 모든 일에서 ‘나입네~’라고 여기는 생각인 아상(我相), ‘나는 사람입네~’라고 여기는 생각인 인상(人相), 사람인 우리는 무리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인 중생상(衆生相) 및 사람으로서 중생인 우리는 목숨을 지닌 존재라는 생각인 수자상(壽者相) 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금강경’의 원전을 산스끄리뜨 어원학과 당시 사회상을 참고하여 사상을 해석해본다면 네 가지 상(相)은 아상과 수자상과 인상을 동일한 유형의 아상류(我相類)로 묶고 중생상을 다른 부류로 보는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 즉 수자상과 인상은 아상(我相, 고정불변의 실체로서 아뜨만이 존재한다는 생각)의 변형일 뿐이며, 중생상은 아상과는 약간 맥을 달리하는 일종의 인간의 원죄론(原罪論)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인도가 맞고 중국은 틀렸는가? 얇은 인도 옷을 가져와 중국에서 춥다고 몇 겹 덧대어 입는다고 그것이 옷이 아니랄 수는 없는 것처럼, 틀리다기보단 자신들에게 맞게 달리 해석하였다는 표현이 바를 것 같다.

그렇다고 베틀에 이미 매여진 날줄까지 무시한 채 그것에 걸리지도 않는 씨줄을 이리저리 휘두른다면 천이랄 게 짜일 리 없듯이, 산스끄리뜨에서 옮겨진 한문문장을 원문의 문법적 내용까지 무시한 채 단지 한문 글귀대로만 읽어낸다면 그것은 그저 ‘다르다’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제10 장엄정토분 중반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문 ‘몸이 마치 산 가운데 왕인 수미산 같다면…’ 부분에서 ‘몸[身]’이라 간략히 표현해놓은 내용의 산스끄리뜨 원문은 ‘위대한 몸으로서 (해탈에) 근접한 몸이 있고 그러한 형색에 신명(身命)이 깃들어있으며, 그 크기가 수메루산만 하다면…’으로 제법 길게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의 현장 스님 번역은 ‘구신대신기색자체(具身大身其色自體)'이니 일반적 한문해석은 ‘갖춰진 몸인 큰 몸이 있고 그 형색 자체가…’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산스끄리뜨 원문의 문법적 분석에 의거해 현장 스님의 번역문을 읽는다면 大身(위대한 몸)은 具身(갖춰진 몸)의 형용사이며 其色(그 형색)에 自體(ātmabhāva, 실체화 된 존재로서의 아뜨만)라는 그 무엇이 깃들어있다는 내용인 까닭에, 현장 스님의 번역문을 위에서처럼 일반적인 한문문장으로 읽어내면 원래 문장과의 차이가 다른 정도가 아닌 틀린 말이 되어버린다. 무엇보다 자체(自體)로 번역된 ‘ātmabhāva'는 고전 산스끄리뜨에서 단순히 몸[身]으로도 통용되는 단어지만 이 문장에선 일종의 영혼(靈魂)과 유사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는데, 그것을 현장 스님은 글자 그대로 ‘아뜨만(ātman)'을 자(自) '바하바(bhāva)'를 체(體)로 옮긴 것이기에 흔히 쓰이는 自體(itself)는 분명 아님을 분별할 수 있어야 ‘금강경’ 저술가가 의도하는 본래의 내용이 파악될 수 있다.

흔히 구전을 바탕으로 하는 베다와 성문(聲聞)으로 대표되는 인도문화는 청문(聽聞)문화라 일컬어지고, 이에 반해 한문을 기반으로 기록이 발달한 중국문화는 시각(視覺)문화라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기록물보다는 그것에 수반되는 설명인 강설인 강사의 설명이 중시되는 인도의 전강(傳講)전통을 기록에 거의 모든 것을 담아놓으려고 애쓰는 중국의 시각으로만 바라보아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두 문화는 유사한 문화적 역량을 지닌 채 서로 교류했기에….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62호 / 2020년 11월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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