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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좌차 속의 본분사

기자명 법장 스님

승가 내 수행 질서 바로잡는 역할

스님들의 임무를 나누는 과정
서열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어
법랍 따른 소임 차이 있지만
공동체 안의 역할 분담일 뿐

불교의 전통 중에 ‘좌차’라는 것이 있다. 출가한 법랍(연차)으로 승가 내의 서열을 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좌차는 자칫 일반사회의 서열문화와 같이 인식될 수도 있다. 물론 같은 공동체 내의 여러 가지 의무나 일 등을 나누는 과정에서 서열과 같이 기능하여 그 순서를 정하는데 좌차가 사용된다. 그렇기에 불교의 집중수행기간인 안거 동안에는 좌차를 통해 식사를 하거나 경내에 들어서는 등 승가의 질서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노스님을 시봉하거나, 주요소임자를 돕는 소임도 좌차를 통해 정한다.

이처럼 좌차는 서열의 기능도 있지만, 수행의 질서를 잡아주는 기능도 한다. 사찰에는 다양한 소임들이 있다. 특정 누군가가 뛰어나서 모든 소임을 다 맡아서 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여러 스님들이 서로 도와가며 사찰을 유지하고 그 안에서 각자의 수행을 이어가야 한다. 이 역할이 바로 좌차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바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소임을 성실히 임하게 하는 것이다.

‘범망경’ 제38경계인 ‘좌무차제계(坐無次第戒)’에서는 승가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계율로써 다루고 있다.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을 탐내거나, 아직 법랍이 되지 않았음에도 윗사람을 무시하거나 소임을 맡으려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같은 승가 내의 모든 이들은 반드시 각자의 소임을 맡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함께 해야 한다. 이처럼 불교에서 좌차를 중시하는 것은 단순히 서열을 구분하여 수직적으로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각자의 본분에 맞는 소임을 나누어 승가가 원만히 유지되고 그 안에서 모두가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최근 우리사회는 점차 ‘능력 위주’로 변해가고 있다. 특정 분야에 특출한 능력이 있다면 당연히 존중받고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러나 ‘능력 위주’가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마치 돈이 많은 것이 능력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그래서 그저 돈이 많다는 이유로 뭐든지 가질 수 있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점차 커져가고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역할이 있다. 그리고 저마다의 희망과 행복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가 화합하며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한 회사에서 사장은 사장의 역할을, 부장은 부장의 역할을, 사원은 사원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임해줘야 그 회사가 운영될 수 있다. 그런 속에서 직급이 높은 사람은 아래 사람들을 잘 지도해주어 자신의 역할을 전해줄 후임자로 만들어 가야한다. 어떠한 경험도 경력도 없이 그저 어느 집 자식, 또는 재력가라는 이유로 갑작스레 사람들 위에 올라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조직은 그 빈약한 기반으로 인해 금세 주저앉게 된다. 실제로 그러한 일을 우리는 여러 경제뉴스를 통해서 수없이 지켜봤다.

우리 사회도 이제 서열만을 따지거나 지나치게 자본주의적인 관점에서 판단하려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 점에서 불교의 좌차가 주는 의미는 크다. 공동체 내의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게 해주는 좌차는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기능일 것이다. 한국의 청년들은 지금 아무리 노력해도 본인 한 명 취직할 수 있는 회사가 없고, 밤잠을 줄이면서까지 노력해도 기회조차 얻기 힘든 사회 구조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이는 청년만의 일이 아닌 어쩌면 우리와 우리 가족 모두에 해당된다.

서로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고, 다음 사람들도 함께 자신의 일을 맡아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야 한다. 그저 물질적인 것에만 치우쳐 손에 잡히지도 않는 신기루를 좇는 것이 아닌 지금의 현실에서 공평하게 기회를 받고 정당하게 자신의 일에 대한 보상을 받으며 모두가 책임감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회로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법장 스님 해인사승가대학 학감 buddhastory@naver.com

 

[1565호 / 2020년 12월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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