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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

기자명 김준희

고해에 떠내려가지 않는 수행자 의지 엿보여

오케스트라 음색과 교향곡 구조 돋보인 피아노곡
병고에 시달리던 청년 슈베트르의 꿈·희망 충만해
진정한 자유 얻은 작곡가 모습 성도재일과 어울려

20대 초반의 슈베르트(Leopold Kupelwieser 그림).

프란츠 슈베르트는 자신의 가곡(Lied) 네 곡의 선율을 기악곡에 사용했다. 그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탄탄한 구성미를 자랑하는 작품이 ‘방랑자 환상곡’ C장조 D.760이다. 1820년 무렵의 청년 슈베르트는 규모가 큰 관현악곡을 작곡하고자 했었다. 이 곡은 피아노 독주곡이지만 전반적으로 오케스트라에서 느껴지는 깊고 웅장한 음색과 함께 교향곡적인 구조가 돋보인다. 또한 이 곡에는 청년 슈베르트의 원대한 꿈과 희망이 담겨있다. 실제로 슈베르트는 이 곡이 출판될 1823년에는 상당히 몸이 약해져 있었고 이후 항상 병고에 시달렸다. ‘방랑자 환상곡’이야 말로 진취적이고 건강한 청년 슈베르트의 마지막 모습이 담긴 곡이라고 할 수 있다.

1악장은 ‘방랑’이라는 제목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역동적인 C장조의 화음으로 시작한다. 후대 사람들은 연약하고 유약한 성품의 슈베르트를 떠올리지만, 실제로 그는 상당히 긍정적이고 굳은 의지의 소유자였다. 이 곡의 1악장의 서두를 들으면 슈베르트의 지인인 레오폴드 쿠펠비저가 그린 초상화의 굳게 다문 입매의 젊은 슈베르트의 결의에 찬 모습이 보인다. 본격적인 방랑, 혹은 여행의 출발을 알리는 활기찬 리듬을 보여주는 것 같다. 당당한 1주제에 이어 등장하는 2주제격의 선율은 E장조에서 펼쳐지며 밝은 에너지를 담고 있다.

재현부가 축소된 다소 획기적인 구성의 1악장에 이어 C#단조의 2악장의 첫 부분은 상당히 대조적이다. 독일 시인 게오르크 필립 슈미트의 시에 노래를 붙인 가곡 ‘방랑자’ D.493의 선율은 2악장의 첫머리에 잠시 등장한다. 모두 다섯 연으로 된 시의 두 번째 연에 해당하는 부분이 아주 짧게 인용되었는데 그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이곳의 태양은 내게 너무 차갑게 느껴진다,/ 꽃은 시들고. 삶은 오래되고,/ 그들이 하는 말은 공허하게 울린다./ 나는 어디에서나 이방인이다.”

슈베르트가 2악장에서 인용한 선율의 가사는 청년 슈베르트의 ‘방랑’이 단지 젊은이의 치기어린 여행만이 아님을 보여준다. 음악가로서의 감수성과 함께, 그 대척점에 있는 깊은 사고와 내적 갈등, 인생에 대한 성찰을 나타낸 것이다. 시와 음악을 통하여 심오한 사상적인 기품과 고상한 기개를 보여주고 싶었던 슈베르트의 의지가 돋보인다. 또한 자기 자신의 멜로디를 빌려왔지만 세세한 변화와 함께 철학적인 사고를 반영함으로써 일종의 변신을 시도한 점도 눈에 띈다.

안개 위의 방랑자(C.D.Friedrich 그림, 1818).

조금은 우울하게 시작된 2악장의 주제는 다섯 번의 변주를 거쳐 활기찬 3/4박자의 3악장으로 이어진다. 짧은 방랑 혹은 방황을 끝내고 슈베르트라는 한 인간이 한 단계 성숙해진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필자는 슈베르트의 후기의 세 소나타(D.958-D.960)에서 ‘방랑하는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아왔지만 결국 돌아 올 곳은 내가 여행을 떠난 바로 그곳’이라는 작곡가의 성찰을 느끼곤 한다. 더불어 후기 소나타에서 보이는 깨달음의 징후가 ‘방랑자 환상곡’에서 먼저 등장하는 것 같다.

이 곡을 ‘성도재일(成道齋日)’에 어울리는 곡으로 꼽고 싶다. 슈베르트의 역작 중 하나인 가곡집 ‘겨울나그네’가 주는 이미지 때문일까. 평생을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과 성찰, 그리고 삶에 대한 고뇌를 계속했던 슈베르트와 ‘깨달음’이라는 단어를 함께 두고 싶은 마음도 크다. 특히 그의 마지막 소나타 D.960의 2악장과 가장 유사한 느낌을 주는 이 곡의 2악장에서는 슈베르트가 끝없는 고민과 반복되는 자기성찰을 하는 동안 여러 가지 외적 유혹이 네 번째 변주를 통하여 나타나는 것 같다. 또한 곧 이어지는 마지막 변주는 궁극적인 삶에 대한 깨달음의 한 줄기 빛을 표현하고 있는 것만 같다. 

3악장과 4악장의 긍정적이고 역동적인 악상들은 그의 가곡에서 나타난 자조적이고 쓸쓸한 마무리와는 전혀 반대의 모습인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행진을 보여준다. 특히 마지막 악장의 전진하는 느낌의 푸가 주제는 ‘숫타니파타’의 내용을 연상케 한다. “결코 신들도 세상 사람도 그대의 군대를 정복할 수 없지만, 굽지 않은 발우를 돌로 부수듯, 나는 지혜를 가지고 그것을 부순다. 나는 사유를 다스리고, 새김을 잘 정립하여, 여러 제자들을 기르면서, 이 나라 저 나라로 유행할 것이다. 그들은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며 내 가르침을 실행하면서, 그대는 그것을 싫어하지만, 가서 슬픔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리라(정진의 경 19-21).”

특히 이 곡은 슈베르트 스스로 “제대로 완벽하게 연주하기는 어렵다”고 할 만큼 그의 전 작품을 통틀어 가장 기교적으로 어려운 작품으로 꼽힌다. 리스트는 이 곡의 난해함에 매력을 느끼고 오케스트라와 피아노를 위한 버전과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버전으로 편곡하기도 했다. 슈베르트는 원래 이 곡에 ‘불행한 사나이’라는 제목을 붙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긍정적이고 위풍당당한 승리감으로 끝맺는 이 곡에 ‘성공한 방랑(혹은 여행)’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 주고 싶었을까? 슈베르트는 이 작품을 통해 피아노 작품에 있어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방랑은 낭만주의의 요건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은 그의 저서 ‘피아노를 듣는 시간’에서 이 곡을 “피아노를 오케스트라 이상으로 철저하게 변신 시킨다”고 언급했다. 또한 ‘기교가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아닌 작곡가가 피아노의 소리와 형식에 대한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슈베르트에 대한 찬사를 보냈다. 전통적인 네 악장의 소나타 형식을 따르면서도, attaca(악장과 악장 사이를 쉬지 않고 연결하여 연주하는 것)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점과 마지막 악장의 푸가적인 주제는 리스트의 소나타 B단조를, 소나타의 형식을 취한 환상곡은 슈만의 환상곡 C장조 Op.17을 예견한 것이다. 

부처님오신날은 고타마라는 한 인물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다. 출가재일은 수행자로의 삶으로 내딛는 두 번째 탄생을 뜻하는 날이다. 그렇다면 성도재일은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의 또 하나의 탄생일이 아닐까. 깨달음으로 진정한 자유를 얻은 ‘붓다’의 탄생일은 4월 초파일 못지않게 의미 있는 날이다. 성도재일을 맞아 젊은 슈베르트의 모든 열정이 담긴 ‘방랑자 환상곡’을 감상하며 방랑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얻은 작곡가의 다채로운 음색을 느껴본다.

김준희 피아니스트 pianistjk@naver.com

 

[1572호 / 2021년 2월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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