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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기자명 김준희

서른 두 개 소나타는 거장이 이룬 빛나는 지혜

32개 소나타가 담긴 음악적 철학, ‘금강경’ 32품 연상
연주 기교의 한계 넘어선 인상 깊은 선율 소우주인 듯
베토벤 탄생 250주년…현재도 전 세계적인 사랑 받아

베토벤.

루드비히 반 베토벤은 평생에 걸쳐 서른두 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며 피아노를 ‘악기의 제왕’ 반열에 올려놓았다.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를 거치며 18세기 중반 이미 형식적으로 완성된 장르인 소나타를 통해 매우 자유롭고 개성적이면서 위대한 음악세계를 고스란히 담았다. 베토벤은 서른두 개의 소나타로 서양 음악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다.

베토벤의 청년 시절 작품 중 대중들의 사랑을 가장 받는 작품은 소나타 C단조, Op.13 ‘비창’ 이다. 베토벤은 이 곡의 제목을 스스로 붙였는데, ‘비창(Pathetique)’이라는 의미는 노년의 비장하고 심각한 비극적 정서보다는 젊은 시절의 다소 패기 넘치는 아련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베토벤은 “예술가는 불과 같이 격렬하게 타오르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 곡은 청년 베토벤의 예술에 대한 자신감과 적극적인 면모를 나타내 준다고 볼 수 있다.

평론가 로흘리츠는 이 곡의 1악장 서주를 두고 “고고한 우수”라고 평했다.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를 연상시키는 서주의 반복되는 C, D, Eb 세 음은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교향곡’에서 쓰이기도 했다. ‘엄숙하면서도 격렬한 힘’으로 표현된 빠른 주제 부분은 열정적 서정미를 느끼게 하며 다소 직설적으로 강렬하게 느껴지는 요소들까지도 따뜻한 인간미로 다가온다. 로흘리츠가 ‘평안과 고요’에 되돌아 온 영혼이라 칭하며 감탄했던 2악장은 베토벤 소나타의 전 악장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곡이다. 또한 3악장은 ‘비창’이라는 제목과 사뭇 다르게 격렬하거나 불타오르는 낭만성 보다는 아련한 모차르트적 비애가 느껴진다. 영국의 시인 스코트는 이런 정서를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볼 수 있는 ‘청춘에게서 느낄 수 있는 공통적 애상’의 느낌으로 평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세련된 정서를 가진 ‘비창 소나타’는 ‘금강경’ 제14품의 내용을 떠올리게 한다. 수보리가 반야의 성취에 도달하는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깊이 깨달아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남회근(1918-2012)선생은 이 내용을 게송으로 이렇게 표현했다.

베토벤의 생가. 베토벤은 이 건물의 3층 작은 방에서 태어났다(독일 본).

‘우담화는 피었다 이내 사라지니/ 지금의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로다/ 미소로 가리키는 백련을 바라보니/ 진흙 향 속에 영주가 자라네 (優曇花發實還無 塵刹今吾非故吾 笑指白蓮閒處看 汚泥香裡養靈珠)’ 

필자는 베토벤의 서른 두 개의 소나타를 ‘금강경’에 비유해 본다. 32품의 ‘금강경’의 게송과 베토벤의 소나타의 개수가 같다는 우연한 공통점으로 시작된 단순한 사유였지만, 게송들을 살펴보면 베토벤의 소나타가 담고 있는 음악적 철학이 느껴지는 것 같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상(相)을 떠난 적멸(寂滅)에 관한 말씀 뒤에 마무리하는 게송은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상당히 세련된 정서가 느껴진다. 특히 ‘미소로 가리키는 백련’은 ‘비창 소나타’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아다지오 악장에 비유하고 싶다. 

베토벤의 피아노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선율로 시작하는 두 번째 악장은 ‘Midnight Blue(1982)’라는 팝송에서 차용될 만큼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다. ‘비창’, 즉 ‘pathos’라는 감정을 배제한, 그러나 가장 정적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차분하게 나타낸 선율이야말로 비창 소나타의 핵심이 아닐까. 200여년이 지나 새로운 시대의 노래로 재탄생돼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 남은 최상의 선율은 베토벤이 얼마나 특별하고 위대한 작곡가였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비창소나타'의 표지. 당시 유행했던 프랑스어 제목 표기와 하프시코드 또는 피아노로 연주가 가능하다는 지시어가 눈에 띈다.

서른 살 무렵 베토벤은 점점 약해지는 청력으로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이 시기 베토벤은 음악가로서 맞이한 가혹한 운명에 맞서겠다는 각오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불운을 이겨내겠다는 젊은 베토벤의 의지가 ‘교향곡 제5번 C장조 Op.67’ 등에 담겨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악성 베토벤의 웅장함과 장대함, 그리고 남성적인 면모를 만날 수 있다. 

피아노 소나타 F단조, Op.57 ‘열정’은 1804년 작곡된 베토벤의 중기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이면서도 원숙미가 넘치는 작품이다. 그의 왕성한 작품 활동이 가장 정점에 도달했을 때 작품으로 음색의 울림과 표현 뿐 아니라 작품의 형태적인 면에서 완벽한 구성을 보여주며, 내면적으로나 외면적으로나 뛰어난 균형미를 자랑한다. 건반이 확장된 에라르(Erad)피아노를 사용해 작곡된 이 곡에서 베토벤은 페달의 사용에 대해 명확하게 지시하기도 했다. ‘열정(Appassionato)’이라는 제목은 출판업자 크란츠가 붙인 애칭이지만 이 곡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에 매우 적합하다.

베토벤의 연인이라고 하는 테레제(Therese, ‘엘리제를 위하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혹은 그녀의 동생인 조세핀을 위한 곡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사랑의 갈구에 대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이 곡의 곳곳에는 엄숙한 갈망, 억제하기 힘든 사랑의 고백, 침통한 기분, 억누르는 듯한 감정 등이 교차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첫 악장과 마지막 악장은 엄격한 짜임새 속에 압도하는 분위기를 내재하고 있으며 감7화음의 잦은 사용으로 복잡한 그물과 같은 느낌을 준다. 한쪽 뺨에 주름이 지어진 프로메테우스의 모습이 느껴지기도 한다. 반면 숭고한 분위기마저 느껴지는 두 번째 악장은 기본적이고 소박한 3화음을 중심으로 가장 아름답고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베토벤이 아니면 이렇게 명료한 구조 안에 천상의 소리를 구현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열정소나타'자필악보. 물에 젖은 악보에서 베토벤의 고뇌가 느껴진다.

듣는 이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더 듣고 싶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열정 소나타’는 정열과 투쟁이 가득 담긴 곡으로 기교적 차원에서 볼 때 연주 영역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인상 깊은 선율들로 가득 찬 소우주와 같은 이 곡은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무대에 올리고 싶은 곡이다. 이 곡과 함께 남회근 선생이 ‘금강경’ 18품을 해설한 게송을 읽어본다.

형형색색의 것이 모두 다르나/ 천수천안은 뚜렷이 하나의 도를 본다 /우주는 물거품, 마음 따라 생멸하고/ 허공은 붙들 수 없으니 누굴 안정시키랴 (形形色色不同觀 手眼分明一道看 宇宙浮漚心起滅 虛空無著爲誰安) 

베토벤은 서른 두 개의 피아노 소나타로 다이아몬드와 같이 견고하며 빛나는 깨달음의 지혜를 얻어 번뇌와 고통을 잊고 평화로운 언덕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을까. 탄생 250주년이 되는 올해 베토벤의 생일(12월17일)을 맞이하여 그의 소나타를 연주하며 인류역사상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작곡가의 탄생을 기념해 본다.

김준희 피아니스트 pianistjk@naver.com

 

[1564호 / 2020년 12월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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