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4. ‘선학자’와 ‘종사’의 병

기자명 선응 스님

향상일로는 생각과 말로 전할 수 없다

단멸공과 무기공의 두 가지는
‘공’을 고집하며 생긴 깊은 병
본지풍광‧본래면목 깨달아야
본분종사의 법을 알 수 있어

75장은 “‘선(禪)’을 배우는 자가 만일 ‘본지풍광(本地風光)’을 밝히지 못하면 우뚝 솟은 ‘현관(玄關)’을 무엇으로부터 투과하겠는가? 흔히 ‘단멸공(斷滅空)’을 ‘선’이라고 하고, ‘무기공(無記空)’을 ‘도’라고 해서, 일체가 모두 ‘무’인 것으로 높은 ‘견지’를 삼는다. 이것은 ‘공’을 고집하는 것으로 ‘병’이 깊은 것이다. 지금 세상에서 ‘선’을 말하는 자는 흔히 이 ‘병’에 걸려 앉아 있다”이다.

중국에서 ‘선’의 어원은 ‘사기·위장군전’과 ‘속한서·제사지’에서 ‘왕위계승을 위해 하늘에 지내는 제사의식’이다. 안세고(148~180)의 ‘선경’에서 ‘dhyāna,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적정하게 사유하는 것’을 ‘선(禪)’이라고 한역하였다. 선정은 ‘계‧정‧혜 3학’ 중의 하나다. 처음 ‘지관(止觀, śamatha-vipaśyanā)’으로 체득하는 ‘색계4선(Rūpajjhāna)’과 완전히 집중된 상태인 삼매(samādhi)의 ‘무색계4선(Arūpajjhāna)’이다. 

‘본지풍광’이란 원오(1063~1135) 어록에서 ‘본래면목’이라고 한다. ‘고초(孤峭)’는 우뚝 솟아서 학문과 예술의 풍격이 고상하고 속되지 않은 것이며, ‘현관’은 ‘도교’에서 ‘몸속의 기가 가장 먼저 통과하는 곳’이고, ‘선종’에서는 ‘선사의 공안’이다. ‘단멸공’이란 ‘인과연기법’을 부정하고 부처도 중생도 없다고 하는 ‘사견’이다. ‘무기공’은 ‘텅 빈 경계’를 탐착해서 머물거나 ‘무사안일’에 주해서 ‘본래면목’을 깨닫지 못한 ‘납자’인데 ‘지관(간화선)’으로 대치한다. 

해석하시길 “향상하는 유일한 ‘관문’은 발을 들여놓을 ‘문’이 없다. 운문(864~949)선사가 말하기를 ‘‘본지풍광을 뚫고 벗어나지 못하면 두 가지 병이 있고, ‘법신’을 뚫어도 두 가지 병이 있다고 하였으니, 반드시 낱낱이 모두 뚫어야 한다”고 했다. ‘향상일로’는 선종에서 생각이나 말로 전할 수 없는 경지다. 석보제(釋普濟,1179~1253)의 ‘오등회원’에서 “하늘에 올라가려 해도 ‘길’이 없고 땅으로 내려와도 ‘문’이 없다”고 한 내용으로 ‘선사의 공안’을 타파하는 길은 일체 분별을 떠나는 것이다. 즉 ‘운문광록’에서 “‘본지풍광’의 ‘공안’을 깨닫지 못하거나 깨달았어도 조금이라도 마음에 ‘상’이 있으면 병이다. ‘법신’의 ‘실상 공’을 깨달았어도 자신의 ‘견해’와 법에 대한 ‘집착’이 있으면 ‘병’이다”고 한 것이다. 따라서 선학자는 선사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게송하시길 “향기로운 꽃밭 길을 지나지 않으면, 꽃 떨어진 마을에 이르지 못하리라”고 했다. ‘방편수행’과 ‘8선정’의 과정이 없다면 ‘무념불승’의 경지를 증득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76장은 “‘종사’도 여러 가지 병이 있다. 병이 ‘귀와 눈에 있는 자’는 ‘눈썹을 치켜 올리고 눈을 부릅뜨며’,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선’이라 여긴다. 병이 ‘입과 혀에 있는 자’는 전도된 말과 방언으로 어지럽게 ‘할(喝)’하고 소리치는 것을 ‘선’이라 한다. 병이 ‘손과 발에 있는 자’는 ‘앞으로 나가고 뒤로 물러서며 여러 방향을 가리키는 것’을 ‘선’이라 한다. 병이 ‘마음속에 있는 자’는 ‘현묘한 이치’를 끝까지 연구하고 ‘감정’을 뛰어넘고 ‘견해’를 떠나는 것을 ‘선’이라고 한다. ‘실상’에 근거해서 논하면 ‘병’아닌 것이 없다”이다. 

정선(淨善,?)의 ‘선림보훈’에서 심문선사(心聞曇賁,1100~1170)가 ‘종사’의 병을 설한 것이다. 원오는 ‘벽암록’에서 “경전은 전하지 않는데 학자가 수고로운 것이, 마치 원숭이가 그림자를 잡는 것과 같다”고 한 것과 같이 가감 없이 정교한 이치를 연구하는 ‘교종’과 ‘본래면목’을 깨닫지 못한 ‘외도선’은 ‘병’이다. 

해석하시길 “‘부모를 죽인 자’는 부처님 앞에 참회라도 하지만, ‘반야’를 비방한 자는 참회할 길이 없다”고 했다. ‘운문광록’에서 깨닫지 못하고 ‘도’를 설하는 것은 ‘불조’를 죽인 일보다 죄가 깊다는 것이다. 게송하시길 “허공에서 그림자를 잡아도 ‘묘’하지 않거늘, 만물 밖에서 ‘자취’를 좇는 것이 어찌 뛰어난 기틀이겠는가”라고 하시다. ‘본분종사’의 법은 ‘생각’이나 ‘어록’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본지풍광‧본래면목’을 깨달아야 한다.

선응 스님 동국대 불교학 박사 sarvajna@naver.com

 

[1562호 / 2020년 11월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