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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법의 단멸을 말하다

기자명 현진 스님

대승불자라면 방편이라도 해서는 안 될 말

‘법의 단멸을 말하다’ 의미는
임시로 시설한다는 뜻이 내포
시설된 모든 것과 가명 등은
우리가 추구할 깨달음서 벗어나

제27 무단무멸분에 “보리의 마음을 일으킨 자는 ‘법의 단멸을 말한다(說諸法斷滅)’고 여기지 말라”는 문장이 있다. 그 바로 앞의 문단에서 몇 가지 범어판본 및 현장 스님의 한역본은 “여래는 32상을 갖추었다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라고 여기지 말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반면에 구마라집 스님은 “여래는 32상을 갖추지 않은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라고 여기지 말라”라고 ‘불(不)’ 한 글자를 더 첨부하여 번역내용을 수정한 이유, 혹은 스님이 저본으로 삼은 범어판본이 그렇게 되어 있는 까닭이 바로 이 ‘보리의 마음을 일으킨 자는 법의 단멸을 말하지 않음’에 함유된 의미를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 육조 스님의 의견이었다. 32상을 갖추지 않았다는 단멸로써 결국엔 어떤 형색이나 음성으로도 성취할 수 없는 무상정등각을 얻을 수 있으리라 여겨선 안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법의 단멸을 말하다’란 부분에 해당하는 산스끄리뜨 문장을 찾아 해석해보면 “법의 단멸을 시설(施設)하다”로, 즉 ‘말함’이 ‘시설함’이라 표현되어 있다. 시설(施設)은 ‘잘 알 수 있도록 해놓은~’ 정도의 의미를 지닌 산스끄리뜨 ‘prajñapta’를 옮긴 말인데, 설비나 장치 따위를 차려놓거나 일정한 구조물을 만들어놓은 것을 가리키는 말로써 지금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흔히 쓰이는 말 가운데 하나이다. 예를 들자면 아파트의 모델하우스 같은 ‘시설’은 어떤 대상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구조물을 가리키니, 원래 불교용어였다가 일반용어로 정착된 이 말에는 시설되었다는 그 어떤 무엇이 임시적(臨時的)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경전에 흔히 표현되는 ‘시설된 중생계’라 하면 그 중생계는 중생들이 해탈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임시적인 구조물에 해당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불교의 세계관에서 괴겁(壞劫)에 모든 중생이 초선천 이상의 중생세계로 올라가면 국토인 기세간(器世間)이 그제야 파괴되기 시작한다 하였는데, 이 기세간이 곧 시설(施設)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법의 단멸을 말한다’는 의미로서 ‘법의 단멸을 시설한다’는 표현에는 그렇게 시설된 법의 단멸은 순전히 임시적인 것일 뿐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보리의 마음을 일으킨 자는 법의 단멸을 말한다(즉, 시설한다)고는 생각지도 말라”는 말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는, 모름지기 보리의 마음을 일으킨 자라면 법의 단멸에 대해선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정도가 아니고 그것이 임시적이고 방편적일지라도 그렇게 일컫는 것조차 해선 안 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그 만큼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이면 자칫 단멸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 여지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가 ‘불교는 허무주의야~’라고 쉽게 말해버리듯이.

시설(施設)처럼 이미 일상의 용어로 정착한 말 가운데 역시 불교용어에서 옮겨온 것에는 가명(假名)이란 말이 있다. 그런데 시설과 가명 이 두 단어는 거의 동일한 산스끄리뜨 단어를 번역한 말이다. 시설은 ‘잘(pra­) 알 수 있도록(jñā) 해놓은 것(­ta)’이란 의미의 ‘prajñapta'의 번역어이고, 가명 또한 ‘~하는 것'이라는 동일한 의미를 지닌 조사만 ‘ta'가 아닌 ‘ti'로 바뀐 것일 뿐인 ‘prajñapti'이니, 시설과 가명은 의미상 차이는 없는 상태에서 달리 사용된 동일한 두 단어일 뿐이다. 무엇이든 시설된 것은 임시로 그렇게 이름 붙여놓은 가명일 뿐이요, 가명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그저 임시로 시설된 것일 뿐이기 마련인 까닭이다.

여래의 말씀에, 아상과 인상 등 네 가지 상(相)은 결국 파괴되는 것이기에 참된 깨달음의 실체가 아니며, 일체의 중생이란 그 모든 것이 임시로 붙여진 이름[假名]일 뿐이기에 망령된 마음만 여읜다면 이내 중생이랄 것도 없어서 곧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래서 시설된 모든 것과 임시로 붙여진 이름을 지닌 모든 것들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깨달음의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며, 그러한 수행의 길에 있는 대승불자라면 법의 단멸(斷滅)을 설하는 것은 물론이요 설령 임시로 시설하여 가명으로 언급하는 것조차 금해야 함을 무단무멸분에서 강조하고 있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64호 / 2020년 12월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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