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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다비드 칼리의 ‘인생은 지금’

기자명 박사

내일로 미루지 않고 ‘지금’을 산다는 것

은퇴한 남편이 꿈꾸는 새 삶과
일상대로 유지하는 부인의 삶
둘 차이서 ‘지금’의 가치 증명
매순간 충만하면 모두 귀한 삶

‘인생은 지금’
‘인생은 지금’

남자는 환희에 차서 부인에게 말한다. “드디어 은퇴야! 이제 우리 마음대로 살 수 있어.” 평생 동안 직장에 인생을 담보 잡히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매일매일 쳐내듯 하며 살아온 그는 드디어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눈앞에 펼쳐진 것을 본다. 이제 비로소 삶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부인의 반응이 시원치 않다. “이제 여행도 갈 수 있어! 어디로든 떠날까?” 하자 부인은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지금? 봄에 가자.”

남편의 어떤 근사한 제안도 부인을 함께 들뜨게 하지 못한다. “그럼 같이 외국어나 배울까?” “뭐하러. 언어 감각도 없으면서.” “아니면 악기도 좋겠다.” “나 음악에 소질 없는 거 알면서.” “호수에 밤낚시 가자! 옛날처럼.” “아이고, 그때야 당신은 류머티즘이 없었고 나도 허리가 말짱했잖아!”

이쯤 되면 남편도 같이 시큰둥해질 법한데, 그는 끈질기다. 부엌까지 따라와 부인을 재촉한다. “내가 좀 도와줄까? 빨리 끝내고 우리 같이….” “놔둬. 혼자 할 테니” “나도 요리를 배워볼까봐.” “나 지금 부엌 써야 되는데.” “하루 종일 풀밭에 누워서 구름이나 볼까?” “내일. 오늘은 청소 마저 하고.”    

남편의 기쁨이 조금씩 사그라드는 것이 보이고, 왠지 그냥 도시락 싸들고 공원이라도 가라고 등 떠밀고 싶어질 즈음 부인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매일 집안을 치우고 살림을 꾸리며 한결같이 자신의 삶의 장소를 지켜온 얼굴. 남편에게 은퇴는 해방이고 평생 한번 있을까말까 한 이벤트이지만 부인에게도 그러라는 법은 없다. 드디어 남편은 애원하기 시작한다. “왜 자꾸 내일이래? 인생은 오늘이야. 다 놔두고 가자.” “어디로?” “몰라. 그냥 숨이 찰 때까지 달려서 강물에 뛰어들자. 그리고 소리칠 거야. 당신을 사랑한다고.” “대체 왜?”

짧은 탁구 같은 문답 중의 한 문장에 눈이 멎는다. 부인의 말이다. “내 인생은 이미 여기 있는 걸.” 남편은 호기롭게 외친다. “인생은 쌓인 설거지가 아니야. 지금도 흘러가고 있잖아. 가자!” 

‘지금’의 가치를 힘 있게 보여주는 책이다. 내일로, 다음에로 미루지 말고 바로 지금 실행할 것을 권유한다. 밀린 일을 하느라 지금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면 당연히 손 안에 남는 것은 없다. 인생을 허겁지겁 소비하는 것에 가까운 삶. 인생은 어제에 있는 것도, 내일에 있는 것도 아니다. 늘 펼쳐지는 지금에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평생 하신 말씀이 이 안에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쯤에서 다시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과연 강물에 뛰어들어 사랑한다고 외치는 것은 지금을 사는 것이고, 설거지하고 청소하는 것은 아닌 것일까? 

틱낫한 스님은 설거지를 예로 들어 지금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설명한다. 설거지를 해치워야 할 일로 생각하거나, 잠시 후 마실 차를 생각하며 한다면 그것은 그저 숙제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그 일 자체에 집중하면 설거지가 꽤 재미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따뜻한 물, 거품, 그릇의 뽀득뽀득한 느낌, 차곡차곡 시렁 위에 엎어지는 그릇끼리 부딪치는 청량한 소리. 설거지를 할 때 설거지가 지금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임을 알고 있다면 그 자체로 ‘지금’을 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말과, 인생에서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나누어 사소한 것을 하찮게 여기라는 말은 같은 것이 아님에도 우리는 종종 혼동하곤 한다. 매 순간을 충만하게 산다면 그 순간에 하는 어떠한 일도 하찮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부인이야말로 완전하게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지금을 살아온 현자일 수도 있겠다. “인생은 지금이라니까”를 외치는 남편의 말은 옳지만, 인생은 구호가 아니다. 누가 ‘지금’을 제일 잘 살고 있는지는 비교가 불가한 일. 오직 자신만이 알 수 있다.

박사 북칼럼니스트 catwings@gmail.com

[1581호 / 2021년 4월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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