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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여래는 모양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기자명 현진 스님

대혜종고 이전부터 이어져 온 번역 논란

‘무단무멸분’의 번역을 두고
범본·한역본마다 차이 보여
정확한 의미 해석 위해서는
모든 판본 참고해야만 가능

제27 무단무멸분의 구마라집 번역본을 보면 ‘여래불이구족상고득아누다라삼막삼보리(如來不以具足相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막작시념(須菩提莫作是念): 여래불이구족상고득아누다라삼막삼보리(如來不以具足相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이 부분에 대한 번역논란은 최근의 일이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중국 손지현이 대혜종고(1088~1163)에게 이 점에 대해 문의하자 “억측스런 소견으로 성인의 뜻을 깎고 덜어낸다면 이 또한 인과법에 걸려서 성인의 가르침을 훼방하는 것이기에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은 논할 것도 없지만…”이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몇 가지의 범본이 존재하는 지금은 어떻게 정리될 수 있을지 간략히 살펴본다.

가장 보편적인 범본인 콘즈(Conze)본은 “여래에게 32상이 갖춰졌다고 하여 무상정등각을 깨달았다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여래에게 32상이 갖춰졌다고 하여 무상정등각을 깨달은 것은 아니다”라고 되어 있다. 또 하나의 범본으로서 특정 부분에서 콘즈본과는 달리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본과 완벽한 일치를 보였던 길기트(Gilgit)본 또한 “여래에게 32상이 갖춰졌다고 하여 무상정등각이 깨달아졌겠느냐?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여래에게 32상이 갖춰졌다고 하여 무상정등각을 깨달았다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라고 되어 있어 콘즈본과 동일한 내용으로 서술되어 있다. 또한 한역본 가운데 범본의 직역에 가까운 현장 스님의 번역내용 또한 “여래에게 뭇 모양들이 온전히 갖춰졌기 때문에 무상정등각을 증득하였겠느냐? 그런 생각은 하지 말지니라. 여래에게 뭇 모양들이 갖춰짐으로써 무상정등각이 증득된 것은 아니니라”라는 동일한 내용이다.

단지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본만이 범본이나 다른 한역본과 달리 되어있으니, 그 내용은 “여래는 모양을 온전히 갖추지 않은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수보리여 여래는 모양을 온전히 갖추지 않은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지니라”이라고 되어있다. 우선 무엇보다 ‘32상을 갖추지 않았기에 무상정등각을 얻었다’라는 내용은 제27분까지 서술해온 내용과도 배치된다. 혹은 구마라집 한역본을 조금 변형시켜 ‘不’자를 해당 문단의 뒷부분에 있는 ‘得’자에 붙여 “여래는 모양을 온전히 갖춘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면, 수보리여 여래는 모양을 온전히 갖춘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말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 경우는 오히려 더욱 혼란만 가중할 뿐이다.

그래서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몇 가지 범본이 존재하는 까닭에 그 범본들에 근거해 구마라집 번역 가운데 두 차례 나오는 ‘불(不)’자를 연자(衍字)로 본다면 해석내용은 ‘여래는 모양을 온전히 갖춘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수보리여 여래는 모양을 온전히 갖춘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지니라’가 되어 문제가 일순간 해결되어버린다. 그런데 구마라집 스님이 저본으로 삼은 범어 판본이 어떤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불(不)'을 연자로 여긴다는 것은 분명 해결책은 아니다.

혹은 ‘불(不)'자를 연문이 아니라 의도적인 첨부로 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본 문단에 이어서 단멸의 견해를 막아주는 내용이 나오므로 문맥의 흐름을 고려할 때 ‘불(不)'자가 들어가야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육조 스님은 단멸을 막아주는 경우로 보아서 “수보리가 ‘참된 몸은 상을 떠났다’는 말씀을 듣고는 32가지 청정행을 닦지 않고도 깨달음의 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일컫고 있으니,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여래는 청정행을 닦지 않고도 보리를 얻었다고 말하지 말라시며, 만약 청정행을 닦지 않고도 아뇩보리를 얻었다고 말하는 것은 곧 깨달음의 종자를 끊어 없애버리는 것이므로 그럴 리는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셨다. 결국 판본의 문제는 무엇을 버리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내느냐에 있는 까닭에, 이 모든 내용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63호 / 2020년 12월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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