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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세계 3대 불교유적과 불교음악 ② 앙코르와트의 크메르 불교음악

킬링필드로 단절 캄보디아 전통무 ‘압사라’ 앙코르와트 부조로 복원

앙코르와트는 크메르 문화 새겨진 역사교과서…압사라·여신상만 1737개
1970년대 크메르루주 의해 악사·예인들 모두 죽임당해 전통문화도 단절
부조에 있는 손동작·악기들 이웃나라 도움으로 복원 세계문화유산 지정

앙코르와트 전경.

2004년 8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민족음악 학술세미나에 참가했다. 행사가 시작되는 날 왕자의 축사가 있어 이른 아침부터 전통 예복을 차려입은 궁녀들이 줄지어 꿇어앉아 의전 준비를 하는데 어쩜 그리도 허리가 잘록하고 가슴과 엉덩이가 볼록한지 자꾸만 눈길이 갔다. 만약 필자가 남자였다면 엉큼하다고 주변에서 꽤 흉보았을 것이다. 세미나 일정을 마치고 씨엠립으로 가기 위해 비행장에 당도하니 프로펠러 비행기가 대기하고 있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비행기를 타는 기쁨도 잠시, 프로펠러 소리가 어찌나 큰지 귀를 막아야 했고, 창틈으로 구름이 들어오는 데다 급하강을 수시로 하는지라 손에 땀이 흥건해졌다. 그러던 중 눈에 들어오는 지형을 보니 산맥 사이에 마을이 있는 우리와 달리 강줄기 사이에 있는 들판이 온통 물로 뒤덮여 있었다. 중국 칭하이에서 발원해 윈난을 지나 메콩을 거쳐 바다로 가는 물가에 사는 사람들, 메콩의 수위를 조절하는 톤레삽 호수를 물탱크로 삼아 씨엠립에서 번성기를 이룬 크메르왕조의 치수 사업의 위력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씨엠립에 왕국을 건설한 자야바르만 2세(770~850)는 어린 시절 자바의 사일렌드라 왕국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그곳 공주와 결혼했다. 자바 왕실 사위가 돼 신임을 얻자 첸라(중국 사서에는 진랍)로 돌아올 수 있었다.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캄보디아 일대를 통일하고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독립해 크메르왕국을 건설(802)했다. 즉위식인 데바 라자(神王) 의식을 치를 때는 “자신이 사일렌드라 왕들보다 더 높은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외쳤다. 자야바르만 2세와 앙코르와트를 짓기 시작한 수리야바르만 2세(재위 1113~1150) 사이에는 16명의 왕들이 있었고, 이 과정에 대승·상좌부·힌두를 오가는 왕들의 종교적 취향이 다양했다. 오늘날 95%가 테라바다 불교신자가 되기까지는 캄보디아 승단의 높은 수행력과 사회교육의 역할이 컸다. 캄보디아인민공화국이 성립되던 1970년대 무렵 통계에 따르면, 불교사원에서 운영하는 초등 팔리어학교가 529개, 학생 수가 2만여명에 달했다. 그만큼 사찰의 사회교육 기능이 매우 컸다. 

중국 사서에서 유일하게 ‘야만’ 등의 표현이 없는 곳이 크메르왕국이다. 이들의 문화와 번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앙코르와트 부조에서도 드러난다. 당시의 전쟁, 군사기술, 무기, 크메르인과 주변국의 복식과 외모, 동식물까지 상세히 묘사하고 있는 앙코르와트 부조는 그야말로 크메르인들의 타임캡슐이라 할만하다. 자신을 신의 대리인으로 여겼던 당시 왕들은 개인적으로 힌두교를 신앙하면서 대신들은 불교도를 기용할 정도로 이중적인 신앙형태를 띠고 있었다. 힌두사원인 앙코르와트 입구에는 현세와 내세를 이어주는 바라이 다리가 있다. 이 다리를 건너면 우유의 바다를 젓고 있는 신들이 인간을 향해 손짓하고, 지옥에서 잔혹한 형벌을 받는 인간과 악마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수직구조 형태인 앙코르와트는 1층은 미물계, 2층은 인간계, 3층은 천상계를 나타낸다. 평면적으로는 세 겹의 회랑이 중앙 사당 쪽으로 한 단씩 높아지며 피라미드 형태를 이룬다. 

이러한 건축물 곳곳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압사라와 천상의 여신상이 1737개에 이른다. 특히 압사라는 가슴이 볼록하고 허리가 잘록했다. 세미나장에서 보았던 그 궁녀들이 압사라의 몸매요, 캄보디아 남정네들의 이상형임을 알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왕을 위해 사원 벽면에 빼곡히 새겨놓은 무희와 천녀(天女)들은 왕의 사후에 함께할 것이라 얼마나 섬세하게 다듬었는지 금방이라도 걸어 나와 왕을 향해 머리를 조아릴 것만 같았다. 

앙코르와트 무희 조각상.
앙코르와트 압사라 부조.

제1회랑 벽면에는 크메르제국의 역사를 새긴 부조가 마치 역사교과서를 읽는 듯하다. 이러한 부조 가운데 압권은 병사들 사이에 코끼리를 타고 있는 수리야바르만 2세의 모습이다. 행렬 부조에는 당시 크메르왕궁에서 사용하던 여러 종류의 악기들이 선명하게 조각돼 있다. 이들 악기 중 하프나 비나는 ‘인도’, 해금같이 생긴 트로소와 트로우는 ‘중국’, 마호리는 ‘태국’, 클랑 츠낙은 ‘말레이반도’에서 들어온 것이라 크메르시대 문화교류의 면면을 읽게 한다. 

앙코르와트 건립으로 국력이 쇠진한 데다 빈번한 전쟁에 징발돼오던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내분과 쇠락의 틈을 타고 1177년 참파군의 공격을 받아 왕이 죽고 수도가 파괴됐다. 이때 한 왕자가 참파군을 무찌르고 왕이 됐으니 그가 자야바르만 7세(재위 1181~1218)다. 그는 새로운 도성을 정비하며 불교사원 앙코르톰을 지었는데, 여기에는 자신을 관세음보살과 동일시했던 면면이 담겨있다. 사면불안(四面佛眼)으로 정토세계를 구현한 바이욘 사원 주변에는 관세음보살의 얼굴이 새겨진 돌탑이 수십 개나 있고,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리기 위한 타프롬 사원의 벽면과 천장은 온갖 보석으로 장식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보석들은 도굴꾼들에 의해 사라졌고, 안젤리나 졸리가 주인공을 맡은 영화 ‘툼레이더’의 촬영무대로 더 알려져 있다. 자야바르만 사후에 크메르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고, 1431년 태국 아유타야 왕조의 침공으로 몰락했다.

코끼리를 타고 가는 수리야바르만 2세와 병사들.

이후 주변국들의 봉신(封臣)으로 전전하다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됐다. 1969~1979년 농경 유토피아 건설을 내세운 크메르루주의 킬링필드 시기에 궁중 악사와 예인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크메르루주 일당은 20대 초반 시골 젊은이들을 데려가 고문 기술을 가르쳐 써먹었고, 마지막에는 그들도 반동으로 몰아 학살했다. 농요 채집을 위해 프놈펜 근교 마을을 다녀 보니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순박한지 이들에게 있었던 킬링필드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은 세공품이며 수제품들을 사며 손을 잡자 “우리는 염려 없다. 불교라는 보물을 잃지 않는 한….”이라고 말했다. 그때 만난 스님들과 사진을 찍는데 자꾸만 앵글 밖으로 뒷걸음질 쳤다. 여인과 접촉을 금하는 계율을 모르고 덤벼드는(?), 말이 통하지 않아 설명도 할 수 없는 외국 여인을 피하느라 수줍게 웃던 스님들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공화국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전통 복원사업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그러나 캄보디아 전통 악가무는 구전에 의존해 왔기 때문에 복원작업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여서 태국의 궁중악사, 인도네시아 가믈란의 도움을 받아가며 복원이 진행됐다. 이러한 과정에 압사라의 춤은 앙코르와트 부조에 새겨진 수많은 손동작이 중요한 텍스트가 됐음을 2004년 프놈펜 세미나에서 들었다. 복원사업이 시작된 지 반세기가 흐른 지금, 캄보디아의 전통 악가무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이들을 크게 분류해 보면, 궁중에서 행해지던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 공연, 씨엠립의 기우제 낭메오, 숫사슴 춤 뜨롯과 사냥꾼 악단의 음악, 꺼꽁의 풍어제와 삼신제 그리고 각 지역의 무속 춤, 기악 합주로는 핀 피아트, 마호리, 플렝 크메르, 클랑 츠낙, 플렝 크농 스코르 합주가 있다.

이들 중 핀 피아트합주는 불교의식에 주로 많이 쓰인다. 이 합주에 쓰이는 악기들을 보면 대나무 실로폰인 로네트 데크, 로네트 엑, 로네트 둥, 동그란 놋쇠 판을 둥글게 엮은 콩 토우치, 한국의 태평소와 닮은 스랄라이, 타악기 삼포르와 스코르돔이 편성된다. 장구와 비슷한 삼포르는 몸통이 볼록하고, 모둠북 같이 생긴 스코르돔은 두 개의 북을 비스듬히 누여서 두드린다. 핀 피아트 합주는 사찰에서의 쓰임 외에 캄보디아 기악합주를 대표하고 있다. 그외 합주의 쓰임을 보면 마호리는 각 지역 민속음악과 여러 가지 노래의 반주, 클렝 크메르는 결혼식, 클랑 츠낙과 플렝 크농 스코르는 장례의식에서 주로 쓰인다. 

2004년 8월 프놈펜 국제학술 세미나에서 공연된 압사라.
씨엠립의 왓보사원에서 연주하는 핀 피아트 합주단.

앙코르와트 부조에 유독 많은 압사라는 고대 인도 문헌에서 하급 여신, 크메르어로는 사원 본존의 공양녀라는 뜻의 ‘데보다’로 불린다. 부조가 조각된 시기에 따라 압사라가 쓴 관과 몸에 걸친 장식, 치마의 주름과 손동작에 미세한 차이가 있어 전문가들의 시선을 끈다. 대개 동남아지역 궁중무에서 머리에 쓴 관을 보면 탑 모양으로 뾰족한 것이 일반적인데 압사라는 동글동글한 장식이다. 이는 티베트 참무의 탈 중에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호법 다키니(중국에서는 화우)의 탈과도 닮았다. 파드마삼바바에 의해 전래된 인도불교 텍스트 ‘예세 감록’에 기반해 참의식을 제정한 내력을 생각해 볼 때 압사라의 자태와 차림새가 전혀 무관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가 하면 한국의 처용탈에 귀신을 쫓는 복숭아가 동글동글 달린 것도 같은 선상에서의 변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압사라의 남친 간다르바는 신라로 건너와 석굴암의 부처님을 지키고 있는가 하면, 팔부신장으로 불법 수호의 공이 크지만 조선시대에는 할 일 없이 건들거리는 캐릭터가 돼버렸다. 고대 인도 최초의 악서 ‘나띠야샤스뜨라’와 6세기 무렵 나라다가 저술한 ‘나라디야쉬끄샤’ 등에서 간다르바는 음악과 동일어로 서술되고 있다. 그래서 추정해 보면, 간다르바 음악에 의해  천상의 악사 캐릭터가 만들어졌고, 그 음악에 춤추던 무희 압사라가 간다르바의 연인으로 각색됐을 것이다. 향을 음미하고 음악을 연주하며 하늘을 나는 뮤즈 간다르바에게 압사라라는 아름다운 여친까지 있으니 조선 유생들이 시샘해 ‘건달’이라는 미운털이 박힌 것이 아닐까?  

윤소희 음악인류학 박사·위덕대 연구교수 ysh3586@hanmail.net

 

[1563호 / 2020년 12월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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