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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정선 ‘의금부도’

기자명 손태호

과거 권력투쟁 공간서 현재 대한민국을 떠올리다

의금부도사 발령받은 정선이 선배 낭청들에게 선물한 금오계첩
국왕 직속 최고 권력기관…상대 옥죄면 결국 스스로 걸려들기도

정선 作 ‘의금부(義禁府)’, 종이에 먹, 34.5×46.5cm, 1729년, 개인소장.
정선 作 ‘의금부(義禁府)’, 종이에 먹, 34.5×46.5cm, 1729년, 개인소장.

요즘 연일 매체와 미디어를 뜨겁게 달구는 뉴스는 법무부와 검찰의 공방입니다. 사실 둘 다 행정부에 소속된 같은 계열 상하 조직임에도 서로 비난하는 것도 모자라 고소, 고발까지 하는 모습이 참 가관입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우리 서민들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이전투구가 정말 답답합니다. 사실 두 조직 간의 충돌이 복잡해 보이지만 본질은 권력다툼입니다. 그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던 검찰 권력을 사법개혁을 통해 분산시키려는 세력과 그에 저항해 자신의 권한을 놓지 않으려는 세력 간의 충돌입니다. 

아무튼 이런 뉴스를 보면서 조선시대 관청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바로 조선시대 최고 사법기관 의금부(義禁府)입니다. 의금부는 고려 말 원(元)이 고려의 내정간섭을 위해 설치했던 감찰기관인 순마소(巡馬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치안유지와 친위군으로 역할이 바뀌다가 조선 건국 후 태종 때 의금부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조선 말 갑오경장 때까지는 줄 곧 국왕 직속 사법 전담기관으로 왕명을 받아 죄인 심문부터 형벌 집행까지 수행하는 국가 최고의 권력기관이었습니다. 

화면 자욱한 안개 속에 의금부 건물이 있고 그 주변으로는 많은 민가들이 있습니다. 오른쪽 위 멀리 산이 있고 그 중간에는 안개가 내려앉은 듯 생략하였습니다. 건물은 네모난 구역에 담장이 있는데 건물 오른쪽이 대문 쪽이고 마당 넘어 중앙에 ‘ㄴ’ 자형의 건물이 있습니다. 그 중 세로로 긴 건물이 중심건물로, 위쪽부터 판서가 있는 동아방, 대청, 낭청방이 이어져 있습니다. 대청 중앙에서 대문 방향으로 툭 튀어나온 곳은 호두각(虎頭閣)이란 이름의 공간으로 다른 관청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장소입니다. 바로 호두각이 죄인들을 심문하고 공초를 받는 곳으로 의금부의 상징적인 곳입니다. 

중심건물과 붙어있는 아래쪽 가로 건물은 경범죄인을 가두는 서간이고, 위 담장 쪽 건물은 중죄인을 다뤘던 동간입니다. 건물 맨 아래에 별도 담장으로 구획된 건물은 ‘부군당(附君堂)’이란 곳으로 관아의 수호신을 모셔놓고 복을 비는 곳인데 조선시대에는 관아별로 이런 ‘부군당’이 있었습니다. 중심건물 뒤로는 방형 연못이 있고 의금부 곳곳에 큰 버드나무가 여러 구 심어져 있습니다. 보통 매를 때릴 때 사용하는 곤장은 버드나무로 만드는데 의금부에 버드나무가 심어져 있으니 무슨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선전기 문신 유성원(柳誠源, 1428~1466)의 ‘의정부제명기(義禁府題名記)’에 따르면 의금부는 특수조직으로 반역사건 및 처결이 어려운 사건만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형조가 일반인 범죄를 다뤘고 포도청이 도둑, 강도, 야간순찰 등을 맡았지만 의금부는 주로 양반, 관리 등 사회지도층에 대한 비리나 대역죄, 강상죄(綱常罪) 같이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중죄를 다뤘습니다. 주로 왕의 명령을 받아 왕권을 위협하는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왕실친위대 역할을 수행해 왕부(王府)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미제 사건이나 중대 사건의 최종 판결도 맡았습니다. 오늘날 행정조직으로 보면 새롭게 만들어질 공수처와 대검찰청, 국가정보원의 일부 역할을 합치고 거기에 대법원 역할까지 겸했으니 얼마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인원 구성은 판의금부사를 비롯한 당상관 3명과 낭청, 서리, 나장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 의금부도사인 10명의 낭청이 실제 운영을 책임지는 가장 중요한 직책입니다. 의금부도사는 ‘금오랑(金吾郞)’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신입 낭청이 들어오면 ‘신참을 면하게 하는 의식’인 ‘면신례’를 꼭 시행했습니다. 이는 신입 도사가 선배들을 대접하는 일종의 신고식으로 이때 반드시 준비해야 하는 것이 모임을 기념하는 기념화첩, 즉 ‘금오계첩(金吾契帖)’을 만들어 10명에게 모두 선물해야 합니다. 그래서 ‘금오계첩’은 꽤 많이 남아있어 당시 의금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겸재 정선의 ‘의금부’도 ‘금오계첩’입니다. 오른쪽 위에 ‘의금부’라는 제목과 겸재가 그렸다는 서명을 적어놓았습니다. 아마 이 작품과 같은 그림 열 장을 그려 낭청들에게 나눠줬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비화가인 정선이 왜 ‘금오계첩’을 그렸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정선이 의금부도사로 발령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의 별지에 참석자 명단이 있는데 정선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정선은 41살에 처음으로 관료가 되었지만 과거 시험이 아닌 추천으로 관직을 얻었는데 이를 음직(蔭職)이라 합니다. 그래서 별지 이름 아래에 다른 사람들은 ‘무과’ ‘사마’ 등 과거시험에 대한 기록이 적혀 있지만 정선은 ‘병진’이라는 태어난 해만 적혀 있습니다. 정선은 첫 관직에 오른 후 관상감 교수, 조지서, 사헌부, 하양현감, 한성부 주부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1729년 종6품 의금부도사가 되었습니다. 정선의 의금부도사 임명은 새로 즉위한 영조의 그림 스승인 정선에 대한 예우였을 것입니다. 정선은 새로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니 ‘면신례’를 위한 ‘금오계첩’을 제작해야 하는데 아무리 기록화라 할지라도 아마추어처럼 그릴 수야 없었을 것입니다. 

의금부의 위치는 지금 종로1가 SC제일은행 본점자리였습니다. 대부분 ‘금오계첩’은 현재 영풍문고 쪽인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이거나 건물 설계도처럼 위에서 내려다본 시점으로 그린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정선은 서쪽, 즉 광화문 사거리 공중에서 동쪽으로 바라본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방향을 생각하면 저 멀리 보이는 산은 아마 아차산일 것입니다. 비록 단순 기록화지만 자신의 장기를 살려 색다르고 운치 있게 그려 계회도의 격을 높인 작품입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흥이 나면 바로 붓을 들었던 예술가 겸재 정선이 죄인을 심문하고 추국하는 일을 했다니 상상이 잘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리 오래하지는 못합니다. 

의금부는 조선시대 떠들썩한 사화와 옥사에 대부분 관련되어 있습니다. 많은 시국 사건들은 임금과 신하, 신하와 신하 사이의 권력다툼이며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의금부를 이용해 정적을 제거한 당파도 결국 의금부에 의해 제거되었습니다. 유성원이 ‘의정부제명기’를 지을 때만 해도 자신이 나중에 의금부에 의해 추살되어 사육신의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릴지 몰랐을 것입니다. 권력투쟁이란 그런 것입니다. 상대를 옥죄는 도구에 자신이 결국 걸려들게 돼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도 ‘너와 내가 결국 하나’임을 깨닫지 못하면 결국 그런 과정을 거칠 것입니다. 정선의 ‘의금부’를 감상하며 아무쪼록 차분하고도 아름답게 개혁이 마무리되길 바라봅니다.

손태호 동양미술작가, 인더스투어 대표 thson68@hanmail.net

 

[1565호 / 2020년 12월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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